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유권자 150명 ‘초미니 선거’ 동행 취재기

“코미디 같다구요? 이게 바로 민주주의죠”

  • 황일도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hamora@donga.com

    입력2004-09-07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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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군 초소에서 불과 2km.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 ‘통일촌’ 마을은 민간인 통제선 이북에 위치한 전국 최소 단일 선거구다. 이 작은 동네에서 ‘개혁 지속론’을 주창하며 힘을 실어달라고 외치는 40대 현 군의원과 ‘독주 견제론’을 강조하며 노장층의 지지를 호소하는 50대 전 군의원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사람들의 흥미진진한 선거판 이야기.
    조용하던 마을에 선거바람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4월 초였다. 1991년부터 세 차례의 지방선거에 모두 출마했고, 1995년에는 당선되어 군의원을 지낸 마을의 유력인사 장대집(57)씨가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장씨와 친구들의 술자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출마설’은 마을을 두 바퀴 세 바퀴 돌면서 퍼져나갔다. ‘익명을 요구한’ 마을의 한 주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을 전체가 소문을 듣는 데 한나절이면 충분해요. 장씨 아저씨 또래 친구들이 나가라고 했다고 하대. ‘진혁이 그 어린애가 뭘 안다고 군의원을 또 하겠냐’고 슬금슬금 펌프질을 하니까 장씨 아저씨도 마음이 동한 거지 뭐.”

    평소 현 군의원인 장진혁(45)씨의 역량을 불신하던 일부 마을 인사들이 장씨의 집을 찾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설’은 ‘사실’이 되어갔다. 정작 본인은 아직 ‘고민중’이라며 말을 아꼈지만 마을 분위기는 본격적인 선거전에 접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마음이 바빠진 것은 장진혁씨 진영과 중립적 인사들. 이번만큼은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싸우는 모습’이 연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후보 단일화(후단)’를 이루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후단’ 진영의 대표주자는 마을 이장 조용해(52)씨. 조씨는 노인회장 등 몇몇 ‘뜻 있는 인사’들과 함께 단일화를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이웃 마을의 단일 후보를 불러다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 첫 테이프를 끊은 조이장은 두 후보를 오가며 ‘마을을 위한 대승적 결단’을 촉구했다. 5월 중순을 목표로 두 후보의 단독면담이 추진됐다. 두 사람이 만나 터놓고 이야기하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회담은 끝내 열리지 못했고 두 사람은 각기 출마를 선언했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인 마을이다보니(상자기사 참조) 권위 있는 웃어른이 없어서 조정에 실패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5월28일, 양일간의 선거입후보등록기간이 시작됐다. 첫날 장진혁 후보가 50명을 꽉 채운 추천인 명단과 함께 군 선관위를 찾았다. 이튿날 장대집 후보도 똑같이 50명의 추천인 명단을 선관위에 제출했다.

    등록과 함께 유세가 시작됐다. 장진혁 후보는 자택에, 장대집 후보는 자택 앞 비닐하우스에 선거캠프를 차리고 소파, 전화기, 텔레비전, 전기난로 같은 ‘선거운동장비’를 꺼내왔다. 바야흐로 전투개시. 피 말리는 선거전의 열기가 군사분계선 건너에 있는 오성산을 넘어 마을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여기서 한 표는 밖에서 천 표”

    기자가 유곡리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남짓 걸리는 철원군 소재지에서 다시 30분을 들어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다. 산모퉁이를 돌아 남한측 GP(감시초소)와 북한측 GP가 한눈에 들어오는 골짜기에 마을은 자리잡고 있다. 계획 마을인 만큼 반듯한 도로를 끼고 비슷한 생김새의 집들이 나란히 서 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며 만난 김민진(71)씨는 “선거판이 장난이 아니다”고 입을 연다.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이 유권자의 10%도 넘는다는 것. 후보 부부와 사무장, 회계책임자, 5명의 선거운동원. 한 선거본부당 공식적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이가 아홉 명씩이다.

