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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숨은 인권운동가 ④

“정의가 살아 있는 군대 만들겠다”

군의문사 유가족들 아픔 보살피는 이철학 신부

  • 황일도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hamora@donga.com

“정의가 살아 있는 군대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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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1차 조사는 해당 부대의 헌병대가 맡는다. 대부분의 경우 헌병대 담당 조사관과 사망자의 상급자는 같은 부대 내에서 친분관계에 있다. 수사결과에 따라 해당 지휘관은 엄정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현장보존이나 사고이유에 대한 면밀한 분석보다는 조속한 시일 내에 사건을 마무리짓는 데 급급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대책위와 군가협의 판단이다.

“많은 경우 일단 사망원인을 자살로 단정짓고 조사에 착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조사가 미처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유족들에게 ‘자살이 확실하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타살의 확증이 없으므로 자살’이라는 식이지요.

자살로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도 그 원인은 천편일률적으로 사망자 본인의 문제로 한정짓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가정문제, 여자문제, 금전문제 등은 ‘고정 레퍼토리’나 다름없으니까요. 부대 측의 이러한 결과발표에 대해 유족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그때부터 지리한 싸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유족들이 확인하기도 전에 사고현장을 정리하거나 시신을 닦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세탁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사건 수사의 기본 원칙도 없다”는 게 이신부의 지적이다.

“부대 입장에서는 유족들이 귀찮을 수도 있겠지요. 지휘관으로서는 사망사고가 일어나면 인사고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니 하루 빨리 마무리짓고 싶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족이 최대한 납득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공개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유족과 함께 정확한 사인을 찾아내면 될 것 아닙니까. 왜 굳이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분란을 일으키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군사보안지역이라는 이유로 유족들의 현장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사망사고와 관련해 관계자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유족들의 눈에는 사건축소나 진상은폐를 위한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대책위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군측은 보안업무시행규칙 등을 근거로 민간인인 유족들이 사건현장을 촬영하거나 소대원 등 목격자들과 면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군 당국의 조사와 발표만을 믿어야지, 유족들이 개별적으로 조사활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다.

“1차 조사가 끝나고 유족이 ‘이러이러한 사항 등 미비한 점이 너무 많다’고 의혹을 제기하면 부대는 항상 그 부분에 대한 대답만 만들고는 ‘재조사를 마쳤다’고 말합니다. 사건 전체에 대한 재조사가 아니라 유족이 지적한 일부 사항에 대해서만 답변을 마련하는 수준인 거죠.”

1999년 국방부는 김훈 중위 사건과 관련해 군의문사를 둘러싼 사회적 여론이 증폭되자 특별합동조사단을 출범시켰다. “모든 것을 한 점 의혹 없이 밝힌다”며 가동된 특조단은 2년 여의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조단이 접수한 166건 가운데 사망사고 분류를 변경한 것은 모두 17건. 이는 변사나 일반사망, 병사에서 순직으로 바뀐 숫자다. 대부분 공무수행의 범위를 좀더 넓게 해석한 최근의 판례에 따른 것일 뿐, 타살 의혹을 밝혀내거나 자살원인을 새롭게 찾아낸 경우는 없었다. 지난해 9월 대책위와 유가족들은 명동성당 입구에서 “차라리 특조단을 해체하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신부는 “엄혹한 1980년대가 없었다면 지금쯤 평범한 직장인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시 꽤 잘 나가는 공기업에 다니던 직장인 이철학의 삶을 뒤흔든 것은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대대로 천주교를 믿어온 이신부 가족들이 다니던 대구 지역 성당에까지 사건의 파장이 밀려들었다.

“제가 참여했던 성가대에서 한 형제가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김현장, 문부식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안했죠. 그랬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 후에 형사들이 와서 캐묻고 가더군요. 순간 느낌이 왔죠. ‘아, 이런 거구나.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신앙인으로서의 양심과 사회문제가 다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더군요.”

인생 바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웬만큼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살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20대 초반의 젊은이는 짧지 않은 고민 끝에 1984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Pro Mundi Vita(세상의 생명을 위하여)’라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사목의 지표가 됐다. 생활인으로서의 삶, 가족 안에서의 행복과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생각이 많았죠. 1980년대에 신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고민과 맞서야 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여교사들이 꽃다발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것에 마음을 뺏기는 낭만은 정말 한 순간이었어요. 밤 늦은 시간에 열리는 기도회, 그리고 유인물 만들기가 계속됐습니다.”

그 시절 이신부와 함께 공부하던 많은 동기들 중 대부분은 사제가 됐지만, 일부는 신학교를 떠나 세상에서의 싸움을 선택했다.

“50여 명의 동기들 중에 유난히 운동가가 많은 것은 그 시절의 분위기 때문일 거예요. 지금 대책위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홍기영 간사도 제 동깁니다. 제가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 끌고오다시피 했죠.”

1991년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신부는 사제서품을 받고 사목활동에 나섰다. 1989년 임수경 방북, 그 뒤를 이은 문규현 신부의 방북과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으로 천주교가 민주화운동의 주요 축 가운데 하나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과 함께 움직이며 ‘교과서 밖의 사목’을 고민하던 이신부는 1996년 10월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 부임하면서 비로소 제 역할을 만났다고 회고한다.

“평화시장에는 교회가 따로 없었습니다. 상인들과 노동자 등 주위에 신도만 1000명이 넘었지만, 자발적인 공동체가 전부였지요. 창고 자리였던 평화시장 6층의 작은 방을 개조해 사제관 겸 성당을 만들었습니다.”

늦은 밤에야 영업을 시작하는 상인들을 위해 밤을 새가며 시장을 누비는 ‘현장사목’이었다. 신도가 교회에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교회가 직접 신도들을 만나기 위해 나서는 3년간의 현장활동은 더할 수 없이 귀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활동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예상하지 못한 답을 했다. “‘천주교’의 이름을 걸고 군대와 맞서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게 가장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는 것.

“군종 교구에서 시무하시는 신부님들이 가장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군대의 사기문제도 있는데 지나치면 안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분들도 내심으로는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소속이 있으니까요. 당장 저희가 유족들과 함께 현장에 나가 조사활동을 벌이면, 부대 내 분위기가 싸늘해져 사목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겁니다. 그분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운함을 누를 수는 없더군요.”

이신부가 말하는 또 다른 문제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위상과 관련된 부분이다. 인권위원회는 천주교의 공식기구가 아니다. 오히려 ‘천주교 신도들로 이루어진 인권NGO’에 가깝다는 것이 대책위의 설명. 대책위는 사용중인 사무실 공간을 제외하고는 서울대교구나 주교회의로부터 별도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는다.

“교회 연락처 수첩에는 아직도 정의구현사제단의 전화번호가 없습니다. 공식기구가 아닌 임의단체라는 거죠. 갑갑한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임의단체’들의 활동 덕분에 천주교가 얻은 소득이 얼마입니까. 약자를 위해 힘쓰는 교회, 사회를 위해 나서는 종교라는 천주교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그들의 덕분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더 적극적인 자세로 이들을 감싸 안지 못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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