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죽도록 그리우면 기차를 타라

  • 박해수 < 시인 > jockey@donga.com

    입력2004-09-07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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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의 노랫말로 유명세를 탄 시 ‘바다에 누워’의 박해수 시인. 그가 역(驛) 순례에 나섰다. 전국 760여 개의 기차역이 지닌 서정을 시로 담아내려 발품을 판 지 일년 남짓. 역마다 시인의 가슴에 투영된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다. 그대, 역을 떠올리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누구나 한번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것이다.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차창에 어리는 산천을 바라보며 시심(詩心)에 젖어본 적이 그 누구에게나 있었으리라.

    ‘대전발 0시50분’ ‘이별의 부산정거장’ ‘비 내리는 호남선’ ‘비 내리는 고모령’ ‘추풍령’ ‘남행열차’ ‘나그네 설움’ ‘고향역’…. 노랫말과 가락 속에서 1960년대 보릿고개를 넘고,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에 흠뻑 취해 유신의 1970년대 그 질곡의 산을 굽이굽이 넘었으리라.

    기차가 달려온다. 청운의 꿈을 품고 경부선 열차로 상경했던 젊은 꿈들은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먼 기적 소리에 첫사랑 연인이 마지막 열차칸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은 간이역이다.

    증기기관차에서 디젤로, 디젤에서 경전철로 숨가쁘게 넘어온 오늘이다. 생각해보라, 칙칙폭폭 울리는 옛 추억을. 기관차의 검푸른 연기 속에 설과 추석을 맞은 고달프고도 즐거웠던 고향열차 차창에 어린 보름달. 삶의 신산(辛酸)한 편린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펄떡거리지 않는가.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했던 간이역을 뒤로 하고, 산굽이 물굽이 철교를 지나 기차는 떠나간다. 삶의 둥우리를 찾아가는 이들의 애환을 싣고 기차가 항상 달려가는 곳, 역(驛)은 우리 민족의 애환이 한데 엉겨 인간사(人間事)의 정서가 혼융(混融)되어 만나는 곳, 한과 슬픔이 교접된 곳이기도 하다. 그 역을 따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시의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찬바람 찬 눈을 맞으며 길 떠나는 사람, 길 위에 길이 있으며 역 위에 또 미지의 역이 있으니 사람을 만나고 역을 만나러 발자국을 남기고 역마살을 남긴다.



    인생은 간이역

    나는 중·고교 시절을 대구 달성공원안, 밥풀 같은 흰 꽃이 달려 있는 늙은 이팝나무가 서있던 공원 예식장 아래에서 보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그곳에서 자란 내 마음은 줄곧 그리움과 이상향의 동경에 파묻히곤 한다.

    달성공원을 나와 북성로 철물전을 지나노라면 대구역이 가까웠다. 대구역엔 광장과 노천 대합실이 있었다. 노천 대합실은 살기 어려웠던 1960년대의 고통이 스민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역은 내 시의 감수성을 키워주었고 삶의 눈을 밝혀준 곳이다. 그래서 역사(驛舍)의 풍경들은 한 편 삶의 시였다.

    초등학교 시절, 궁핍했던 그 시절의 ‘기차길 옆 오막살이’ 노래는 더욱 애달픈 향수와 역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내게 했다. 호롱불 아래서 ‘바둑이와 철수’ ‘구구단’을 외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까. 시커먼 꽁보리밥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 한 끼는 거르며, 수도꼭지를 틀어 주린 배를 채워야 했던 궁핍의 극치를. 또한 중학교 시절 이성에 눈 뜰 무렵, 역은 내게 사랑이었고, 목마른 내 시 속의 그리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옛날 그 시절은 비록 가고 없어도 내가 찾아 헤매는 기차역은 그리움과 향수가 살아 숨쉬는 곳들이다.

