지난 4월 하순, 미국 워싱턴DC에서는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비공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미 국방부와 국무부의 고위 관료, 보스워스 전 주한 미국대사, 찰스 카트만 전 미 한반도평화담당특사, 로버트 아이만 전 군축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 미국내 한반도 전문가를 비롯해 한국의 외무부, 국방부 관계자와 학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정해진 프로그램이 끝난 뒤, 사석에서는 한국의 노무현 후보가 단연 화제였다. 회의에 참석한 미국 관계자들은 한국측 참석자들에게 노무현 후보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한 참석자에 따르면 그냥 묻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고 질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 관계자들은 이러한 미국측의 질문에 대부분 “괜찮다”고 대답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한 외교전문가에 따르면 한국 참가자들의 “괜찮다”는 답변에 한국의 일반 국민들도 알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미국측 고위 인사가 “노후보에 대해 긍정적으로 발언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나는 노후보가 급진 좌경 인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미국측 참석자들은 또 한국측 참가자에게 한미 동맹과 핵문제, 북한에 대한 노후보의 견해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노후보가 한미관계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가지 않을까도 이들의 주요 질문 사항이었다.
미국측 인사들의 또다른 관심사는 노후보의 미국 방문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측 참가자들은 대부분 “노후보가 꼭 미국을 방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미국측 인사들은 “한미관계가 성숙되어 있는데 꼭 미국에 올 필요가 있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노후보 발언으로 주가 떨어진다”
미국 사람들이 우려한 사안 중 하나는 노후보의 경제관이었다. 즉 노후보가 케인스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고려하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미국측 인사들은 한미동맹과 한반도의 군사 안보 상황은 대통령 한 사람이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견고하지만, 경제정책만큼은 대통령이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이 회의에서 미국의 한 고위인사는 “노후보 발언 하나 때문에 한국의 주가가 10∼20%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 관계자들이 노무현 후보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미국측에 노무현 후보에 대해 이렇다할 정보파일이 없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1945년 미군이 한국 땅에 주둔한 이후, 미국은 언제나 한국 정치인들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주도면밀하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과는 선을 대고 어떤 형태로든 친분을 쌓아둔다. 미 국무부가 시행하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은 한국 정치인을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년씩 미국으로 초청해서 미국의 연방의회, 지방의회, 행정부, 사법부, 인권 활동, 시민단체 활동 등 사회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전국을 관광시킨다.
정치인뿐 아니라, 언론인, 학자 등 한국사회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의 유력 인사들은 은연중에 친미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60년대에 이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미국은 반미 성향이 짙은 인물도 관리한다. 그 때문에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미국측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친미인지 반미인지 그 성향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다.
또 어느 경우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연계고리가 없는 경우다. 미국에게 노무현 후보는 바로 이 경우인 것 같다. 미국은 노후보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노후보가 너무 갑자기 부상했고, 미국의 관리망에 들어있지 않은 인물이라서 마땅히 선을 댈 만한 채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한미국대사관은 노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던 4월 무렵부터 노후보를 잘 아는 한국측 인사와 미국 대사관의 여론 파악 채널을 활용하여 집중적으로 노후보를 조사했다. 미국이 일차적인 판단 자료로 삼은 것은 노후보의 어록과 언론의 보도내용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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