    “이 눈곱 만한 마을에서 선거철마다 이게 웬 난린지 모르겠어. 그것도 매번 두 명 세 명씩 나와서 경쟁을 해대니, 남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군의원이 뭐 그리 좋은 거라고 욕심들이 많아.”

    마을을 통틀어 총 60가구, 전체 인구 181명에 유권자 150명. 1991년, 1995년, 1998년까지 세 차례 치러진 선거에서 한번도 후보단일화를 이룬 적이 없었다. 첫 선거는 3파전이었다. 두 노장 이희석씨와 장대집씨의 경합이 예상되는 가운데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장진혁씨가 ‘젊은 후보’를 자처하며 도전장을 던졌던 것. 결과는 53표를 얻은 이희석 후보의 신승. 예상 외였던 것은 선두를 7표 차이로 위협한 장진혁 후보의 선전이었다.

    1995년 지방선거 때 이들 3인은 또 출마했다. 전 선거에서 3위를 기록했던 장대집 후보는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트랙터를 동원해 주민들의 논일을 소리 없이 돕는 ‘선거법을 넘나드는’ 운동으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결과는 장대집 후보의 승리. 장진혁 후보는 이번에도 5표 차이로 분루를 삼켰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현직 프리미엄을 안고 있던 이희석씨의 몰락. 이씨는 24표를 얻어 1위에 비해 40표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떨어졌다. 예상치 못했던 큰 패배에 충격을 받은 이씨는 다시는 군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98년 선거는 남은 두 후보간의 2파전이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했던 선거전의 승자는 ‘만년 2위’였던 장진혁 후보. 결과는 75대 64.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나 두 사람은 한번 더 맞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이전과는 달랐다. 우선 두 후보가 모두 의정경험을 갖고 있다. 2기 의원을 지낸 장대집씨와 현 의원인 장진혁씨 모두 나름의 역량을 발휘했고, 주민들 모두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을 모두 겪은 마을 주민들이 객관적으로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었다.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바 있는 장진혁씨는 ‘장대집 체제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냐’는 ‘비교우위론’으로 유권자들을 파고들었고, 도전자 장대집씨는 ‘현 의원의 실책을 질책하고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심판론’을 공격논리로 설정했다.

    그 외에도 선거에 영향을 미칠 ‘물밑 변수’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첫번째는 세대간의 감정싸움. 1세대로 구성된 이른바 ‘입주동기’ 그룹이 단합해 한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면 선거 최대의 변수로 떠오를 것이 자명했다.

    다른 하나는 은퇴한 이희석씨의 결단 여부. 비록 선거를 떠났지만 이씨는 아직도 마을의 ‘정치적 원로’로서 지분을 행사하고 있었다. 2기 선거에서도 그를 찍은 ‘충성파’ 24표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후보 중 한 명이 이씨와의 연합전선에 성공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한 상황이었다.

    전국의 읍·면·동별 평균 선거인수는 9885명. 유곡리 선거의 한 표는 다른 지역 66표의 무게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두 후보는 다른 선거구 후보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선거를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장대집 선거캠프의 한 운동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한 표는 밖에서 천 표야. 사이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정해져 있으니 바뀔 여지가 적은 거지. 여기서 한 표 움직이려면 밖에서 천 표 움직이는 공을 들여야 한다, 이 말씀이야.”

    장진혁 후보.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1973년 입주할 때 마을에 들어온 2세대 대표주자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군 생활과 읍내에서의 짧은 직장생활을 제외하고는 줄곧 이 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코흘리개 진혁이’로 기억된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내건 선거 컨셉트는 “유곡리가 변하고 있다”는 것. 1세대의 낡은 사고방식으로는 마을의 경제적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의식이 반영된 구호라고 본인은 설명한다. 핵심공약은 마을을 지나는 안보관광도로의 조기 개설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농산물 직거래 판매장의 설치. ‘현상유지’가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겠다는 의욕이 엿보인다.