    어쩌면 우리들 인생도 역이 아닐까. 역은 인생, 기차는 ‘나.’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곳, 끊임없이 만나고 떠나가는 삶의 현장이 내가 추구하는 시편들이다. 이럴진대, 시는 활자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숨쉬고 움직이며 생동하는 ‘생물(生物)’이라 일컬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역이라면 좋겠다/ 사방팔방으로 가도 좋으니까/마음 헛짚어/ 역마살이 끼어/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도/역은 항상 역으로 거기 그 자리/ 흔들리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누가 가서 흔들어도 / 역은 마음을 달래 주니까/마음 깊어 슬픔까지 데불고/ 마음 길을 찾아/마음 집을 찾아 헤매고 있어도/ 마음 넉넉한 집/간이역을 찾아 내 삶을 다독이며/ 바람까지 데불고/별까지 데불고/ 처자식까지 데불고 헤매어/하늘역까지 가고 싶었다/ 마음 갈래 갈래/그 길이 가장 많고 길어/ 밤을 새워 마음 역을 놓았으나/마음 번지는 마음만 가고 있으니/ 번지도 문패도 없는/마음 역은 어이도 먼가/ 달빛과 별빛을 따라/하염없이 가고 있으니/ 그 소멸을 어이 할까/그 소멸을 어이 할까/ 상처받은 가난한 마음의 행로여/내 마음의 행군이여/ 이 저녁 역으로 가는 길에/발자국을 남기고/ 역마살을 남기고(시 ‘역(驛)’ 전문)

    청록빛 꿈 깃든 시골역

    오르고 내리는 사람, 가고 오는 사람, 인생은 두 정거장 속 승객이다. 우리가 거쳐가는 역들도 삶의 연대기 속 한 징표가 되는 건 아닐까. 인생의 종착역은 오지 말거나 아니면 느리디 느린 완행열차로 왔으면 좋겠다. 인생. 그 삶의 보퉁이를 끌어안은 수신인 없는 편지와 소포는 지난한 덩어리가 되어 옛날 사연 많고 눈물 많은 그 역 안, 추억의 물품 보관함에 외로운 사연만 안고 있을 뿐이다. 눈발과 함께 찬밥을 먹으며 찾은 두계역, 연산역, 논산역을 지나면 연탄불에 라면이 끓었다. 새벽기차를 타고 훈련소 가던 길, 진학을 위해 상경하던 그 길을 우린 모두 기억하고 있다.

    시를 쓰는 것은 상상이나 정서에만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경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은 추억이 많으면 곧잘 잊어버린다. 다시 지난 추억을 되살리기엔 많은 시간과 체험이 필요하다. 때문에 인연은 중요하다. 역은 그 인연을 맺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다.

    목월, 지훈 두 시인의 첫 만남 인연도 건천역에서 이뤄졌다. 목월은 초면의 서울친구(지훈)를 만나기 위해 ‘박목월’이라 쓴 깃대를 들고 건천역까지 마중나갔던 것이다. 인연을 아는 것은 사고(思考)요, 사고를 통해야만 감각은 인식되어 소멸되지 않는다. 인식과 느낌은 인생을 외롭지 않게 한다.

    역으로 가고 오는 길은 그런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을 심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때로 역이란 공간은 고집불통이고 삶의 불만자이며, 고독한 판관이요, 떡갈나무의 외로운 가랑잎 같다. 사람이 한평생 살다보면 감상적인 유물(遺物)에 기대어보기도 한다. 역에는 현존하는 역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역들이 공존하지만, 사라진 역을 그리워하고 애틋하게 여기는 것은 역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내 시의 심상(心象)이다.

    청록색 꿈이 있는 시골역 플랫폼으로 기차가 덜커덩덜커덩 소리내며 다가온다. 논둑길을 지나면서 철길 위로 눈물이 글썽여지던 기막힌 사연들이 기차 곱배처럼 길었던 것은 꽃멀미와 그리운 사랑이 물씬물씬 묻어나오고 푸르디 푸른 삶이 조개탄 불꽃으로 타고 있음이랴.

