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내 힘 버려야 남의 힘 뺏을 수 있다”

‘3차원 투구’로 성공신화 일군 ‘야구 9단’

  • 이영만 < 경향신문 부국장 > youngman@kyunghyang.com

    입력2004-09-07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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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노장. 송진우를 보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이다. 그는 투수에게 고희나 다름없는 나이에 한국프로야구 최다승 기록을 깨고 150승 벽까지 돌파했다. 선수협 사태가 터졌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총대를 멨으며, FA 자격을 얻었을 때는 타 구단의 엄청난 물량공세를 외면하고 친정팀을 선택했다. 송진우의 성공신화는 가히 한국프로야구의 귀감이 될 만하다.
    송진우는 ‘위대한 투수’가 아니다. 최동원 김시진 선동열 정민태처럼 일세를 풍미하지도 않았다. 박동희 박찬호 이상훈 같은 뛰어난 강속구 투수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특급투수라면 한번쯤 기록한 ‘한 시즌 20승’도 해본 적이 없다.

    ‘보통투수’ 송진우. 그러나 그는 모든 위대한 투수들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20대와 30대에 두 번이나 전성기를 누리며 150승 고지를 돌파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승이며 송진우만이 해낼 수 있는 값진 기록이다. 나이로 볼 때 계속적인 기록경신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다. 그는 세월을 거꾸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투수들보다 더 뛰어난 보통투수 송진우. 우리 나이로 38세인 그가 올 시즌에도 6연승 행진을 하는 등 다승부문 선두를 달리고 있다. 송진우의 시들지 않는 청춘. 그 속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그는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면 주저없이 한다. 1990년 초 빙그레 시절. 김영덕 감독이 요구하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올랐다. 혹사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요한 시점이면 망설이지 않았고 김감독의 마운드 운용을 이해했다. 그를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이 꾀를 피우라고 권해도 듣지 않았다. 이틀이 멀다하고 던질 때도 있었다. 씩씩하게 던지고 또 던졌다. 그래서 주위에선 그의 투수생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야구장 밖에서도 마찬가지. 3년여 전 선수협 파동이 벌어졌다. 그는 모임을 주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 회장이 되었다. 원한 것도 아니고 좋은 상황도 아니었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상황에 자신을 맞추었고 골리앗에 맞서 싸웠으며 전력을 다했다.

    송진우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그의 지능지수(IQ)는 140대에 이른다. 어려운 상황을 피할 줄 알고 요령이 뭔지도 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필요한 곳에서 부르면 응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한창때의 그를 김영덕 감독은 부지런히 마운드에 올렸다. 그것은 김감독의 마운드운용 특징 중의 하나로 그는 누구보다 송진우를 신뢰했다. 송진우 역시 김감독의 그런 마음을 알았고 김감독을 통해 투수라는 것이 무엇인 줄 알았기 때문에 군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팀 사정상 자신이 나서야 한다면 주저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다소 일찍 슬럼프에 빠졌고 주위에선 “그럴 줄 알았다”며 송진우의 미련함을 통박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나이 먹은 투수의 공 던지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고 지금까지 싱싱하게 공을 뿌리고 있다.

    선수협 때도 그는 걸려들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동료 선수들이 왜 자신에게 회장직을 권하는지도 알았다. 송진우는 고참급 선수고 나이 먹은 선수 가운데서는 성적이 좋기 때문에 함부로 토사구팽의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는 선수였다. 게다가 후배들은 송진우가 결코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그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래도 송진우가 나약했다면 누구도 그를 추대하지 않았을 터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는 강단을 갖추었고 선수협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갈 머리와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 점잖은 송진우가 복잡한 시절의 선수협을 맡았기 때문에 사태가 마구잡이로 흐르지 않을 수 있었다.

    자기 관리 뛰어난 모범생

    송진우는 1966년 2월생이다. 만 36년 4개월이다. 그러나 그것은 호적상 나이다. 실제 생년월일은 1965년 2월16일.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호적을 고쳤다. 전국체전에 출전시켜야 하는데 생일이 한 달 가량 빨라 출전할 수 없게 되자 손을 본 것인데, 2월생을 3월생으로 하는 것보다 1965년을 1966년으로 고치는 게 편하다고 해서 한 살을 낮추었다.