    장진혁 후보는 마을 구석에 있는 자신의 집에 선거캠프를 차렸다.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장 등을 선거본부에 영입하는 등 현직 의원으로서의 프리미엄이 돋보인다. 그 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단연 김정근(58) 사무장. 캠프를 이끌고 있는 유곡리 마을의 새마을지도자다. 마을 1세대이자 상대 후보의 친구이기도 한 그는 조용한 모습과 목소리의 소유자. 재미있는 것은 그가 지난 1994년에는 장대집 후보의 선거사무장을 맡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장대집 의원의 의정활동을 3년 가까이 보좌했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장대집씨와 의가 상해 그의 곁을 떠났다. 이후 1998년 선거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가 이번 선거에서 장진혁 후보의 사무장을 맡으면서 선거판에 복귀했다.

    1994년 선거를 승리로 이끈 ‘관록’에, 상대 후보의 선거전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의 존재는 이번 선거의 또 다른 관심사였지만, 상대후보 진영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보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어찌 됐건 김씨가 이번 선거를 다시 한번 승리로 이끈다면 그는 개인적으로 ‘후보에 상관없이 당선시키는 선거의 귀재’라는 명성을 얻게 될 상황.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미국의 선거전문가 딕 모리스를 연상케 하는 김씨의 성공 여부는 선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였다.

    장진혁 후보 본인은 지난 4년간의 의정 활동을 근거로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 동안 장진혁 후보는 마을의 최대 현안이었던 토지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재정지원을 이끌어내는 큰 수확을 거뒀다. 주택 등기를 군청에서 입주 주민 앞으로 바꾸고, 예산을 따내 마을주택 지붕을 수리하는 등의 사업도 펼쳤다.

    그러나 업적이 많으면 적이 많다고 했던가. 사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크고 작은 오해들이 오히려 장진혁 후보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마을 뒤를 돌아나가는 소하천 장비사업. 마을 구석에서부터 공사가 시작됐는데 공교롭게도 이것이 바로 장의원의 집 옆이었던 것. 사람들은 수근대기 시작했고 소문은 마을을 떠돌았다.

    중앙정부로부터 따낸 농지구입자금 역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비난이 일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전방지역에 불어 닥친 땅 투기 열풍의 와중에서 땅값이 두세 배 이상 뛰어버린 것. 아무리 장기저리 상환 자금이라지만 감당할 수 없이 높아진 땅값을 빌리기에는 마을주민 모두 부담이 컸다. 결국 자금은 은행금고에서 잠을 잤고, 마을 일부에서는 “진혁이가 자기만 군청에서 등기를 이전해 외지인에게 높은 값에 땅을 팔았다”는 마타도어가 제기됐다. 이른바 ‘장진혁 비토 세력’이 태동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노스탤지어를 잡아라

    장대집 후보의 집은 마을광장 옆에 위치하고 있다. 뜰 앞에 있던 비닐하우스에 선거캠프를 차린 장후보 진영은 주민들의 동선과 일치하는 까닭에 늘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장대집 후보는 스스로 ‘농사밖에 지을 줄 모른다’고 말하는 입주 1세대. 뿐만 아니라 그는 6·25 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진짜 토박이’다. 전쟁 후 부모도 없이 떠돌다 나이가 들어 1973년 ‘금의환향’한 것. 당연히 이 지역에서는 누구 못지않은 발언권을 갖고 있는 마을의 중추 세대로 30년을 보냈다. 선거 컨셉트는 “믿음직하고 황소 같은 장대집”.

    “나는 농사꾼입니다. 무식한 것도 사실이고, 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유곡리를 압니다. 우리가 얼마나 뼈 빠지게 일했는지 잘 압니다. 나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번드르르한 말도 할 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우리가 고생했던 만큼 대우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1세대가 군의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저를 밀어주십시오. 정직한 일꾼, 이 장대집이를 밀어주세요.”

