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미 정보기관 노무현 뒤를 캐고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대선 X파일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4-09-06 15: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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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노무현 후보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노후보가 너무 갑자기 부상했고, 미국의 관리망에 들어있지 않은 인물이라서 마땅히 선을 댈 만한 채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한미국대사관은 노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던 무렵인 4월께부터 노후보를 잘 아는 한국측 인사와 미국 대사관의 여론 파악 채널을 활용하여 노후보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지난 4월 하순, 미국 워싱턴DC에서는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비공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미 국방부와 국무부의 고위 관료, 보스워스 전 주한 미국대사, 찰스 카트만 전 미 한반도평화담당특사, 로버트 아이만 전 군축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 미국내 한반도 전문가를 비롯해 한국의 외무부, 국방부 관계자와 학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정해진 프로그램이 끝난 뒤, 사석에서는 한국의 노무현 후보가 단연 화제였다. 회의에 참석한 미국 관계자들은 한국측 참석자들에게 노무현 후보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한 참석자에 따르면 그냥 묻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고 질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 관계자들은 이러한 미국측의 질문에 대부분 “괜찮다”고 대답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한 외교전문가에 따르면 한국 참가자들의 “괜찮다”는 답변에 한국의 일반 국민들도 알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미국측 고위 인사가 “노후보에 대해 긍정적으로 발언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나는 노후보가 급진 좌경 인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미국측 참석자들은 또 한국측 참가자에게 한미 동맹과 핵문제, 북한에 대한 노후보의 견해를 집중적으로 물었다. 노후보가 한미관계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가지 않을까도 이들의 주요 질문 사항이었다.

    미국측 인사들의 또다른 관심사는 노후보의 미국 방문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측 참가자들은 대부분 “노후보가 꼭 미국을 방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미국측 인사들은 “한미관계가 성숙되어 있는데 꼭 미국에 올 필요가 있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노후보 발언으로 주가 떨어진다”



    미국 사람들이 우려한 사안 중 하나는 노후보의 경제관이었다. 즉 노후보가 케인스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고려하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미국측 인사들은 한미동맹과 한반도의 군사 안보 상황은 대통령 한 사람이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견고하지만, 경제정책만큼은 대통령이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이 회의에서 미국의 한 고위인사는 “노후보 발언 하나 때문에 한국의 주가가 10∼20%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 관계자들이 노무현 후보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미국측에 노무현 후보에 대해 이렇다할 정보파일이 없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1945년 미군이 한국 땅에 주둔한 이후, 미국은 언제나 한국 정치인들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주도면밀하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과는 선을 대고 어떤 형태로든 친분을 쌓아둔다. 미 국무부가 시행하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은 한국 정치인을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년씩 미국으로 초청해서 미국의 연방의회, 지방의회, 행정부, 사법부, 인권 활동, 시민단체 활동 등 사회 구석구석을 보여주고 전국을 관광시킨다.

    정치인뿐 아니라, 언론인, 학자 등 한국사회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의 유력 인사들은 은연중에 친미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60년대에 이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미국은 반미 성향이 짙은 인물도 관리한다. 그 때문에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미국측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친미인지 반미인지 그 성향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다.

    또 어느 경우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연계고리가 없는 경우다. 미국에게 노무현 후보는 바로 이 경우인 것 같다. 미국은 노후보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노후보가 너무 갑자기 부상했고, 미국의 관리망에 들어있지 않은 인물이라서 마땅히 선을 댈 만한 채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한미국대사관은 노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던 4월 무렵부터 노후보를 잘 아는 한국측 인사와 미국 대사관의 여론 파악 채널을 활용하여 집중적으로 노후보를 조사했다. 미국이 일차적인 판단 자료로 삼은 것은 노후보의 어록과 언론의 보도내용 같은 것이다.