    그래서 실제 송진우의 한국 나이는 38세. 도저히 완투를 밥먹듯 할 수 있는 ‘연세’가 아니다. 그 나이의 다른 투수들이 모두 은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송진우는 올 시즌에도 벌써 5차례나 완투승을 거두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힘이 난다”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송진우는 쉽게 지치지 않는 체질이고 피로도 다른 선수들보다 쉽게 풀리는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몸의 유연성이 뛰어나다는 점도 철인의 조건이다. 큰 부상 없이 프로야구 14년을 꾸려온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타고난 유연성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그의 투구폼이 좀 이상하다고들 하지만 버드나무처럼 휘는 유연성을 감안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타고난 신체적 특징만이 오늘의 송진우를 있게 한 것은 아니다. 재산인 몸을 황금처럼 귀히 여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송진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입에 대본 적이 없다. 술도 한두 잔 정도로 끝낸다. 몸에 나쁜 것은 철저히 배제하는 모범생이다. 그에게 훈련은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본능적 행위’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운동을 거른 적이 없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철인의 비결인데 선수협 파동을 겪었던 2000시즌에도 그는 13승을 올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런 송진우가 야구 9단이 된 데는 무엇보다 힘을 뺄 줄 알게 된 것이 결정적 요인이다. 다승왕과 구원왕을 차지한 1992년을 기점으로 송진우는 조금씩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방위근무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1992년과 같은 성적을 더 이상 올리지 못했고, 30세를 넘긴 1997년엔 B급 투수로 전락했다.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얻어터지는 것이 일상사였다. 스피드가 떨어지고 공 끝에서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송진우는 타자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위력 없는 투수의 마구잡이 힘은 무용지물이었다. 타자들은 그를 배팅볼 투수처럼 여겼고 방어율은 5점 대에 이르렀다.

    별다른 부상도 없이 2년 연속 6승. 송진우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쏟아졌고 은퇴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위기의 그 순간에 송진우는 비법을 터득했다. 젊었을 때는 힘이지만, 나이를 먹으면 요령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는 더 이상 힘으로 타자들을 몰아가지 않았다. 변화구와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유혹했다. 2차원을 뛰어넘은 송진우의 3차원 투구. 타자들은 속절없이 떨어져나갔고 그는 젊었을 때도 이루지 못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엮어냈다.

    스물일곱 살 물오른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싱한 공. 타자들은 그의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김영덕 감독은 승리를 부르는 송진우를 다목적으로 사용했다. 선발로 내보내는 사이사이에 구원투수로 활용했다. 마무리뿐만 아니라 경기중 조금만 상황이 좋지 않아도 송진우를 내보냈다.

    오늘은 선발, 내일은 마무리, 모레는 중간계투 그리고 다음날은 다시 선발.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당시는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무엇보다 송진우 자신이 그런 혹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팀이 원하고 감독이 지시하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오르겠다고 했다. 어제 뛰고 오늘 또 나가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팀의 페넌트레이스 1위를 위한 송진우의 강행군이었다. 레이스가 끝났을 때 그가 출전한 게임은 팀 전체경기의 38%인 48게임이었다. 선발투수가 4∼5명에 이르고, 불펜투수가 또 4∼5명에 달하며 구원투수까지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무리였다. 그래도 그 덕에 송진우는 19승17세이브(8패)를 기록하며 다승왕과 구원왕(25세이브포인트)을 동시에 차지했다.

    다승왕이 구원왕인 상황. 전문화와 분업화가 철저한 프로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송진우가 경기 중간에 뛰어나가 8번의 구원승을 올렸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송진우의 이 투수 2관왕은 대단한 기록으로 치부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았고 기록을 위해 승리를 조작했다는 비난만 쏟아졌다.

    문제는 마지막 경기였다. 송진우는 해태 이강철과 다승 선두를 다투고 있었다. 1승 차이여서 다승 단독 1위를 차지하거나 공동 1위가 될 수 있었다. 레이스 내내 선두를 달렸던 빙그레는 80승 고지에 올라 더 이상 승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투수 로테이션상 등 여러모로 송진우가 나갈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김영덕 감독은 초반 대량득점으로 승리가 확실해지자 4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던지고 있던 선발 한희민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마운드에 송진우를 올렸다. 송진우는 어렵잖게 구원승을 올렸고 1승과 1세이브포인트를 추가하며 다승왕과 구원왕을 차지했다.

    “1년 내내 고생한 팀의 에이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마침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송진우를 내세웠다.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당신들도 송진우 선수가 1년간 얼마나 열심히 던졌는가를 알고 있지 않은가.”

    김영덕 감독의 말은 사실 틀린 것이 아니다. 애쓴 에이스 투수를 위해 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다. 다른 선수의 승리까지 뺏어가면서 ‘이상한 2관왕’을 만든 것은 정서상 옳지 않고 그렇게 만들어진 다승·구원왕 송진우는 페넌트레이스 MVP후보에서도 빼야 한다고들 했다.

