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몸’의 찬미자 미켈란젤로, 신에 귀의하다

  • 박홍규 < 영남대 법대 교수 > sky3203@donga.com

    입력2004-09-07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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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과 예술을 삶의 제왕으로 삼아 교회 비판에 앞장섰던 미켈란젤로. 예순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신에 귀의하기까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파격과 모순, 불균형의 균형으로 예술의 한 정점을 산 어느 천재의 초상.
    장승업이 왕에게 불려갔으나, 몇 번씩 궁궐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미켈란젤로처럼 멋진 반권력 예술가상을 그려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빙 스톤의 소설 ‘미켈란젤로’나 이를 원작 삼아 만든 영화 ‘고뇌와 황홀’은 ‘취화선’과 전혀 달랐다. ‘고뇌와 황홀’은 ‘천지창조’를 그리는 4년 동안 벌어진 교황과 미켈란젤로 간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시저로 나왔던 렉스 해리슨이 교황, ‘벤허’의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나온다. 모두 ‘강한’ 남자들이다.

    당시의 교황은 지금 우리가 보는 교황과는 매우 다른, 시저처럼 전쟁을 지휘하는 대장군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버릇 삼아 명령하듯 묻는다. “언제 끝나느냐?” 화가는 언제나 “내가 만족할 때”라고만 답한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불가능한걸까? 장승업도 “꼴려야 그리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왕에게 그렇게 답했다는 식의 얘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까? 그러나 화가를 아끼는 왕이어서 천민인 그를 부른 것이니 설마 죽이기야 했을까?

    ‘고뇌와 황홀’은 남자만의 영화는 아니다. 과로로 쓰러진 화가를 극진히 간병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르네상스 최대 권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 티치나. 당시 유부녀인 그녀가 미켈란젤로의 애인이었다는 증거는 없으니 픽션인 셈이다. 둘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시절 공부한 로렌초의 조각학교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나, 병약한 티치나가 명문가로 시집가면서 미켈란젤로는 귀족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고 설정돼 있다. ‘취화선’에도 그런 여인이 장승업의 첫사랑으로 나오나, 그 실연이 양반에 대한 증오심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장승업의 경우도 괜한 기생들 얘기 말고 그런 사랑으로 꾸밀 수는 없었을까? 아니, 기생 이야기를 할라치면 차라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춘화를, 장승업이 그들과의 사랑을 통해 완성한 작품이었다고 보면 어떨까. 낮에는 돈벌이를 위해 완벽한 형식미의 중국화를 그리고, 밤에는 기생과의 정사를 소재 삼은 춘화를 그렸다면. 그리하고 나면 춘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영화에서 춘화는 철저히 매도되고 있다.

    영화 잡지들은 ‘취화선’에 대해 크게 떠들어대고 특히 장승업 역을 맡은 영화배우 최민식의 연기를 칭찬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화가가 아니라 ‘조폭 같은’ 최민식만 남아있다. 물론 키가 크고 근육질인 미남 헤스턴이 키가 평균 이하이고 비뚤어진 입과 코를 가진 추남 미켈란젤로를 연기한 것 역시 한마디로 코미디였다. 조폭 같은 장승업 연기도 마찬가지다.



    ‘고뇌와 황홀’에서 미켈란젤로는 몇몇 여자들과 사랑 혹은 불륜에 빠지고, 심지어 창녀와의 관계로 성병에 걸리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관련해 유일하게 근거가 남아있는 여성은 그가 60세 때부터 10년간 친구로 지낸 비토리아 콜로나뿐이다.

    ‘남자의 벗은 몸’이 말하는 것

    그러나 최근 번역된 독일 로로로판 평전 등을 보면 동성애는 근거 없는 비방으로 부정된다. 그런데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쾌락의 화신으로 그려진 ‘레다’와 조각 ‘밤’과 ‘낮’, 그리고 사랑을 노래한 소네트 한 편뿐이라는 점은 문제다. 솔직히 그가 동성애자였다면 또 어떤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반 고흐로 분한 팀 로스가 그 비슷한 얼굴과 체구의 미켈란젤로 역을 맡는다면 확실히 동성애자로 그려질지도 모른다.

    최근 전우익이 쓴 ‘사람이 뭔데’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내리고 있다.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인 시인 신경림은 그를 두고 ‘깊은 산속의 약초처럼 귀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전우익 자신은 ‘사람이 뭔데’라고 묻고 있으니 그리 부르는 것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약초라고 하면 모르되.

    ‘사람이 뭔데’의 광고는 ‘소로우, 니어링, 그리고 오늘·여기의 전우익!’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소로우도 니어링도 ‘사람이 뭔데’라고 말한 적은 없다. 환경오염이나 생태파괴는 인간이 저지른 짓이다. 아니, 전쟁을 비롯하여 모든 악행은 인간이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부정할 것인가? 인간 청소를 할 것인가?