    4월 초순 워싱턴에서 한국의 대선 상황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알리는 발언이 터져나왔다. 한국문제 전문가이자,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인 제임스 켈리는 4월4일 워싱턴의 아시아협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장 단계에 접어들어 한국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 민주주의의 발전은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한국의 차세대 지도자가 한국에서의 미국의 전통적인 역할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를 다시 규정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잘 지켜보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한국의 다음 정부와 긴밀한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나는 미군 주둔으로 안보가 확보된 상태에 한국이 있었기에 이같은 성공이 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미국은 한국의 독립과 안보를 위해 3만7000여 명의 미군을 주둔시키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아 한국이 민주주의, 평화, 번영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발언은 분명히 ‘노무현 현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후 허바드 주한미국대사가 노무현 후보와는 상관없는 발언이었다며 공개적으로 해명하기도 했지만, 이는 워싱턴의 정서를 정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 발언이 있은 뒤 노후보는 4월12일 S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미 동맹을 유지하는 가운데 한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대미관을 밝혔다. 미국대사관은 이 방송내용을 모두 녹취해서 영어로 번역해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노후보의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한·미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과거의 의존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상호협력관계를 이루되 한꺼번에 하기보다는 점차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한미관계가,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는 미국 입장이 일방적으로 관철되었고, 김영삼 대통령 때는 정서적으로 주도적, 자주적 목소리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주도권이 (한국에)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과) 원만한 관계이면서도 주도적인 목소리를 부각했다. … 주한미군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필요하다. 이미 합의한 대로 용산기지를 이전하고, 한·미 행정협정을 일본이나 독일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노후보는 수평적 한미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노후보는 또 “대통령 후보가 되면 미국 조야에 신고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아 힘들다. 이는 사대주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그는 “눈도장을 찍기 위해 미국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미국대사관은 이미 지난해부터 공개 자료 분석을 통해 노후보를 반미성향이 짙은 인물로 분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2001년 8월2일자에 실린 “여(與) 수원 국정홍보대회 … 대선주자들 이총재 맹공”이란 제목의 기사를 영어로 번역해서 보고용 자료로 활용했다. 이 기사에서 노후보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무현 상임고문=이총재는 민족적 자존심도 없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복창하고, 공화당 일부 강경파 의원들에게 놀아나는 사대주의자다. 이총재는 1998년 10월부터 2년간 영남집회만 10여 차례 가지는 등 지역분열을 조장해왔다.”

    미국대사관은 공개자료에서 제기된 노후보의 자질과 과거 경력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월간조선’ 2002년 5월호에 실린, 노후보의 장인 권오석(權五晳)씨가 한국전쟁 당시 좌익에 연루되어 양민학살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내용이었다. 미국대사관은 이 기사도 영역하여 보고용 자료로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대사관은 공개자료 이외에 노무현 후보를 잘 아는 한국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노후보 분석 작업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측이 가장 긴밀히 접촉한 인물은 김광일 변호사(문민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 역임)다. ‘노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지난 4월경 미국대사관측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노무현과 김영삼 전 대통령(YS)과의 관계였다. 미 대사관은 노무현이 YS와 연결된다면 영남표를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YS와 노무현 사이에는 김광일 변호사가 있었다.

    김광일 변호사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미국대사관측과 접촉했고,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노후보에 대한 질문에 답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김변호사는 미국대사관측에서 전화가 걸려왔기에 통화를 했을 뿐, 직접 만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미국의 CIA 한국지부장이 김변호사를 만나 노후보에 대해서 상세히 조사했다”고 전했다.

    김광일 변호사 만난 CIA 한국지부장

    김변호사는 노후보를 인권 변호사로 만들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연결하여 정계에 입문시킨 사람이다. 김변호사와 노후보의 인연은 1979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변호사를 개업한 지 1년밖에 안된 신출내기 노변호사가 김변호사 밑에서 변호사 시보로 일하게 된 것.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부산 재야운동의 우두머리격으로 유신체제에 맞서서 재야인사를 변호하는 반체제 변호사로 이름이 높았다. 다음은 김광일 변호사의 설명이다.

    “노변호사가 1979년 내 사무실에서 두 달 정도 있었는데 사람됨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노변호사는 내가 반체제 변호사로 알려져 있던 터라, 내 밑에서 일하다 반체제 인물로 찍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당시 그는 판사생활 1년 만에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돈도 별로 없었다. 조심스레 내 편이 될 수 있는지 의중을 떠보았는데 노변호사는 법조계에서 출세하고 싶은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변호사 개업 자금 100만원을 빌려주었는데 몇 달 뒤 그는 그 돈을 갚았다.”

    노무현 후보가 순탄하게 변호사의 길을 걷던 1981년 7월, ‘부림(釜林)사건’이 터진다. 부림사건은 부산지역 학생과 재야운동권 인사 20여 명이 독서클럽을 결성해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시국사건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김광일 변호사는 부산지역의 인권 변호사를 모아 구속 학생들의 변호를 맡겼다.

    당시 그는 친한 변호사 5명을 수소문해 이 사건을 진두지휘했다. 이 와중에 추가로 학생 1∼2명이 구속되자, 김변호사는 노변호사에게 사건을 수임해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노변호사는 김변호사가 “내가 들어간 셈치고 변호해달라”고 부탁하자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노변호사에게는 중대한 전기가 되었다.