    규정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어서 송진우는 MVP후보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수상은 그른 일이었다. 더욱 좋지 않았던 것은 한국시리즈였다. 81승으로 시즌 단연 1위였던 빙그레는 시즌 마지막 경기의 어수선함 속에 롯데와 한국시리즈를 시작했다. 롯데는 시즌 3위로 해태를 꺾고 올라온 약체. 하지만 빙그레는 송진우의 부진 속에 롯데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페넌트레이스 투수 2관왕이면서도 한국시리즈에서 큰 빛을 발하지 못한 송진우는 쏟아지는 비난에 한동안 심하게 마음고생을 했다. 투수로서 ‘첫번째 눈’을 뜨게 해준 김영덕 감독이 결국 팀을 떠났고, 송진우도 한통속인 것처럼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진우는 역시 피해자였다. 팀의 에이스로서 그는 감독이 등판을 지시하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했다고 등을 돌리면 요령을 피우는 선수로 몰리거나 항명이 된다. 김감독이 상황에 따라 등판시키면, 송진우는 나서야 하고, 다소 몸에 무리가 오더라도 나가면 반드시 이기거나 위기를 막아야 한다. 송진우는 그렇게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한 것뿐이니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19승17세이브가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세이브엔 전혀 문제가 없고 8구원승도 대부분 위기를 구하거나 동점상황에서 등판, 승리를 이끈 것이다. 단 한번이 문제가 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실력이었다.

    “저를 많은 사람들이 마치 타이틀에 눈먼 선수로 보았습니다. 저는 타이틀을 탐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전 감독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논란은 있어도 기록은 남는 법. 그러나 지금도 좋게 인용되는 법이 없어 억울한 송진우다. 1992년 송진우의 다승, 구원 2관왕. 그것은 앞뒤 재지 않고 젊음을 불사른 송진우의 실력 덕분이다.

    1989년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한 후 약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그는 늘 앞자리에 있었다. 처음 4년간 성적이 50승64세이브. 프로야구 관례대로 2세이브를 1승으로 치면 4년간 82승을 한 셈이다. 계산상으론 연간 20승 이상을 한 것이다.

    좌완투수라는 이점과 시속 140㎞ 이상의 빠른 공.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도 충분했다. 타자들을 압도했고, 운도 좋은 편이었다. 4년간의 혹사로 어깨에 무리가 올 즈음인 1995년 그는 입대했다.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주로 홈경기에만 등판했다. 그전 4년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72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며 호흡을 조절했다.

    1년 이상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한 송진우는 1995년 13승, 1996년 15승을 올렸다. 연봉도 1억원으로 뛰었다. 좌완투수 최초의 통산 100승 기록을 바라보며 희망의 1997년을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동계훈련을 열심히 했고 몸 컨디션도 좋았다.

    그러나 1997년은 엉망이었다. 도대체 승리를 올리지 못했다. 1승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고작 6승만 올리면 다다를 100승 고지를 9월의 마지막 등판에서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연봉삭감의 아픔을 맛보았다. 1억원에서 9000만원으로. 송진우는 입을 꽉 다물었다. 훈련 또 훈련. 절치부심의 98시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또 6승이었다.

    모두들 말했다. 젊었을 때 그렇게 죽자사자 뛰더니 일찌감치 마운드를 접게 되었다고. 더 창피당하지 말고 은퇴하라는 이도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힘껏 내던진 공도 타자 앞에 가면 고개를 숙이고 마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민 속의 날들. 그때 머리 좋은 송진우는 자신의 약점을 깨달았다. 어느새 30세를 훌쩍 넘긴 나이. 힘으로 타자와 승부할 일이 아님을 안 것이다. 이젠 노련미로 패기를 잠재워야 했는데 그는 힘도 없으면서 힘으로 싸우고 있었다. 이제 그의 무기는 스피드보다는 체인지업이고 힘보다는 컨트롤이다. 요령과 노련함으로 성급한 젊은 타자들을 농락해야 한다.

    이같은 결론을 내리고 마운드에 서자 타자들이 서두르는 것이 훤히 보였다. 슬슬 맞춰 잡았다.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변화구. 130㎞대 공이지만 꿈틀대며 들어가는 탓에 헛방망이질이 많았다. 힘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자신은 힘을 빼고 상대 타자들의 힘을 빼앗았다.