    회자정리(會者定離). 시의 작은 표현을 다듬기 위해 나는 간이역을 찾아나선다. 사람과 사람의 틈새를 비집고 바람 부는 날 마음의 창을 열고….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인 경북의 가장 작은 역, 승부역이나 강원도의 구절리역으로 혼자서 훌쩍 떠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간이역엔 읍·면 단위 마을이 있다. 그곳엔 옥수수 알맹이 같은 순정(純情)한 시심이 살아 숨쉰다. 황량한 갈대밭에 지는 노을을 보고 고즈넉한 사랑의 시를 생각한다.

    그럴 때면 헛것을 보고 헛살아온, 안동 헛제삿밥 같은 밥을 먹고 헛것에 눈뜨며 헛것에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달래며 내일의 망상에 오늘을 구겨놓은 것이 못내 마음 아프다. 저녁 기차 소리를 들으며 숯검댕이 얼굴을 한 악동들은 철 모를 희열과 장난으로 철길 같은 인생의 꿈을 키워나갔었는데…. 얼얼한 울음처럼 묵언(默言)으로 자장면 먹던, 자장면 검은 슬픔이 저 산 엉덩이에 숨어 있다. 지평선 끝 철로가 닿는 끝까지 가보고 싶다. 도라산역을 넘어 평양역, 신의주역, 함흥역, 개성역, 사리원역, 대성리역, 국수역, 대광리역…. 북녘 역 있는 곳 그 어디까지라도 찾아가고픈 마음에 시심은 저만치 철길을 앞지른다.

    마흔아홉 나이로 이승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병아리 가슴털 같은 시심을 돋우려 다시 역을 찾아나선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간이역을 그것도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곤혹을 느끼면서도 주말에는 기차를 탄다. 때로는 등산열차를, 눈꽃열차를, 바다열차를 탄다.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사랑이 거기 그 역에 살고 있으니 역을 찾아나서는 결곡한 까닭은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추억을 찾기 위함이다. 간이역에 우두커니 서서 상큼하고 달디단 바람을 매만지며 유난히 눈 많고 추웠던 겨울을 생각한다. 그래도 풀섶 어딘가에 죽순과 쑥갓, 제비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고, 생명의 여린 숨결이 끈질기게 술래잡기하고 있었음이 그 얼마나 소중하고 애틋한 것인가. 이번 주말엔 휴대전화를 끄고 이슬이 소리 없이 뒹구는 세월의 영마루를 뒤에 남겨두고 바다가 있는 역을 찾아 길 떠나볼까.

    문산역을 지나 장마루촌 장파리역에도 가본다. 오늘 그 역은 숨었지만, 전쟁 역시 늙은 소나무 옛 등걸 속에 숨었다. 그래도 역은 항상 ‘거기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역 순례에 나선 건 각각의 역들이 지닌 역 고유의 의미와 서정을 시로 담아내기 위해서다.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이 표류하던 시적 자아가 회색빛 도시 문명을 탈출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충동질한 탓이다. 물론 그동안 사라져버린 간이역도 많다. 이럴 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간 유년시절의 기억이나 군복무 시절의 추억, 여행에서 조우하는 그곳 사람들의 증언으로 되살리곤 한다. 현존하는 역들은 현장 답사를 통해 시의 생명력과 생동감을 돋운다. 전국에 흩어진 768개의 역들과 146개의 간이역은 10권 이상의 ‘역 시집’으로 간행될 것이다. 더불어 역에 얽힌 이야기와 시들을 모아 ‘역과 시가 있는 에세이’를 출간할 계획도 갖고 있다.

    숱한 역들만큼이나 투영된 이미지도 역의 정경과 계절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잔잔한 서정의 노래도 있고 삶의 깊은 수렁 속에 가득 찬 고뇌와 애환의 목소리도 스며있다. 하양역은 어머니의 야윈 젖가슴이었다. 목포역은 어머니의 애틋한 그리움처럼 다가왔다. 동짓날 밤이 깊어가는 조치원역에선 한 마리 새가 되었고, 스물넷 왜관 순심여고 교사 시절 자주 오갔던 왜관역에선 목련꽃 지는 슬픔에 젖어보기도 했다.