    소로우나 니어링의 책이 널리 읽히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시민불복종주의자로서 소로우나 니어링이 아니라 그들의 자연주의만을 강조하는 최근의 풍조는 내게는 의문이다. 특히 니어링의 경우, 그의 전기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서 풍자되는 것 이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과도하게 소개되는 이유도 궁금하다. 그의 조국인 미국은 물론 세상 어느 나라에서 이렇듯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을까. 나는 모른다. 노장의 도교주의와 관련이 있을까. 그것으로 오늘·여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해결은 인간 부정, 인간 혐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의 추구에 있다.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르네상스인이 그러했다. 그 새로운 인간상이 바로 ‘다비드’ ‘모세’이고, 그 새로운 세계가 바로 ‘천지창조’요 ‘최후의 심판’이다. 인간의 벗은 몸을 미켈란젤로 만큼 아름답게 창조한 르네상스인은 없다. 특히 남성의 벗은 몸을. 그래서 미켈란젤로를 동성애자로 보는 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인은 신이 자신과 꼭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었음을 미켈란젤로는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신에 가까운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창조됐다고 믿었다.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창조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종교적 편견에 의해 성기 부분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후 500년이 지난 1994년 복구 때 ‘걸레’들은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드러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그리고 그 사이를 지배한 5세기의 어둠이란! 그러나 여전히 예수와 마리아는 옷을 벗지 못하고 있다. 5세기가 지나도! “예수와 마리아도 인간이기는 마찬가진데.” 하늘에서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최근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꽤 소개되고 있으나 내가 아는 한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 독자들에게 가장 널리 소개된 르네상스인은 미켈란젤로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그의 전기를 읽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로맹 롤랑의 전기(1905), 어빙 스턴이 쓴 소설 스타일의 전기(1961)도 찾아 읽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 외에도 많은 외국어본 전기 및 연구물을 읽었는데 역시 압권은 위의 두 책이다.

    로맹 롤랑의 저작은 그가 쓴 베토벤·밀레·톨스토이·간디 등의 전기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낭만적이다. 미켈란젤로를 비극적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빙 스턴의 소설을 근거로 제작된 영화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의 참모습은 평범하고 속물적인 인간이다.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르네상스인이라 부를 수 있는 당대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나는 졸저 ‘내 친구 빈센트’에서도 종래의 비극적 천재로서의 반 고흐를 해체하기 위해 노력한 바 있다. 스턴 등이 쓴 미친 천재로서의 반 고흐 상을 해체하고자 한 것이다.

    스턴이 반 고흐와 미켈란젤로를 함께 쓴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천재나 영웅을 평범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지극히 비대중적인 일이어서 인기가 없다. 대중은 영웅이나 천재, 그것도 비극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같이 평범하고 속물적이라면 굳이 알아야 할 흥미를 느끼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처럼 미켈란젤로도 겹눈의 인간이었다. 그는 조각·회화·건축은 물론 시작에도 탁월했다. 미켈란젤로는 특히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민주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로서 정치에도 참여했다. 귀족이나 대지주가 아닌 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공화국의 요직을 맡았고, 공화국을 상징하는 ‘다비드’상도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에 따라 교황의 명령으로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나, 지엄한 가톨릭 본전 벽과 천장을 온통 누드로채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인과 함께 남자를 사랑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는 예술과 삶 사이의 모든 경계를 부서뜨렸다. 그는 긴장과 역긴장, 그리고 그 종합의 변증법으로 살았다. 속물과 해탈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재물을 탐하고 명성을 구했으나, 그것에 끝없이 번뇌했으며, 마침내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특히 종교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신이란 곧 인간이었고, 인간의 몸이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베드로성당까지 고스란히 인간의 몸을 닮아 있다. 추상적인 비례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서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인간의 몸을 모르면 건축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그 말은 건축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해당된다.

    베드로성당은 이름 자체가 인간이다. 4세기,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순교한 곳에 세워진 성당이다. 베드로란 이름에는 돌이라는 뜻도 있어(따라서 우리 식으로는 ‘돌쇠’가 될까) 성당의 초석으로 여겨졌고, 그는 최초의 교황으로 추앙됐다. 교황이란 ‘가르치는 황제’라는 뜻인데, 여기엔 아마 예수를 잇는다는 뜻도 숨어있으리라.

    베드로성당 옆 바티칸 미술관 1층 구석 시스티나예배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천장화 ‘천지창조’가 있다. 2층에는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과 ‘성체의 논의’, 이어 프라 안젤리코의 예배당이 이어진다. 그중 압권은 역시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같은 ‘작은 세계’를 보다 ‘최후의 심판’이나 ‘천지창조’를 보면, 그 규모도 놀랍지만 미켈란젤로가 그린 장대한 몸집의 인간들이 그득한 세상에 더욱 놀라게 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미켈란젤로의 거인은 미스터 유니버스류의 근육질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간을 일정한 몸집을 갖는 해부학적 대상의 나체로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마른 사람이 없고, 모두 보기 좋을 정도로 살이 붙어있다. 따라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성자든 속인이든 모두 비슷한 몸집의 살아있는 인간들로 표현했다.