    송진우는 정신력과 머리의 ‘회춘투’로 15승을 올렸다. 그 승리 중에는 무려 8번의 완투승이 포함되어 있다. 예전처럼 이기고 있는 5회에 슬쩍 끼어 들어 올린 승리는 단 한 차례도 없었고 대신 완봉승이 2번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활약 덕분에 소속팀 한화는 뜻하지 않게 한국시리즈까지 올랐다. 송진우는 큰 경기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는데 두산과 싸운 플레이오프전에선 최우수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입신의 경기운영’을 보이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송진우는 1999년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할 수도 안할 수도 없었던 회장님. 야구가 아닌 다른 일에 매달리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까탈스럽지 않은 성격, 막말을 할 줄 모르는 스타일. 의리는 있지만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윗분들과의 투쟁’은 그의 업이 아니었다. 더욱이 자유계약선수(FA)로 한화와 3년간 7억원에 계약한 상태여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회장이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그가 맡겠다고 하지 않으면 출발도 못해보고 정지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다. 또한 그 자신이 칼자루를 쥔 구단들이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무식하게 일을 처리할 때가 많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송진우로선 고민스런 나날들이었다. 지금도 프로야구선수 생활 중 그때가 가장 어려웠던 때라고 말할 정도다. 시련의 시절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송진우가 아니었다면 선수협은 오늘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집행부의 후배들이 감정이 격화돼 막말을 할 때 항상 말렸고, 절대 상대의 아픔을 건드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 부드러운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원만한 리더십이 되었고, 그래서 선수협이 큰 탈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당시 선수협 사태를 취재하던 기자들도 송진우의 어른스러움을 바라보며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닌 듯하지만 회장은 정말 잘 뽑았다”고 평했다.

    투사가 아니면서 투쟁을 선도한 송진우. 그는 조용한 행동으로 선수협 대변인인 강병규의 튀는 행동과 균형을 맞추었고 실력 있는 고참선수로서 특유의 친화력과 포용력으로 선수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외유내강형의 리더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송진우는 한국야구위원회(KBO)나 구단측과 불필요한 대결을 피하면서도, 선수들의 권익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프로야구의 발전도 없다면서 선수협 사무실 임대료 1000만원을 선뜻 내놓기도 했다.

    “굉장히 힘들었어요. 사방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자칫 선수생활을 끝낼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송진우 선수는 아주 현명하게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몇몇 선수들이 구단관계자를 적대시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송진우 선수는 절대 그런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싸우는 입장에서도 어느 누구의 미움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합리적이고 정당했다는 이야기죠.”

    한화이글스 주재근 부장은 그 사건으로 더욱 송진우를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믿을 수 있는 선수. 송진우는 주부장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동계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음에도 송진우는 2000년 시즌 13승을 올렸다.

    “제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였습니다. 제가 못하면 선수협을 욕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신의와 보은

    지난 5월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송진우는 연례행사를 치렀다. 그는 틈이 나면 두 사람의 사부를 찾아뵙는다 김인식 감독과 김영덕 감독. 김인식 감독은 동국대 시절의 은사이고, 김영덕 감독은 빙그레 초년병 시절 사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야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마음을 담은 선물을 보낸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충청도 양반. 통산 최다승의 기록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송진우는 1승당 50만원의 성금을 낸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으로 시즌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승리성금 50만원은 최고액으로 한화구단은 송진우가 승리할 때마다 별도로 50만원을 내고 있다. 때문에 송진우가 승리하면 총 1백만원이 모이는 셈이다.

    충북 증평에서 태어나 세광중, 세광고를 다닌 송진우. 태어나서 살아온 곳을 좋아하는 그는 그래서 돈 때문에 고향을 등지지 않았다. 99시즌을 끝내고 FA자격을 획득하자 한 구단에서 3년에 12원억을 제시했다. 연평균 4억원. 탐나는 돈이었지만 송진우는 정든 한화구단과 3년 7억원에 계약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송진우는 돈보다 의리를 택했다.

    편안한 마음 때문인지 송진우는 다른 FA선수보다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내년 두번째 FA를 맞이하게 되지만 이변이 없는 한 그는 한화유니폼을 입을 것이다. 한화에서 시작해서 한화에서 끝내겠다는 그를 구단 역시 마지막까지 책임지겠다는 자세. 송진우는 아마 한화에서 감독까지 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아내 이야기를 자주 한다. 승리의 원동력이라는 설명이다. 아내 정해은씨도 송진우처럼 요란을 떨지 않는다. 그를 편안하게 해주는 어둠 속의 내조자일 뿐이다. 송진우가 힘들었던 시절 정씨는 어김없이 조언자가 되었다. 선수협 시절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었던 그녀는 늘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라주었다.