    일 년 넘어 계속된 역 순례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역시(驛詩)의 직접적인 집필 동기가 된 것은 낡은 사진 한 장이다. 어머니가 처녀시절이던 1938년 1월 촬영한, ‘기차 철로 위에 선 부평(浮萍)의 몸을…’이라는 글귀가 쓰인 사진 한 장. 그 사진에서 나는 역 순례의 모태를 찾았다. 열아홉 살 어머니가 서있던 옛 기찻길. 그래서 역은 내 시의 고향이며 늙으신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어머니역이다. 무청, 배추잎, 상추, 쑥갓, 살구씨를 말리시던 어머니. 새마을호도, 무궁화호도 서지 않는 간이역처럼 어머니는 여든 중반을 넘어오셨다.

    요즘 역들에선 늙은 역무원이 수기(手旗)를 흔드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듯 우리들의 망각 속에 쉽게 버려지는 것이야말로 어떤 존재를 가장 올바르게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완행열차를 타고 동촌역, 반야월역, 청천역, 하양역, 경산역, 청도역, 밀양역, 영천역, 신동역, 왜관역, 선산역, 인동역, 구미역, 지금은 없어진 고모역 등 대구와 가까운 역들을 지나노라면 사춘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과수원 사과꽃처럼 흩날리기도 한다. 중학교 2학년 때였을까. 한 여자 중학생을 따라 철둑길을 넘어 긴 평행선을 줄곧 따라가보기도 했다. 그땐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무엇보다도 기차역 부근에 오면 슬픔과 고통을 먼 기적소리와 함께 날려보낼 수 있어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병학교가 있었던 광주의 역. 녹색 군복과 함께 내린 광주역. 극락교를 지나 완전군장에다 동장군과 함께 구보(驅步)로 내린 그 역이 바로 광주역이었다. 16주 훈련과 함께 행군으로 만났던 장성역, 나주역, 송정리역도 생각난다. 진눈깨비와 함께 섞어먹던 밥. ‘눈물 섞인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옛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하다.

    혼자 울고 싶은 날, 나는 기차를 탄다. 낙동강 철교를 지나 면소재지의 농촌 역을 찾는 것이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시를 쓰다 역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역 이름을 찾기 위해 잊고 있었던 역을 다시 찾는다. 39년 전 잊어버린 첫사랑도 간이역에 살고 있었고,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펜팔을 하던 추억의 소녀도 간이역에 살았다. 사랑을 잃어버린 개찰구와 기차표는 어디로 갔을까.

    그렇다. 내 몫으로 남은 시간이란 이렇게 자그마한 간이역과 같으니 내 즐겨 간이역을 찾으련다. 이승의 것들도 언젠가는 간이역처럼 없어지거나 떠나고 말 것이라 생각하면 암연(然)이 수수(愁愁)롭다. 오늘도 고즈넉한 쓸쓸함이 논두렁길, 초승달, 명왕성 속에 살아 있듯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간이역에 살아있다.

    간이역에 살아 숨쉬는 것들

    내가 즐겨 찾아간 역들은 급행이 잘 서지 않는 곳이다. 완행열차가 오래 서는 곳이다. 삶의 삽이 한 자루 꽂혀 있고 그 삽처럼 홀로 서있는 조그만 역은 문경역이다. 이곳에선 뼈마디 쑤시는 아픔과 함께 가슴 아린 아픔이 저탄창고와 막장 속에 숨어 있다. 건널목에 붉은 등이 켜지면 열차는 쏜살같이 사라지고, 연탄 한 장 새끼줄에 달고 가는 삶의 고달픈 하루가 있었다. ‘미로(迷路) 찾기’ 같은 삶과 달리 역에는 마침표가 없다. 단지 쉼표, 느낌표, 물음표, 말없음표만 있을 뿐이다. 역은 이렇게 현재진행형이다.