    김광일 변호사에 따르면 미대사관측은 ‘부림사건’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한다. 미대사관측이 질문한 핵심 내용은 부림사건이 좌익 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진상은 무엇이고 부림사건을 맡은 노변호사는 사상적으로 이상한 인물이 아닌가 등이었다고 한다.

    이같은 질문에 김변호사는 “부림사건은 1979년 부마항쟁 이후, 부산의 모든 민주화운동이 계엄령으로 제한되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폭압 상황이 계속되던 차에 터져나온 것이다. 당시 정부는 부산에 있는 반체제 성향의 학생 소탕 계획을 세우고 현재로서는 전혀 문제도 되지 않는 책을 읽었다는 죄목으로 학생들을 줄줄이 구속했다. 당시 구속된 학생들은 책을 읽은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혐의도 없었으나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소지죄’ ‘반공법’등으로 기소되었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은 학생들이 불온한 사상을 가졌음을 자백받으려고 부산시경 분실에서 고문했다. 노변호사는 최장 57일간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당한 피고인들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감정이 격앙된 노후보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검사와 삿대질을 할 정도로 격하게 변론을 했다.

    이에 대해 김광일 변호사는 “노변호사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흥분해서 책상을 치고 재판정에서 검사에게 삿대질을 하는 등 재판부에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이 무렵 노변호사는 생소했던 시국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피고인들이 읽었던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전후사의 인식’ ‘우상과 이성’ 등의 책을 읽었다.

    이듬해인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터진다. 이 사건으로 부산지역에서는 또 20∼30명이 무더기로 구속된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서울에서 이돈명, 황인철, 홍성우 등 쟁쟁한 변호사들을 불러 이 사건을 맡겼다. 그러나 정작 부산지역 변호사 중에서는 사건을 맡길 변호사가 없었다. 그는 노무현 변호사에게 이 사건을 수임해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김광일 변호사는 “노변호사는 1년 전의 ‘부림사건’ 때도 힘만 들고, 변호한 학생에게서 고맙다는 말도 못 들었다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름만 넣어달라고 겨우 달래서 변호인단에 노무현의 이름을 넣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후 노무현 변호사는 줄곧 부산지역에서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게 된다.

    김변호사는 미대사관측 사람과의 대화에서 노후보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변호사의 설명이다.

    “노무현 후보는 머리가 아주 명석한 사람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고등교육을 받지 못해 균형 있는 지식체계와 사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말 실수를 많이 한다. 특정 사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전문가 의견을 빌려야 할 텐데, 그러지 않고 말을 내뱉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 특정 언론과 싸우겠다는 태도가 대표적인 예다. 노후보는 외견상 때묻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고, 정치적 지조를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언동을 자주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또 이회창씨의 귀족적 이미지 때문에 반사적으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노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 노후보는 진정한 의미의 서민이 아니다. 어렵게 자란 탓인지 이재에 밝다. 변호사 시절에도 손해보는 사건은 절대로 수임하지 않았다.”

    김광일 변호사와의 이같은 대화는 미국대사관측이 노무현 후보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서울 포럼’과 ‘Pong Club’

    미국측은 한국 정치인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김광일 변호사처럼 특정인을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내에서 여론을 수집하는 고정 채널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 포럼’과 ‘Pong Club’이다.

    서울포럼은 전직 외무관료와 국내 유력 기업인, 언론인, 학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데 보수 성향이 짙다. Pong Club은 회장인 봉두완씨의 성(姓)을 따서 지었는데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한 언론인들이 회원이다.

    지난 5월2일 낮 12시 서울 강남 메리어트호텔 뒤 한 유황오리 식당에서는 Pong Club 모임이 열렸다. 한국측에서는 주요 언론사의 워싱턴 특파원 출신 간부들이 참석했고 미국측에서는 허바드 대사, 스티븐 라운즈 미공보원장,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정치참사관 등 주요 직원들이 총출동했다.

    이날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노무현 후보와 그의 대미관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한 언론인이 허바드 대사에게 “미국은 노후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이에 대해 허바드 대사는 “저는 미국 정부와 미국 대통령의 심부름꾼이다. 그래서 대선 후보의 자질에 대해 논평할 수 없다. 단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분과 미국과의 관계가 돈독해지도록 뒷받침할 것이다”고 대답했다. 답변이 끝나자 다른 언론인이 재차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 미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허바드 대사는 “누가 당선되더라도 한미관계는 별다른 이상이 없을 것이다. 노무현 후보가 되더라도 관계없다”고 답했다.