    “제가 흔들리지 않고 마운드에 설 수 있는 것도 집에서 잘해주기 때문입니다. 제 승리의 절반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망설임이 없지 않았던 선수협 시절에도 집사람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죠. 모두들 말렸지만 아내만은 용기를 북돋워주며 ‘군자금’을 주었거든요.”

    가정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정해은씨의 내조론. 외식보다는 가정식을 즐기는 남편을 위해 한밤중이라도 반드시 ‘신토불이 음식상’을 차린다. 송진우의 입맛이 한국식인 탓인데 인스턴트 식품이나 기름기 많은 음식은 내놓지 않는다. 보면 편안한 사람, 말을 하면 즐거운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아내 정해은씨라는 게 송진우의 자랑이다. 아마도 송진우의 노익장 비결은 아주 평범한 수신제가(修身齊家)인 듯하다.

    송진우는 2002년 시즌을 앞두고 삭발했다. 빙그레 시절 그런 적이 한번 있었지만, 그땐 김영덕 감독을 비롯한 선수들과 모두 함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의를 다지며 스스로 삭발한 것은 충북 증평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통산 144승으로 시작한 삭발 시즌. 의미가 남달랐다. 선동열의 통산 최다승 146승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선동열처럼 폭발적이진 않았지만 꾸준히 뛴 덕분이었다. 두 차례의 위기를 넘기며 맞이하는 38세의 시즌. 새로운 기록은 예정된 이정표였다.

    출발은 최상으로 완봉승이었다. 개막전 완봉승은 흔치 않은 일이다. 프로야구 21년사에 겨우 7번밖에 없다. 1993년 삼성 김상엽에 이어 9년 만의 기록으로 만 37세의 노장투수가 올렸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기분좋게 시즌을 시작한 송진우는 4월23일 시즌 3승째를 거두며 선동열의 개인통산 최다승을 뛰어넘었다. 1989년 4월12일 대전에서 열린 롯데와의 데뷔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이후 13년11일 만이다. 경기수를 감안하면 선동열보다 못하지만 송진우의 나이를 감안하면 최다승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26일 후인 5월19일 삼성전. 송진우는 새로운 기념비를 세웠다. 7이닝 1안타의 승리로 150승 고지를 정복했다. 150승. 송진우의 땀과 노력의 결정체다. 세월이 지나면 그저 올릴 수 있는 고지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한 해 10승을 하는 투수라면 15년이 걸리지만, 운동선수 15년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부상이 없어야 하며 체력이 뒤따라주어야 한다. 10년 이상 투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야구선수 38세는 일반인의 고희(古稀)와 마찬가지. 예부터 흔치 않았다는 이야기다. 프로야구 21년 동안 송진우처럼 꾸준하게 성적을 올린 투수는 LG의 김용수 정도다. 송진우가 다른 선수들보다 더욱 대단한 것은 나이가 들면서 더 잘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20대 중후반보다는 못하지만 적어도 30대 초반보다는 뛰어나다.

    마운드에 서는 게 행복

    남다른 투혼과 철저한 자기관리, 차원 높은 실력이 없다면 이런 성과는 불가능하다. 흔히 송진우의 타고난 신체조건을 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관리 덕분이라고 본다. 좋은 몸을 가지고도 형편없는 성적을 올리는 선수가 의외로 많은 현실에서 그는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36세 때인 2000년에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37세 때인 2001년에는 등판 2000이닝을 돌파하기도 했다.

    150승을 거둔 날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던 송진우. 현장의 기자들이 여러가지를 물었지만 그는 특별한 욕심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뛰지만 세워놓은 목표 때문에 욕심의 덫에 걸려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가히 ‘입신의 경지’인데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최고령 다승왕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목표승수를 세우진 않았지만 게임마다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승리도 따라오고, 그것이 모이면 다승 1위도 바라볼 수 있다. 6월 들어 한 차례 실투를 했지만 최다승 신기록을 세운 4월23일 청주 SK전부터 5월말까지 6연승 행진을 벌였다.

    “초반에 잘 나가다가도 한번씩 걸리는 게 야구입니다. 하지만 서클체인지업의 속도가 빨라지고 제구력도 좋아져 타자를 끌고다니면서 경기를 하고 있으므로 15승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러나 몇 승을 하느냐보다는 이 나이에도 마운드에 설 수 있고, 좋은 컨디션에서 타자들과 승부할 수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지난해보다 구위가 더 좋아진 송진우. 세월의 흐름을 되돌린 그의 ‘노장투혼’은 결코 물을 거스를 만큼 강하지 않다. 자연의 섭리인 듯 유연하고 부드럽다. 강한 바위를 밀어내는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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