    비 오는 주말, 게으름의 방문을 열고 나서라. 죽도록 그립거나 외로우면 기차를 타라. 기차를 타지 못하면 전철이라도 타라. 전철도 막차를 타면 역을 찾아가는 길처럼 고달픔과 함께 그리움을 만날 수 있다.

    내 어린 날 삶의 한 일면은 대구역 철도 관사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를 그리워하는 추억이다. 친구의 집에서 처음 본 전축, 기차 장난감, 증기기관차의 모습은 내 마음에 아직도 남아있다. 긴 테이프가 있는 녹음기가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철도 관사에만 가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막연한 그리움이 생겨났다.

    먼 하늘에 붉은 노을 사라지고/ 갈매기떼 길을 찾아날아들 때/ 이리저리 방황하며 나부낄 때/ 샛별 등대저만치서 빛납니다

    초등학교 때 꿈을 키우며 부른 노래는 스무 살이 되고 불혹을 넘어 이순(耳順)이 될 외로운 아침이 되어도 잊지 못한다. 친구의 부음으로 문득 삶이 아파오면 솔순 이파리처럼 간이역은 가로등 같기도 한, 상가(喪家)의 깜박거리는 불빛처럼 쓸쓸한 역이 된다. 연착한 기차는 인생 지각생처럼 내 삶을 등뒤로 자꾸만 밀어낸다.

    어둠의 끝자락에 매달려오는 기차는 고향 동구밖을 지난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1960년대 새마을 운동 얘기에 열이 올랐다. 미나리꽝엔 그때처럼 돌미나리가 새파랗게 총총 돋아나 있다. 동촌역에서 철길을 따라 대구역까지 걸어왔다. 푸른 스무 살 연애시절이 어느새 가슴에 다가와 있다. 솔숲 산에서 후두둑 내리는 소낙비를 맞으며 쏘다니다 철둑길을 걸으며 하루의 반나절을 꼬박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역에는 사람의 사랑과 숨결과 체온이 함께한 흔적도 남아있다. 역 주변엔 여인숙이 많았다. 여인숙은 씁쓸하게 젖은 날 젊은 시인의 눈물 같은 집이다. 새 이정표를 찾아 길 떠나며 하루를 묵어가는 쓸쓸한 잠자리가 있는 역은 삶의 포장마차 같은 곳이다. 바람처럼 왔다 다시 열차에 올라 어둠 속으로 떠나가는 길목엔 구절초 같은 사랑이 숨어있다.

    구구절절이/ 구절초 꽃이 피었다/ 게으른 들판 길을 걸어오면서/돌과 잡풀 속에서/ 구절구절 가난이/ 도둑과 같이/ 구절구절 돌아보는/ 삶과 같이구절리 역에는/ 섣불리 인생과 술과 시에/ 대하여 사랑했다고 언설(言說)하지 마라/구절리 역에는/ 구절초 꽃잎이 떨어진다/ 구절리 역에는/ 구절구절 많은구절초 꽃 같은/ 사랑이 숨어 있다(시 ‘구절리역에는’)

    구절리역에 간다. 기차는 몸살을 앓으며 낡고 해진 시집처럼 서있는 시골 간이역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이제는 속도만 있고 시간만 다투는 기차들뿐이다. 구절리역엔 구구절절 사연 많은 사람들이 한적하게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산다. 늦은 밤 별빛과 새벽 달빛을 껴안고 돌아오는 서정(抒情)과 서사(敍事)가 공존하는 역이다. 겨울 아랫목 군불 속에 숨겨놓은 따뜻한 놋쇠 밥그릇, 이불속에 든 어머니의 그 따뜻한 사랑에 추위를 잊고 찾아가는 따뜻한 역이다.

    역은 항상 같은 역이지만, 처음 본 풍경이 가장 인상깊게 가슴에 와 닿고,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법. 처음이란 것은 사람의 영혼에 머물기 좋은 시간과 공간이다. 자연은 사람에게 경건한 순리를 일깨우지만, 역은 사람 속에 있고 사람이 만든 사람의 땀과 눈물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곳에서 이뤄지는 곳, 삶의 고향이다. 문장으로 말한다면, 만연체가 아니라 간결체일 것이다.