    6월5일 마을광장에서 열린 합동유세에 울려퍼진 장대집 후보의 출마 일성이다. 사실 장대집 선본의 가장 큰 힘은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1세대들의 고생담’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른바 ‘입주동기’들 사이의 끈끈한 동지 의식이 바탕이라는 것.

    “북한 방송이 울려 퍼지는 살벌한 동네에서 함께 황무지를 개간해 여기까지 왔지. 형제보다 오히려 낫다니까. 마을을 처음 세웠을 때는 옥수수 한 솥을 쪄도 모두 나눠먹을 정도로 우애가 좋았어. 살기는 퍽퍽했어도 얼마나 좋은 동네였나 몰라.”

    장대집 후보 선거진영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마을 노인의 말이다. 장후보의 선거전략은 바로 이 ‘노스탤지어’에 근거하고 있다. 옛날 고생을 모르는 ‘어린애’가 마을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정서다.

    장대집 후보 캠프에서 눈에 띄는 것은 후보와 끈끈한 연대의식을 다져온 입주동기 1세대들. 중·노년층이 유권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대집 후보가 이들의 구심점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정치적 자산이었다.

    장후보가 ‘실버타운 건설’이라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공약을 내건 것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한다. 1세대들이 늙어감에 따라 마을은 거의 수명을 다했다는 판단이 깔려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회로 빠져나간 마당에 도로나 직판장 같은 공약들은 호소력이 없다고 장대집 후보 캠프는 판단하고 있었다. 대신 수십 년을 고생한 1세대와 노인들이 남은 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며 실버타운이라는 비전을 제시한 것.

    또 다른 전략 포인트는 ‘현 군의원의 독주 견제’. 이는 ‘장진혁 비토세력’이 장대집 후보 쪽으로 결집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진혁이가 일은 많이 벌였는지 몰라도, 그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여.” 장대집 후보 캠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노인들만이 오가는 캠프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장대집 후보가 띄운 또 다른 승부수는 ‘젊은 피’ 수혈. 읍내에 나가 있던 30대 초반의 송석배씨를 사무장으로 영입하면서, 송씨를 따르는 젊은이들을 자연스럽게 선거운동원으로 끌어들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누비는 이들 운동원들 덕분에 선거는 더욱 떠들썩해졌다. 후보 본인의 중년층 인맥에 청년층까지 포섭한 장대집 후보는 인적 구성에서 만큼은 단연 우위를 점한 듯 보였다.

    그러나 한계는 있었다. 2기 군의원일 때 활동에 대한 회의론이 그것이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마을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씨 아저씨가 정직한 사람인 거는 다 아는 얘기지. 그런데 그만큼 야무지지가 못했단 말이야. 의정일을 농사일 하듯 하니까 성과가 별로 없는 거야. 3년 동안 한 일이 뭐 있어.”

    정서적 호소력과 정책적 약점. 장대집 후보의 상반된 두 측면 가운데 유권자들은 과연 무엇을 고려할 것이냐가 승부의 관건인 셈이었다.

    선거를 이틀 앞둔 6월11일, 모 정당의 철원군수 후보가 두 군의원 후보의 선거캠프를 찾았다. 우선 장대집 후보 캠프에 자리를 잡은 군수후보는 넉살 좋게 말을 꺼낸다.

    “내가 군수할 때 여기 장선생님이 의원 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길 누가 닦은 거요? 장선생이랑 나랑 닦은 거요. 손발이 착착 맞았다니까. 이번에도 우리 장선생님 찍으실 분들은 군수후보로는 나를 찍어주시면 돼요. 아시겠죠?”

    15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장진혁 후보 캠프를 향해 자리를 옮기는 군수후보. 50m도 안 되는 거리지만, 장대집 선거캠프의 시선을 의식해 자동차를 타고 마을을 빙 둘러가는 길을 택한다.

