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3김퀴즈’로 인기 상종가 개그맨 최양락

“대한민국요? 정말 ‘재미있는 지옥 ’이에요”

  • 김범석 <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 > vitamain365@yahoo.co.kr

    입력2004-09-07 15: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00년 말부터 작년까지 최양락은 가장 바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알까기’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그는 ‘알까기’가 인기를 얻은 비결로 단순함을 들었다. 휴대전화나 리모컨 등에 복잡한 기능이 있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 고작 몇 가지에 불과하다는 데에 착안했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의 단순 회귀심리를 응용한 것이다.
    최양락을 만난 날은 한국이 월드컵에서 감격의 첫승을 거둔 다음날이었다. 그는 약속 장소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전날 벌어졌던 한국 대 폴란드 경기를 다시 보고 있었다. 전반전 26분 황선홍이 첫 골을 터뜨리자 그는 어제의 감격이 되살아난 듯 소리 높여 환호했다. 자연스레 인터뷰는 월드컵을 화제로 시작됐다.

    “제가 만으로 41세인데 한국 대표팀이 요즘처럼 축구 잘하는 건 처음 봐요. 월드컵 개막하기 전 평가전도 열심히 봤는데 일취월장이 따로 없더라고요. 전에는 한국 축구하면 정신력, 투지였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축구를 즐기는 게 보여요.”

    신문 정치면 보고 유행어 찾는다

    그는 특히 이번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황선홍 선수의 마음이 얼마나 가볍겠냐며 마치 자기 일처럼 흐뭇해 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응원하는 대상이 달라졌다며 격세지감이 든다고 했다. 예전에는 패기 만만한 신예들을 주로 응원했는데 요즘은 노장이나 선배들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예를 들면 바둑에서 이세돌과 조훈현 기사가 격돌하면 예전에는 반드시 이세돌을 응원했지만 지금은 조훈현 기사 편이란다. LG 투수 김용수를 좋아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20세 이상 차이 나는 후배들을 향해 힘차게 공을 던지는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단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인 편입니다. YS도 이제 나설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그런 거 보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는 은퇴를 깔끔하게 잘하는 것 같습니다. 대중으로부터 별 반응이 없으면 물러나야 하는 건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최양락은 요즘 하루 대부분을 여의도에서 보내고 있다. 이른바 섬 생활(?)을 하고 있는 것. 매일 아침 8시40분부터 9시까지 SBS 러브FM ‘최양락의 개그세상’과 오후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MBC 라디오 ‘최양락의 재밌는 세상’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방송까지 10시간이 넘게 비지만 그는 대부분의 약속을 여의도에서 잡으며 모처럼 여유를 맛보고 있다. 점심, 저녁식사는 거의 담당 PD들과 함께 먹는다. 낮 시간 약속 없는 날은 단골 사우나에 들러 오수를 즐기기도 한다고.

    그가 오전에 진행하는 SBS 러브FM ‘최양락의 개그세상’은 그날그날 핫이슈를 촌철살인의 풍자로 풀어내, 작년에 큰 인기를 모았던 ‘알까기’ 이후 다시 한번 화제가 되고 있다.

    “처음에는 정치 풍자라는 컨셉트 때문에 꽤 망설였어요. 그런 분야는 당연히 시사평론가 몫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프로그램 기획의도가 일반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라고 하길래 용기를 냈습니다. 4월15일부터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 다행이에요.”

    라디오 특성상 6개월은 지나야 정확한 평가가 나오지만 내부에선 진행자 기용이 탁월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오후에 방송하는 ‘최양락의 재밌는 세상’도 전직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이용한 ‘3김 퀴즈’가 인기를 얻고 있다.

    “글쎄요, 정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관심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신문 정치면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정말 재미있거든요. 날마다 유행어가 터져나오잖아요. 지루할 틈을 안 줘요. 아침 프로의 경우 보통 하루에 두 아이템 정도를 소화하는데 뉴스 거리가 넘쳐서 고민이에요. 흔히 호주나 캐나다를 ‘재미없는 천국’이라 부르고 대한민국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하잖아요. 정말 딱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하지만 한국 정치가 축구보다 발전 속도가 더딘 것 같아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라디오에 흠뻑 빠져 있는 지금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1981년 MBC 라디오 주최 제1회 개그맨 경연대회에서 입선하며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그간 TV에서 활동하느라 라디오에 소홀했는데 이제 그 빚을 갚는 기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하는 요즘, 생소함과 신기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하는 말이 곧장 전라도로, 제주도로 간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 없어요. 어찌나 신기한지 마술을 부리는 것 같다니까요.”