    잠시후 한 언론인이 시사주간지 ‘오마이뉴스 2002’ 창간호가 보도한 ‘백악관에 건네진 노무현 비밀 파일 “미국은 한국 대선에서 손 떼라”’는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허바드 대사는 “우리에게 투표권이 있느냐? 무슨 손을 떼란 이야기인가? 우리는 한국 대선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다만 외교 관리로서, 공관장으로서 한미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양국 국민의 이해와 협력을 북돋울 뿐이다. 개입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미국대사관측은 공식적으로 노무현 후보를 접촉해서 궁금증을 해소하기도 한다. 그 창구가 바로 민주당의 미국통 유재건 의원이다. 한미의원외교협의회 회장인 유의원은 현재 양국 의회 차원의 공식 외교 채널이기도 하다.

    미대사관이 유재건 의원에게 한 첫번째 질문은 ‘노후보가 언제 미국에 갈 것인가?’였다. 노후보는 정치권에 나온 지 15년이나 되지만 한번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유의원은 이에 대해 반미 성향 때문이 아니라 우연찮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4일 기자에게 유의원은 “미국측에 현재까지는 방미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고 답했다. 미대사관측이 유재건 의원에게 질문한 두번째 사안은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한 노후보의 견해였다. 이에 대해 유의원은 미국측에 “노후보는 미군철수를 주장한 적이 없다. 노후보는 미군 주둔을 이해하고 있다. 노후보가 미국을 방문한 적도 없고, 노동자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부 인사들이 반미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후보는 어떤 자리에서는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유재건 의원은 “아직도 미대사관측이 노후보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노후보에 대한 미국측의 의구심을 해소시킬 수 있는 문서나 자료를 우리쪽에서 하루바삐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의원은 현실적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노후보 진영에서는 아직까지 대미관계, 대북문제에 대한 정책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후보 캠프에서도 이 분야는 그리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TV토론과 국내정치다. 대북문제와 대미문제는 국내에서 잘하면 저절로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외교 안보가 중요한 문제지만 이것이 판세를 결정적으로 좌우할 변수는 아닌 것 같다. 너무 미국을 의식하고 방미문제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당선될 수 있다는 게 노후보 진영의 생각이다.”

    미국은 한국 정치 정세를 조사할 때 현직 외교관리나 정보기관 이외에도 자국의 민간 채널을 적극 활용한다.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이 그 선봉이다. 지난 5월13일 방한한 보스워스 전 미국대사는 방한 기간 비공식적으로 여러 인사를 만나며 한국의 대선 상황에 대한 여론을 청취했다. 그는 5월29일 출국하기 직전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12층 라운지에서 노무현 후보와 유재건 의원을 만났다. 유재건 의원은 보스워스 전 대사가 노후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사진 찍으러 미국 가지 않겠다는 노후보의 발언을 미국인들은 충분히 이해한다. 바쁜데 특별한 일도 없이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DJ의 대북 포용정책은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의 정책이다. 전세계가 여기에 공감하고 있다. 이 정책은 참을성을 요구하는 정책이다. 노후보가 이 포용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나도 안다. 노후보께서 한반도 문제를 잘 풀어나가길 바란다”

    미국의 잣대는 대미관과 대북관

    미대사관측의 조사활동은 대체로 노후보의 취약점인 외교 안보 정책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미대사관이 한국 정치인들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잣대는 바로 대북관과 대미관이다. 이 두 가지 틀로 한국 정치인을 저울질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국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국측이 각종 조사활동을 통해 노후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할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말한다.

    김대중 정부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클린턴 행정부가 물러나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것도 노무현 후보에게는 부담이다. 외형적으로는 한미간 공조체제에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외교가의 분석이다.

    비근한 사례로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들 수 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미국과 긴밀하게 협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정부의 기본적인 생각은 북한과의 교섭은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한·미·일 3개국 정책 조정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의 역할을 3분의 1로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3개국 정책조정은 남북대화를 지원하기 위한 장치이며, 남북대화에 앞서 한·미·일 3개국의 정책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려한 외교적 수사를 통해 서로의 정책을 이해하고 지지한다고 하지만, 김대중 정부와 부시 정부 간에는 갈등이 적지 않다.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부시 행정부는 DJ 정권을 승계한다는 정권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노무현 후보를 ‘철저히’ 검증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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