    “우리 장의원 일 잘하시는 거야 내 잘 알지. 장의원이 이장 하실 때 내가 군수였잖소. 마을이 발전하려면 장의원 같은 분이 계속하셔야 되는 거 내가 모르나? 그렇지만 어디 가서 ‘유곡리 군의원은 장진혁 후보가 돼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다닐 수는 없는 거니까. 좀 이해해 주소.”

    이번에는 한껏 목소리를 낮춘 군수후보의 말이다. 단체장이 지방의원에 기대어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이 낯설다. 유곡리 선거는 정당이나 단체장 후보 같은 변수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장진혁 후보의 말이다.

    “아주 의미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도시와는 다르죠. 마을 주민들은 군의원을 이미 결정해 놓은 경우가 많으니까 오히려 그에 기대서 군수 후보도 자신을 밀어달라고 하는 거고. 시골에서는 자치후보가 그렇게 중요한 거요. 도지사보다 군의원이 더 의미가 크다니까요.”

    해가 저물었다. 장진혁 후보 캠프의 한 선거운동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흘린다.

    “밤 8시만 되면 재미난 일이 생길 거요. 시간되면 한 바퀴 돌아보시구려.”

    무슨 뜻일까. 밤이 깊어 나선 마을길 곳곳에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장대집 후보 선거운동원들이었다. 바로 장대집 후보 캠프를 찾았다. 운동원들이 왜 마을을 순찰하느냐고 기자가 묻자 대답을 꺼리던 장대집 후보의 부인의 비로소 말을 꺼낸다.

    “저쪽에서 뭐 딴짓 하나 지켜보려고 그런대요. 마을이 좁으니까 낮에는 별다른 짓을 할 수가 없잖아. 혹시 밤에 선거법 위반 않나 본다는 거지. 나이든 사람들은 말리는데도 젊은이들이 반 장난삼아 그러는 거예요.”

    그러자 다른 선거운동원이 맞장구를 친다.

    “저쪽도 만만치 않아요. 한밤중에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가서 우리 비닐하우스를 빤히 쳐다보고 있더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말은 반 장난이라지만 그제서야 기자도 마을 주민들이 선거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거가 마을을 망친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야.”

    스스로 중립을 표방하고 있고, 두 선본을 모두 안방 드나들 듯 하고 있는 이호수(59)씨의 일갈이다.

    “선거만 한번 하면 마을에 편이 쫙 갈라져서는 서로 냉랭하기가 소 닭 보듯 해. 딴 마을 사람들끼리도 이렇게는 안 한다고. 어떻게 된 게 후보보다 참모들이 더 무서워. 꼭 쌓였던 감정 풀려고 편 나누기 한 것 같다니까.”

    6월12일. 마지막 선거 운동일의 아침이 밝았다. 농촌의 하루는 도시보다 일찍 시작한다. 새벽 5시, 부옇게 먼동이 트자마자 주민들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마을 앞 들을 향했다. 이날도 그동안의 선거운동 기간처럼 들에 나가 주민들을 만난 장대집 후보는 느긋한 모습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시경부터 장진혁 후보 부부가 집집마다 방문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멀리 장진혁 후보가 주민들과 나누는 인사말이 들린다.

    “저 진혁입니다. 댁에 계셨네요. 잘 부탁 드린다고 인사 왔습니다.”

    “왔는가. 그 동안 한 일이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는 말고, 내일이 투표날이지? 그려, 알것네. 선거운동 하느라 고생 많았네.”

    골목을 누비는 장진혁 후보 내외의 모습이 포착되자 장대집 후보 캠프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우리도 돌아야 하는 거 아냐?’ 운동원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정작 후보 본인은 느긋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선거운동이라는 게 평소에 잘해야 하는 거지, 막판에 힘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

    남편의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멀리 상대후보의 잰걸음을 거푸 쳐다보던 장대집 후보의 아내는 답답함을 떨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라도 마을을 한바퀴 돌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손바닥만한 동네를 돌면서도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이상한 선거운동’이 오전 내내 계속됐다.