    사실 최양락의 정치 풍자 도전기는 노태우 대통령 집권 당시인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BS 인기 유머 프로였던 ‘쇼 비디오 자키’의 ‘네로 25시’라는 코너에서 무려 3년간 활약한 것이다. 당시 ‘대통령인 나를 코미디 소재로 삼아도 된다’는 노대통령의 공개 발언이 있자마자 기획 제작된 코너였다.

    “귀를 의심케 한 말이었어요. 우리가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잖아요. 뜻이 있던 동료 개그맨 전유성, 엄용수, 정명재, 김학래 등과 의기 투합해서 프로를 만들었죠.”

    당시 연출을 맡았던 윤인섭 PD의 적극적인 지원도 이들에게 힘이 됐다. 원래 ‘네로 25시’는 ‘원작을 바꿉니다’라는 코너의 변형판이었다. 매주 원작을 코믹하게 뒤틀어 바꾸는 프로였는데 쿼바디스를 소재로 ‘원작을 바꿉니다’를 했다가 ‘이거다’ 싶어서 시작한 게 바로 ‘네로 25시’였다. 요즘 6개월만 명맥을 이어가도 장수 프로라고 부르는데 당시 ‘네로 25시’는 무려 3년이나 회를 거듭한 장수 인기 프로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 노대통령의 중간평가를 다룬 적이 있었어요. ‘한다, 안한다’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방송에서 부하들에게 ‘중간평가 한다고 해’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었어요. 다음날 청와대에서 ‘자제해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노대통령의 중간평가는 흐지부지 넘어갔죠.”

    그 외에도 각종 민감한 루머를 소재로 방송할 때마다 자체 편집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이유 모를 통쾌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대통령도 수능시험으로 뽑자

    최양락은 요즘이야 코미디 소재와 금기가 거의 없어졌다지만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만 해도 암울했다고 털어놓았다. 대본에 ‘우리 아버지 실업자 됐다’는 표현도 담당 국장들이 달려와 빨간 사인펜으로 삭제 처리했다고 한다.

    “벌써 햇수로 21년째 코미디를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까지는 코미디도 자유롭지 못했어요. 어느 정도냐 하면 심지어 ‘저런 거지 같은 놈’이라는 대사조차 말하지 못했어요. 국장이 ‘요즘 거지가 어디 있느냐’며 삭제 지시를 내렸죠. 명백한 사전 검열이었죠. 당시 우리들끼리는 북한 코미디 한다고 자조했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외모와 흡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박아무개 탤런트가 방송 활동을 정지당했을 정도다. 백담사 시절 이순자 여사가 모 여성 잡지를 보다가 박아무개 탤런트를 보고 남편인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당신하고 닮긴 많이 닮았다’며. 미안한 마음에 전대통령은 나중에 그를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식사를 같이했다고 전해진다.

    “요즘에는 정치보다 종교가 더 민감해요. 직업도 듣도 보도 못한 협회, 이익단체가 어찌나 많은지 몰라요.”

    최양락은 ‘네로 25시’ 이후 SBS ‘코미디 모의국회’에서 여당대표로 나온 이봉원에 맞서는 야당대표로 출연, 정치 풍자를 계속했다. 그는 이 같은 일련의 행보에 대해 정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안 해봤던 영역에 대한 도전의식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제가 정치 풍자 프로에만 출연한 건 아니거든요. ‘고독한 사냥꾼’에선 제비족도 연기했고 시골 배추장수로도 나왔죠. 정치 풍자도 다양한 배역을 해보고 싶은 제 욕심의 일환이었을 뿐이에요.”

    그는 한국 정치에 가장 실망할 때가 바로 총선이나 대선 개표할 때라고 말한다. 한반도에서 영남과 호남이 뚜렷한 지역 색으로 엇갈릴 때마다 환멸을 느낀다는 것. 그는 “어떻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좋아서 찍는 게 아니라 저 후보가 무작정 싫어서 투표하는 경우가 많아요. 시민단체에서 주도하는 낙선 캠페인도 수도권에서만 통하는 것 같더라고요. 올해 대선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1∼2년 지나면 좀 나아질까요?”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웃지 못할 제안을 했다. 대통령 선거를 자격시험 식으로 치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문제 출제와 채점은 시민 몫으로 하는 일종의 대통령 수학능력시험인 셈이다. 예를 들어 ‘친인척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주관식 문항으로 만들고 각 후보자들이 답안을 작성하는 식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정말 하루빨리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혁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20대들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돼요. 사표가 많이 생기면 당선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당선될 수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20대들이 적극적으로 투표해야 돼요.”

