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던 마을에 선거바람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4월 초였다. 1991년부터 세 차례의 지방선거에 모두 출마했고, 1995년에는 당선되어 군의원을 지낸 마을의 유력인사 장대집(57)씨가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장씨와 친구들의 술자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출마설’은 마을을 두 바퀴 세 바퀴 돌면서 퍼져나갔다. ‘익명을 요구한’ 마을의 한 주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을 전체가 소문을 듣는 데 한나절이면 충분해요. 장씨 아저씨 또래 친구들이 나가라고 했다고 하대. ‘진혁이 그 어린애가 뭘 안다고 군의원을 또 하겠냐’고 슬금슬금 펌프질을 하니까 장씨 아저씨도 마음이 동한 거지 뭐.”
평소 현 군의원인 장진혁(45)씨의 역량을 불신하던 일부 마을 인사들이 장씨의 집을 찾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설’은 ‘사실’이 되어갔다. 정작 본인은 아직 ‘고민중’이라며 말을 아꼈지만 마을 분위기는 본격적인 선거전에 접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마음이 바빠진 것은 장진혁씨 진영과 중립적 인사들. 이번만큼은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싸우는 모습’이 연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후보 단일화(후단)’를 이루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후단’ 진영의 대표주자는 마을 이장 조용해(52)씨. 조씨는 노인회장 등 몇몇 ‘뜻 있는 인사’들과 함께 단일화를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이웃 마을의 단일 후보를 불러다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 첫 테이프를 끊은 조이장은 두 후보를 오가며 ‘마을을 위한 대승적 결단’을 촉구했다. 5월 중순을 목표로 두 후보의 단독면담이 추진됐다. 두 사람이 만나 터놓고 이야기하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회담은 끝내 열리지 못했고 두 사람은 각기 출마를 선언했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인 마을이다보니(상자기사 참조) 권위 있는 웃어른이 없어서 조정에 실패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5월28일, 양일간의 선거입후보등록기간이 시작됐다. 첫날 장진혁 후보가 50명을 꽉 채운 추천인 명단과 함께 군 선관위를 찾았다. 이튿날 장대집 후보도 똑같이 50명의 추천인 명단을 선관위에 제출했다.
등록과 함께 유세가 시작됐다. 장진혁 후보는 자택에, 장대집 후보는 자택 앞 비닐하우스에 선거캠프를 차리고 소파, 전화기, 텔레비전, 전기난로 같은 ‘선거운동장비’를 꺼내왔다. 바야흐로 전투개시. 피 말리는 선거전의 열기가 군사분계선 건너에 있는 오성산을 넘어 마을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여기서 한 표는 밖에서 천 표”
기자가 유곡리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남짓 걸리는 철원군 소재지에서 다시 30분을 들어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다. 산모퉁이를 돌아 남한측 GP(감시초소)와 북한측 GP가 한눈에 들어오는 골짜기에 마을은 자리잡고 있다. 계획 마을인 만큼 반듯한 도로를 끼고 비슷한 생김새의 집들이 나란히 서 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며 만난 김민진(71)씨는 “선거판이 장난이 아니다”고 입을 연다.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이 유권자의 10%도 넘는다는 것. 후보 부부와 사무장, 회계책임자, 5명의 선거운동원. 한 선거본부당 공식적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이가 아홉 명씩이다.
“이 눈곱 만한 마을에서 선거철마다 이게 웬 난린지 모르겠어. 그것도 매번 두 명 세 명씩 나와서 경쟁을 해대니, 남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군의원이 뭐 그리 좋은 거라고 욕심들이 많아.”
마을을 통틀어 총 60가구, 전체 인구 181명에 유권자 150명. 1991년, 1995년, 1998년까지 세 차례 치러진 선거에서 한번도 후보단일화를 이룬 적이 없었다. 첫 선거는 3파전이었다. 두 노장 이희석씨와 장대집씨의 경합이 예상되는 가운데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장진혁씨가 ‘젊은 후보’를 자처하며 도전장을 던졌던 것. 결과는 53표를 얻은 이희석 후보의 신승. 예상 외였던 것은 선두를 7표 차이로 위협한 장진혁 후보의 선전이었다.
1995년 지방선거 때 이들 3인은 또 출마했다. 전 선거에서 3위를 기록했던 장대집 후보는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트랙터를 동원해 주민들의 논일을 소리 없이 돕는 ‘선거법을 넘나드는’ 운동으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결과는 장대집 후보의 승리. 장진혁 후보는 이번에도 5표 차이로 분루를 삼켰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현직 프리미엄을 안고 있던 이희석씨의 몰락. 이씨는 24표를 얻어 1위에 비해 40표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떨어졌다. 예상치 못했던 큰 패배에 충격을 받은 이씨는 다시는 군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98년 선거는 남은 두 후보간의 2파전이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했던 선거전의 승자는 ‘만년 2위’였던 장진혁 후보. 결과는 75대 64.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나 두 사람은 한번 더 맞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이전과는 달랐다. 우선 두 후보가 모두 의정경험을 갖고 있다. 2기 의원을 지낸 장대집씨와 현 의원인 장진혁씨 모두 나름의 역량을 발휘했고, 주민들 모두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을 모두 겪은 마을 주민들이 객관적으로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었다.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바 있는 장진혁씨는 ‘장대집 체제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냐’는 ‘비교우위론’으로 유권자들을 파고들었고, 도전자 장대집씨는 ‘현 의원의 실책을 질책하고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심판론’을 공격논리로 설정했다.
그 외에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물밑 변수’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첫번째는 세대간의 감정싸움. 1세대로 구성된 이른바 ‘입주동기’ 그룹이 단합해 한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면 선거 최대의 변수로 떠오를 것이 자명했다.
다른 하나는 은퇴한 이희석씨의 결단 여부. 비록 선거를 떠났지만 이씨는 아직도 마을의 ‘정치적 원로’로서 지분을 행사하고 있었다. 2기 선거에서도 그를 찍은 ‘충성파’ 24표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후보 중 한 명이 이씨와의 연합전선에 성공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한 상황이었다.
전국의 읍·면·동별 평균 선거인수는 9885명. 유곡리 선거의 한 표는 다른 지역 66표의 무게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두 후보는 다른 선거구 후보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선거를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장대집 선거캠프의 한 운동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한 표는 밖에서 천 표야. 사이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정해져 있으니 바뀔 여지가 적은 거지. 여기서 한 표 움직이려면 밖에서 천 표 움직이는 공을 들여야 한다, 이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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