    영등포역과 서울역, 용산역, 청량리역에도 기차는 어둠을 좇아 사람을 싣고 간다. 하지만 철로변 부근의 감상과 낭만은 잠시뿐 삶의 현실은 어두운 철로처럼 버티고 있었다. 삶도 이처럼 때로 고달프고 외로운, 어쩌면 ‘가시철로’인지 모른다. 나는 아직도 끊임없이 찾아야할 추억의 역들을 찾아 헤맨다. 잃어버린 역을 ‘복원’하기 위해서다.

    산간벽지로 떠난 신임교사, 처녀선생은 시골역에서 내려 총총히 자취집을 찾아갔을 것이다. 나는 밭을 지나가고 꼴 망태기 지고 가던 저녁의 농촌풍경을 기억한다. 신임교사는 전원과 더불어 살며 수필가가 됐다. 군복무 시절 춘천역에서 만났던 최기훈 중위는 서른 두 해 전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겨울 하늘의 별이 되었다. 경기도 파주 법원리, 용주골, 광탄 신산리, 마지리, 의정부 포천, 연천 임진강 한탄강을 누비고 감악산을 올랐던 우정과 기개는 사철나무처럼 푸르렀었다. 백학리를 넘어와 스물의 젊음을 군화와 함께 산 의정부역, 문산역은 그래도 정겹다. 짙푸른 군복이 서부전선 역에 걸려 있다.

    역은 삶의 포장마차

    정선, 영월을 지나 강원도에 소재한 역들을 찾아간다. 정선을 빠져나와 광하리, 광석리, 망하리를 지나 강과 산이 맞붙은 곳으로 간다. 이팝나무 냄새가 난다. 깊은 산천에 가면 화전민들의 터가 있다. 그곳이 이승의 끝이랴 싶어 눈물이 그렁그렁 포개어진다. 삶 속에 역이 포개어지면, 산 뿌리와 같은 화전민들을 보면 혈육 같은 정을 느끼게 된다.

    풍기역, 죽령역을 넘어 단양역으로 넘어가 본다. 그러다 강릉에서 역은 끊어지고 고성에서 해금강을 바라본다. 문수역엔 문수보살이 살고 있을까. 간이역에 서서 생각하면 가장 행복한 사람은 여행과 신앙 그리고 자연을 아는 사람이다. 삶의 지도, 인생의 지도에는 자연의 순리처럼 삶과 죽음이 이어진다. 그래서 역은 끝나지 않고, 다만 사라진 간이역은 소박한 순명(順命)을 다하고 사라지는 우리네 삶과 같다.

    영주역을 지나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소박한 마음이 된다. 베틀재를 넘어 구절양장 고갯길을 돌며 전쟁의 상처가 지워진 모습을 본다. 무릉역. 영월과 충북땅을 넘기 위해 노루목 고개를 오른다. 김삿갓 일가가 살아온 삶의 터전은 무릉역 바로 옆길에 있다. 이렇게 찾아가고 찾아오는 역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머무는 주막, 아니면 문전 걸식하며 하룻밤 신세를 지는 어두운 골방이었을 것이다.

    역이 없었던 옛 시절, 옛 사람들이 괴나리 봇짐을 지고 오르내린 오솔길 도보 여행에서 햇볕 좋고 그늘 좋아 쉬어가던 곳, 자연의 흥취에 흠뻑 취해 시 한 수 한 수 읊조리던 그 곳들이야말로 훗날 간이역이 되었고, 지금은 고속도로와 국도로 변했을 터다.