    지금 지지하는 특정 후보를 밝힐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한때 DJ의 열렬한 선거 운동원이었다. 당시 정광태, 엄용수, 이봉원 등이 그와 뜻을 같이해 DJ 캠프에 발을 담갔다.

    “그때는 오로지 정권교체에 대한 희망과 소신 때문이었어요. 민주화를 위해서 뭔가 일조해야겠다는 생각에 그 분을 도왔죠. 상대편 연예인 운동원들은 보수도 제대로 받았지만 저흰 도시락 먹으면서도 10원 한 장 안 받았어요. 만일 낙선했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이 있었을지 모르죠.”

    최양락과 DJ의 인연은 대선 1년 전 DJ가 국민회의 총재로 있었을 당시로 올라간다. 이봉원 부부와 함께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처음 만나 식사한 게 인연이 됐다. DJ의 사람 됨됨이에 비해 잘못 평가된 부분이 있었다고 확신한 그는 DJ를 만날수록 인간적인 매력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밤 새워 그의 저서를 읽으며 왜곡 평가된 부분에 대해 분개했던 것도 그 당시다.

    그는 방송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균형감각이라고 꼽았다. 자칫 한쪽으로 치우치면 풍자의 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후보의 ‘깽판’ 발언과 이회창 후보의 ‘빠순이’ 발언을 동시에 문제 삼는 식으로 방송 아이템을 선정한다. 두 후보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꼈다. 최근 문성근이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에서 도중하차한 것을 의식한 행동이다. 최양락은 대통령 후보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청렴을 들었다.

    그는 1998년 말 가족과 함께 훌쩍 호주로 떠났다. 슬럼프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그는 당시 한 방송사로부터 이해 못할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SBS 일요 프로 ‘좋은 친구들’을 5년 동안 진행했는데 어느 날 젊은 MC로 바꾼다는 거예요. 제가 하고 있을 때도 시청률 하락은 없었거든요. 그냥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는 말에 정이 확 떨어지더라고요.”

    당시 그는 KBS에서도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던 터라 아내 팽현숙씨는 꾹 참고 KBS에만 매진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최양락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이삿짐을 쌌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마침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구와 충전에 대한 필요성도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적도를 넘어설 무렵 불현듯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언제 돌아올지 아무런 기약 없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섭외가 안 들어오면 어떡하나, 이러다 그냥 밀려나 은퇴하는 건 아닌지, 마음이 복잡했죠.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어요.”

    네 식구가 호주 유학길에 오르자 세간의 오해도 받았다. 세무 당국에선 탈세 조사까지 벌였다. 그는 그런 오해를 받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결혼생활 11년째였는데 아내가 열심히 부업을 했고 그 돈이 유학 자금이었다고 설명했다.

    호주 생활은 힘들고 외로웠다. 3개월 어학 코스에 들어간 최양락은 영어 교사의 호된 질책에 엉엉 울며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대한민국에선 스타였는데’라는 자존심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얼굴색도 다르고 출신도 다른 새파란 이국 학생들 앞에서 마구잡이로 창피를 당할 때는 참담한 좌절감까지 맛봐야 했다. 아내도 그런 남편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함께 울었다. 결국 1년여 만에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장안의 화제가 된 ‘알까기’로 멋지게 재기했다.

    ‘알까기’로 제2 전성기 맞아

    2000년 말부터 작년까지 그는 인생 에서 가장 바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주일의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김미화의 ‘순악질 여사’ 이창훈의 ‘맹구’ 등 개그맨이 한평생 한 가지 인기 아이템으로 어필하기도 어려운데 최양락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그는 ‘알까기’의 인기 비결로 단순함을 들었다. 휴대전화나 리모컨 등에 복잡한 기능이 있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 고작 몇 가지에 불과하다는 데에 착안했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의 단순 회귀 심리를 응용한 것이다.

    “‘알까기’의 인기를 어느 정도 예감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파일럿(대중의 반응을 알아보는 일종의 시험 방송) 녹화하는데 카메라맨부터 뒤집어지는 거예요. 보통 어지간한 개그 아니면 그 양반들은 단련이 돼서 잘 안 웃거든요. 속으로 ‘이건 무조건 대박’이라고 확신했죠.”