    객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대집씨가 믿었던 것은 무엇일까.

    장씨는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희석씨를 수차례 만났다. 이희석씨에게서 지지를 약속 받은 것이냐고 묻는 기자에게 장씨는 특유의 느린 말투로 알 듯 말 듯한 답변만 남긴다.

    “그건 뭐,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청하는 것은 당연한거고…. 그 사람 좋아하는 사람들 있는 것도 다 아는 거고….”

    선거가 시작되면서 이희석씨는 ‘엄정중립’을 선언했었다. 투표를 하루 앞둔 이날까지 약속은 지켜졌다. 그러나 이희석씨 역시 장대집씨와 같은 입주동기. 과연 이씨는 폭탄선언 없이 하루를 보낼 것인가. 사람들이 수근대기 시작할 무렵 투표를 준비하기 위해 기마읍사무소 직원 이정수(31)씨가 마을광장에 도착했다. 어느새 오전 11시였다.

    곧 이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투표함이 도착했다. 투표장소는 마을회관 옆 청년회 사무실. 분주히 오가며 투표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양 선거캠프 사람들 역시 덩달아 바빠졌다. 최후의 판세분석 작업이었다.

    “15표 차이는 날 거라고 봅니다.”

    마을 일주를 끝마치고 캠프로 돌아온 장진혁 후보의 말이었다.

    “투표할 사람도 뻔해요. 일본 가 있는 28호네 딸, 집 나간 아줌마 등등을 제하고 나면 투표자 수는 145명 내외일 거고, 부동표가 한 10표 내외일 것으로 봅니다. 그 중에 반만 우리가 갖고 온다 해도 15표 차이는 납니다.”

    반면 오후가 저물어가면서 장대집 후보는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다. 계속된 수면 부족 탓일까.

    “뭐 최선을 다했으니까. 우리가 이긴다고 봐요. 계산해보니 우리가 유리하다니까. 우리 측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 투표에 참여한다면 당연히 이기지.”

    장대집 후보 캠프가 눈여겨보고 있는 막판 변수는 바로 마을 밖에 나가 있는 2세대들이었다. 거주지는 밖이지만 상당수가 투표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모님의 지지후보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장대집 선본의 분석. 자신을 지지하는 노인들에게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재촉하는 것이 장대집 후보 측의 마지막 선거운동이었다.

    공식 선거운동은 자정까지지만 이미 눈에 띄는 선거운동은 모두 마무리된 상태. 마을회관에는 보관된 투표함과 함께 감시위원들이 잠을 청했고, 인근에는 ‘100m 밖에서 투표함을 지켜야 하는 경찰차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온 마을에 긴장감이 흘렀다.

    투표일인 이튿날 새벽, 장대집 후보 일가족은 5시30분에 마을회관에 갔다. 첫번째로 투표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심산이었을까. 30분을 기다려 투표를 마친 장대집 후보 일가족은 모두 5명이었다.

    11시경 날카로워진 두 선거진영 사람들끼리 마찰이 일었다. 문제의 발단은 연로한 이장네 할머니. 약간의 치매 기미가 있는 할머니의 투표소에 이장과 선거진행요원이 함께 들어간 까닭이었다.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아, 돋보기만 대 드렸다니까. 내가 누구 찍으라고 말한 게 아니잖은가.”

    “그래도 무슨 일을 그렇게 하나. 민주주의는 절차여, 절차. 구씨 할머니는 혼자 들어가셨는데, 왜 이장네는 그렇게 한단 말이여? “

    선거진행요원이 중재에 나섰지만 상황이 수습되는 데는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장대집 후보 측의 분은 풀리지 않은 듯 했다.