    청량산에 가다보면 우리나라 산 전부가 공원이다. 울퉁불퉁한 삶의 등고선과도 같은 역들이 펼쳐진다. 용궁역은 산신각처럼 고개를 세우고 서있다. 봉화역과 춘양역, 소천역과 분천역을 거쳐온다. 개방풀, 물봉선화, 쥐솔이풀, 개불알꽃이 한창인 들녘을 지난다. 진정한 삶이란 무엇일까. 잠시 역에 대한 명상에 잠겨본다.

    소외가 지나쳐 왕따가 되고, 가난이 힘겹고, 성격이 맞지 않아 갈등만 키운 채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 아무튼 사무치게 외로우면 기차를 타고 역을 찾아 나설 일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탁발승처럼 참선하고 서있는 밤 시각의 역들을 보면 삶이 새삼 그리워질 게다. 역은 때때로 포장마차처럼 펄럭거린다.

    작가 우호성은 ‘소금물은 짜다, 바닷물은 짜다’라고 꽁트를 쓴 적이 있다. 내 이름 해수(海水). 바닷물이 짠 것은 자신에 대한 아픔이지만, 짠 것은 부패하지 않는다. 부패하지 않는 생명의 바다다. 누구에게나 그의 눈높이만큼 바다는 출렁거린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 파도가 살고, ‘별속에 사람이 산다’는 시인의 상상처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 역시 하나의 역이다.



    바다가 서있는 ‘하늘역’

    1980년 여름, 홍도에 간 적이 있다. ‘홍도역’이라고 해야 할까. 붉은 여름날 오후 바다는 해수(海水)가 되고 해수는 바다가 됐다.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목포의 눈물’을 들으며 나는 섬과 바다에 젖어 있었다.

    정동진에 가면 나는 홍도를 떠올린다. 목포, 군산, 사천, 변산의 바다를 그리워한다. 마치 긴 검은 목도리를 드리운 수도사처럼…. 수도원 가는 길 같은 바다다.

    바다에도 역이 있다. ‘바다역’이다. 그러나 바다역은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속 바다를 사랑하면, 지극히 사랑하면 잘 보이는 깊은 내면 속의 역이다. 나무의 생명과 솔바람 소리가 파도와 함께 출렁거리는 부산의 작은 역, 청안(靑安)하게 앉아 있는 송정역처럼.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동해안을 따라 동해역, 추암역, 망상역을 넘어보라. 슬픔은 남겨두고 몸만 가거라. ‘묵상하는 바다’를 보면 기도하는 ‘초록바다역’인 승부역을 찾을 수 있다. 역을 찾아 떠날 땐 삶을 완상(玩賞)하고 떠나야 한다. 저마다 행선지가 다르고 사연이 다르고, 삶을 가꾸는 일자리가 다르듯, 시인으로서 내가 보고 싶은 마지막 역은 ‘하늘역’이다.

    촛불을 들고/ 하늘역을 어리둥절 찾아갔습니다남루한 아버지와 형과 아우가/ 먼저 도착해 있다고/ 우선 나를 찾았습니다하늘역에는/ 부모와 동기간도 없고/ 만남과 이별도 없고영원히 사는 것뿐이라고/ 하늘역에는 고통스런 시를 쓰지 않아도좋은 시들이 많은 것이라고/ 내 마음을 몸을 하늘역처럼 살라고하늘역을 놓았다고/ 촛불을 들고 나와/ 어리둥절 찾지 않아도 되니네 몸과 마음속에 하늘역을/ 만들어 놓아라고자꾸만 네 마음에/ 하늘역을 만들어 놓아라고네 시가 가는 곳이 바로/ 하늘역이라고(시 ‘하늘역’)

    높고 참되고 외롭고 쓸쓸한 망루(望樓) 같은 역이 하늘역이다. 현존하는 역은 그 자체로 그리움을 낳지만, 역과 바다를 보면 목이 메는 내게 하늘역은 ‘시적 종착역’이다. 지상의 역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일상의 굴레를 벗고 철새처럼 날아가고픈 그런 역이다. 나는 밤하늘에 홀로 반짝이는 별들 같은 하늘역을 찾아 오늘도 역 순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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