    ‘알까기’는 소설가 이외수까지 출연, 장안의 신드롬을 형성했다. 이외수를 섭외하기 위해 그와 친분이 있는 전유성을 동원해 춘천까지 삼고초려하는 애를 썼다. 결국 더 이상의 출연진 섭외가 어려워지자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최양락은 ‘알까기’로 다시 한번 전국구 스타가 됐다.

    덕분에 그는 아마 7급 수준으로 국내 최초 바둑프로 MC를 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케이블 채널인 ‘바둑TV’ 에서 ‘최양락의 바둑 첫걸음’ 사회를 본 것. 그가 성대모사한 윤기현 국수는 그에게 ‘바둑 보급에 앞장서 주어서 고맙다’는 뜻을 알려오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장래희망이 개그맨이었다는 최양락은 만약 개그맨이 되지 않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고향 온양에서 스탠드바 삼류 MC가 돼있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개그 철학은 ‘최소 하루 한 시간은 연구하자’다. 출연료를 받는 프로페셔널 개그맨이라면 적어도 대중에게 끌려다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간혹 인터넷에서 개그 소재를 빌려오는 후배들이 있는데 최양락에게 발각되면 눈물 쏙 빠지게 질책을 듣는다. 그는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독서는 물론 영화 관람, 여행 등 닥치는 대로 체험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게 없다지만 그는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전유성 선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데뷔 당시 전유성 선배가 달걀로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나 되냐고 묻더라고요. 깨뜨리고 삶아먹고 프라이해 먹고 팩도 하고 네댓 가지 된다고 했더니 한심하게 쳐다보더라고요. 선배는 수천 가지라는 거예요. 달걀을 소나무에 던질 수도 있고, 연못에 빠뜨릴 수도 있고, 미운 사람 얼굴에 맞출 수도 있고, 손에 들고 327번 버스를 탈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때 번쩍 하는 뭔가를 느꼈어요.”

    그는 누군가와의 대결 구도에서 많은 영감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박찬호가 투 스트라이크 상태에서 갑자기 은퇴를 선언한다든가, 권투 선수가 경기 도중 나란히 포옹을 한다든가, 상식 밖의 말과 행동에서 개그 힌트를 주로 얻는다. 사실 호주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준비해왔지만 상황에 안 맞아 대부분 버렸다. 그만큼 웃음은 상황, 타이밍이 어느 요소보다 중요하다.

    요즘 개그맨보다 웃기는 탤런트와 일반인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의 처지에선 유쾌하지 않다. 작년 한 프로에서 만났던 ‘나도 몰라’ 아저씨의 경우도 그랬다. 한 휴대전화 CF 출연으로 일약 스타가 된 과일장수 아저씨는 그에게 개그맨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줬다.

    “대사, 박자 모두 안 맞는데 관객들은 그 아저씨가 한 마디하면 준비했다가 그냥 웃더라고요. 솔직히 허탈했어요. 우리 같은 개그맨들은 이제 직업적으로 상당히 불리해지는 거예요. 웃겨야 본전이니까.”

    그는 장발을 고수하는 몇 안되는 연예인 중 한 명이다. 그냥 편해서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할까? 특별히 땀 흘리는 운동 하나 못하고 있다. 골프를 즐길 법도 하지만 골프 반대론자다. “도대체 흥미가 안 생겨요. 공이 들로 산으로 도망가 버리거든요. 잘 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내기 골프를 즐기는데 저는 내기 반대주의자예요. 고스톱도 못쳐요.”

    그는 축구도 하는 것보다는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전 개그맨 후배들이 축구 유니폼을 단체로 맞춰서 가져왔는데 그의 등 번호는 11번. 순간 어깨가 으쓱했지만 그날 경기에서 전후반 90분 동안 공 한번 차지 못하고 경기를 끝내야 했다고 실토했다.

    주량은 소주 2병 정도. 요즘 함께 프로그램 하는 PD, 작가들이 술동무다. 후배 개그우먼에서 아내가 된 팽현숙씨는 남편에게 없는 사업 능력이 있어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남편 수입 관리부터 양수리에 문을 연 카페 ‘꽃피는 산골’ 관리까지.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연극을 하고 싶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제가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데 교수님한테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저 보시면서 그럴 거 아니에요. ‘저 놈은 연극 가르쳐놓았더니 웃기기만 하네’라고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연극에 출연할 생각이에요. 요즘 구체적인 말이 오가는데 빠르면 가을쯤 실현될 것 같아요.”

    그는 정치 풍자 연극이 될 것 같다고 귀띔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