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살 물오른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싱한 공. 타자들은 그의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김영덕 감독은 승리를 부르는 송진우를 다목적으로 사용했다. 선발로 내보내는 사이사이에 구원투수로 활용했다. 마무리뿐만 아니라 경기중 조금만 상황이 좋지 않아도 송진우를 내보냈다.
오늘은 선발, 내일은 마무리, 모레는 중간계투 그리고 다음날은 다시 선발.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당시는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무엇보다 송진우 자신이 그런 혹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팀이 원하고 감독이 지시하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오르겠다고 했다. 어제 뛰고 오늘 또 나가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팀의 페넌트레이스 1위를 위한 송진우의 강행군이었다. 레이스가 끝났을 때 그가 출전한 게임은 팀 전체경기의 38%인 48게임이었다. 선발투수가 4∼5명에 이르고, 불펜투수가 또 4∼5명에 달하며 구원투수까지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무리였다. 그래도 그 덕에 송진우는 19승17세이브(8패)를 기록하며 다승왕과 구원왕(25세이브포인트)을 동시에 차지했다.
다승왕이 구원왕인 상황. 전문화와 분업화가 철저한 프로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송진우가 경기 중간에 뛰어나가 8번의 구원승을 올렸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송진우의 이 투수 2관왕은 대단한 기록으로 치부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았고 기록을 위해 승리를 조작했다는 비난만 쏟아졌다.
문제는 마지막 경기였다. 송진우는 해태 이강철과 다승 선두를 다투고 있었다. 1승 차이여서 다승 단독 1위를 차지하거나 공동 1위가 될 수 있었다. 레이스 내내 선두를 달렸던 빙그레는 80승 고지에 올라 더 이상 승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투수 로테이션상 등 여러모로 송진우가 나갈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김영덕 감독은 초반 대량득점으로 승리가 확실해지자 4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던지고 있던 선발 한희민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마운드에 송진우를 올렸다. 송진우는 어렵잖게 구원승을 올렸고 1승과 1세이브포인트를 추가하며 다승왕과 구원왕을 차지했다.
“1년 내내 고생한 팀의 에이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마침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송진우를 내세웠다.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당신들도 송진우 선수가 1년간 얼마나 열심히 던졌는가를 알고 있지 않은가.”
김영덕 감독의 말은 사실 틀린 것이 아니다. 애쓴 에이스 투수를 위해 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다. 다른 선수의 승리까지 뺏어가면서 ‘이상한 2관왕’을 만든 것은 정서상 옳지 않고 그렇게 만들어진 다승·구원왕 송진우는 페넌트레이스 MVP후보에서도 빼야 한다고들 했다.
규정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어서 송진우는 MVP후보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수상은 그른 일이었다. 더욱 좋지 않았던 것은 한국시리즈였다. 81승으로 시즌 단연 1위였던 빙그레는 시즌 마지막 경기의 어수선함 속에 롯데와 한국시리즈를 시작했다. 롯데는 시즌 3위로 해태를 꺾고 올라온 약체. 하지만 빙그레는 송진우의 부진 속에 롯데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페넌트레이스 투수 2관왕이면서도 한국시리즈에서 큰 빛을 발하지 못한 송진우는 쏟아지는 비난에 한동안 심하게 마음고생을 했다. 투수로서 ‘첫번째 눈’을 뜨게 해준 김영덕 감독이 결국 팀을 떠났고, 송진우도 한통속인 것처럼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진우는 역시 피해자였다. 팀의 에이스로서 그는 감독이 등판을 지시하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했다고 등을 돌리면 요령을 피우는 선수로 몰리거나 항명이 된다. 김감독이 상황에 따라 등판시키면, 송진우는 나서야 하고, 다소 몸에 무리가 오더라도 나가면 반드시 이기거나 위기를 막아야 한다. 송진우는 그렇게 감독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한 것뿐이니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19승17세이브가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세이브엔 전혀 문제가 없고 8구원승도 대부분 위기를 구하거나 동점상황에서 등판, 승리를 이끈 것이다. 단 한번이 문제가 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실력이었다.
“저를 많은 사람들이 마치 타이틀에 눈먼 선수로 보았습니다. 저는 타이틀을 탐내는 성격이 아닙니다. 전 감독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논란은 있어도 기록은 남는 법. 그러나 지금도 좋게 인용되는 법이 없어 억울한 송진우다. 1992년 송진우의 다승, 구원 2관왕. 그것은 앞뒤 재지 않고 젊음을 불사른 송진우의 실력 덕분이다.
1989년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한 후 약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그는 늘 앞자리에 있었다. 처음 4년간 성적이 50승64세이브. 프로야구 관례대로 2세이브를 1승으로 치면 4년간 82승을 한 셈이다. 계산상으론 연간 20승 이상을 한 것이다.
좌완투수라는 이점과 시속 140㎞ 이상의 빠른 공.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도 충분했다. 타자들을 압도했고, 운도 좋은 편이었다. 4년간의 혹사로 어깨에 무리가 올 즈음인 1995년 그는 입대했다.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주로 홈경기에만 등판했다. 그전 4년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72와 3분의 2이닝을 던지며 호흡을 조절했다.
1년 이상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한 송진우는 1995년 13승, 1996년 15승을 올렸다. 연봉도 1억원으로 뛰었다. 좌완투수 최초의 통산 100승 기록을 바라보며 희망의 1997년을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동계훈련을 열심히 했고 몸 컨디션도 좋았다.
그러나 1997년은 엉망이었다. 도대체 승리를 올리지 못했다. 1승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고작 6승만 올리면 다다를 100승 고지를 9월의 마지막 등판에서 겨우 오를 수 있었다. 연봉삭감의 아픔을 맛보았다. 1억원에서 9000만원으로. 송진우는 입을 꽉 다물었다. 훈련 또 훈련. 절치부심의 98시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또 6승이었다.
모두들 말했다. 젊었을 때 그렇게 죽자사자 뛰더니 일찌감치 마운드를 접게 되었다고. 더 창피당하지 말고 은퇴하라는 이도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힘껏 내던진 공도 타자 앞에 가면 고개를 숙이고 마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민 속의 날들. 그때 머리 좋은 송진우는 자신의 약점을 깨달았다. 어느새 30세를 훌쩍 넘긴 나이. 힘으로 타자와 승부할 일이 아님을 안 것이다. 이젠 노련미로 패기를 잠재워야 했는데 그는 힘도 없으면서 힘으로 싸우고 있었다. 이제 그의 무기는 스피드보다는 체인지업이고 힘보다는 컨트롤이다. 요령과 노련함으로 성급한 젊은 타자들을 농락해야 한다.
이같은 결론을 내리고 마운드에 서자 타자들이 서두르는 것이 훤히 보였다. 슬슬 맞춰 잡았다.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변화구. 130㎞대 공이지만 꿈틀대며 들어가는 탓에 헛방망이질이 많았다. 힘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자신은 힘을 빼고 상대 타자들의 힘을 빼앗았다.
송진우는 정신력과 머리의 ‘회춘투’로 15승을 올렸다. 그 승리 중에는 무려 8번의 완투승이 포함되어 있다. 예전처럼 이기고 있는 5회에 슬쩍 끼어 들어 올린 승리는 단 한 차례도 없었고 대신 완봉승이 2번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활약 덕분에 소속팀 한화는 뜻하지 않게 한국시리즈까지 올랐다. 송진우는 큰 경기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는데 두산과 싸운 플레이오프전에선 최우수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입신의 경기운영’을 보이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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