    “한두 표 차이로 결과가 갈리면 문제가 될 꺼라고.”

    저녁 6시 투표가 마감됐다. 최종 투표수 144표, 투표율 96.6%. 부재자투표 1표를 제외하면 4표가 기권한 셈이었다. 정성스레 봉인을 한 투표함이 봉고차에 실려 개표장소인 신철원으로 출발했다. 개표는 더뎠다. 도지사와 군수, 도의회 선거 결과를 먼저 집계하는 까닭에 더욱 늦었다.

    ‘○○도지사 XXX후보 몇 표…’만을 반복하는 TV에 진력이 나있던 장진혁 후보의 아내가 선거운동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3시30분 무렵이었다. 17표 차이. 예상보다 대승이었다. 20분이 지나 전화를 건 남편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대집 후보 역시 전화를 받았다. 만세소리도 들었다. 쓸쓸한 패배. 내일은 늦잠을 자야겠다고 다짐하며 장후보는 안방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다시는 선거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끝내 중립을 지킨 이희석씨를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일까. 마을을 만드는 데 30년 청춘을 보냈지만 이제는 2세대들의 시대가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소주가 더욱 쓴 모양이었다.

    이튿날 마을에 돌아온 장진혁 당선자 부부는 마을을 돌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 동안 펼쳐온 사업을 확고히 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장대집 후보 부부는 들에 나갔다. 선거운동 기간 소홀히 했던 논두렁에는 잡초가 가득했다. 입후보를 결심한 지 근 한달 만에 다시 나선 농사일이었다. 인사하러 찾아온 장당선자에게 장대집씨는 “열심히 하라”는 마을 어른으로서의 덕담을 남겼지만, 서먹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15일간 마을을 뒤흔들었던 한바탕 촌극의 끝치고는 심심한 결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선거운동을 한 것치고는 허무하다 싶은가요? 난 시원하기만 하구만. 박 터지게 싸웠는데 하루 아침에 도로 친해지기는 어렵지. 한 두어달 지나야 대면대면해질 걸. 그 때쯤 진혁이네가 마을 잔치라도 한번 해야 될 텐데 어떻게 될지 몰라.”

    결과를 지켜본 조용해 이장의 말이었다. 굳이 선거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기자가 물었다. 여의도 정치판 못지않은 인맥과 정치방정식이 동원되고, 딕 모리스를 연상케 하는 합종연횡이 출몰한 그간의 소동은 의미 없는 감정싸움이었느냐고. 조이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렇다고 선거가 마을에 해가 되냐면 그건 아니거든. 선거운동 하는 동안 그 동안 쌓였던 앙금도 풀고 말이지. 하다못해 이때라도 되어야 기자들도 와서 기웃대고, 마을도 들썩들썩 하는 거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마을에 대해 고민을 풀어놓아야 문제가 해결되고 발전하는 거잖아요.

    정권도 그렇잖아, 한번 바뀔 수 있다는 걸 보고 나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국민들 눈치 더 열심히 보고. 마을도 똑같아요. 언뜻 보면 이 조그만 마을에서 선거한다고 법석대는 게 코미디 같지만, 그게 바로 민주주의 아니요?”

    네 번의 선거를 모두 지켜본 조이장의 ‘선거철학’이었다. 그 순간 기자의 머릿속에 이 작은 마을이야말로 전국 그 어느 곳보다 제대로 선거를 치른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주민이 모든 후보를 제대로 알고 찍은 한 표. 유곡리가 96.6%의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선거에서 전국평균 투표율은 딱 절반인 48.9%였다.

    이날 저녁, 온 마을은 한국과 포르투갈의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며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후 두 주일 만에 돌아온 유곡리의 평온한 일상이었다. 마을 앞 논바닥에서는 세상살이에 무심한 개구리가 여느 때처럼 시끄럽게 울어제꼈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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