    라파엘에서 미켈란젤로로

    인간의 몸을 한 집인 성당 속에 있는 ‘인간들의 세계’. 그리고 그가 만든 무수한 인간의 조각상들. 미켈란젤로는 바로 인간의 예술가다. 그에게는 오직 인간만이 문제였다. 당연히 그들의 정신과 삶, 그러니까 종교와 사회가 문제시된다. 이 점이 그가 비교적 비종교적, 비사회적이었던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와 다른 점이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산 시대가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의 그것과는 달리 위기의 시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는 바로 마키아벨리의 시대였다. 마키아벨리가 그 위기를 정치적으로 극복하려 했음에 비해 미켈란젤로는 종교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고뇌는 에라스무스, 그리고 모어의 유토피아로 이어진다.

    어빙 스턴 작 ‘미켈란젤로’의 우리말 역자는 예술창조에 철저했던 미켈란젤로의 생애가 “물질만능의, 갈 바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삶의 가치를 다시 일깨워주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윤리관과 직업관을 새롭게 제시한다”고 했다. 이는 현대인이 자기 직업에만 충실하면 만사가 해결되고 갈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인가? 이렇게 스턴의 책마저 시오노 나나미 류의 처세술로 오해되는 우리의 천박한 지적 풍토는 처량하기 짝이 없다. 스턴이 그런 내용의 책을 쓰지 않았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를 햄릿처럼 묘사했다. 이에 대해 로로로는 자신의 평전에서, 롤랑이 미켈란젤로가 남긴 편지 한 통을 잘못 읽은 탓이라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묘사라 폄하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편지가 약 500통에 이르니 한 통 정도 잘못 읽을 수도 있겠으나, 그 하나 잘못 읽어서 인간성을 전면 오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많은 작품을 미완으로 남겼는데 그것은 그의 우유부단함을 증거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시비가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의식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롤랑 식의 이야기는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 이래 자기 작품에 절대 만족 못하는 멜랑콜리한 예술가상을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전형으로 미켈란젤로를 자주 언급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예컨대 들라크루아는 미켈란젤로를 직접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낭만주의자들이 새로운 예술가상으로 미켈란젤로를 숭상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예술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탕달은 미켈란젤로의 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고 예언했고, 제리코는 ‘최후의 심판’을 모방해 ‘메두사의 뗏목’(1819)을 그렸다. 그러나 프랑스에 이러한 경향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무렵이다.

    낭만주의의 ‘주적’인 아카데미즘을 뒤집은 선구자로 미켈란젤로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18세기 말엽,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먼저 나타났다. 블레이크나 레이놀즈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17~18세기 바로크·로코코 아카데미즘의 시대에 미켈란젤로는 잊혀졌거나 무시되었다. 대신 라파엘이 ‘창조의 쾌적한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추앙됐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균형과 조화가 결여된, 단조롭고 지나치게 해부학적인 과장에 치우친 ‘저속한 방임주의’로 매도됐다.

    고전주의 미학자인 빙켈만은 미켈란젤로가 취향의 퇴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유일한 ‘변호’는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를 예찬한 것 정도다. 그러나 괴테 역시 만년에는 라파엘을 더 좋아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살아 생전 이미 ‘신화’였다. 바자리는 그의 ‘르네상스 예술가 평전’(1550)에서 당시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미켈란젤로를 다루었고, 그런 유의 평가는 당시 이미 일반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이후 등장한 카라바지오, 카라치, 루벤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그리고 푸생에 이르기까지 미켈란젤로는 늘 뛰어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됐다.

    19세기, 미켈란젤로는 부활했으나 도덕적 비난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러스킨은 고대 그리스인이나 베니스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성실하고 겸허하며 자연스럽게’ 인간의 몸을 그린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추잡하고 불손하며 인위적으로’ 그렸다고 평했다. 나는 러스킨을 좋아하지만 이런 유의 빅토리아조 근엄주의는 질색이다.

    스턴의 책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그는 13세의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그림을 배우러 가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스승에게 그를 소개한 친구가 미켈란젤로는 벽화를 그렸다고 말하나, 이는 전설에 불과하다. 또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13세가 아닌 14세부터다.

    소설에서 미켈란젤로는 스승에게 돈을 내기는커녕 돈을 달라고 한다. 물론 이 점도 허구다. 돈을 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가 그림 수업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화가란 천한 직업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법학도로 만들기 위해 7세 때 라틴어학교에 보낸다. 그럼에도 그림에 관심을 갖는 아들을 아버지는 매질한다. 소설에는 13세의 미켈란젤로가 예술의 길을 가겠다며 아버지와의 언쟁에서 이기는 장면을 길게 서술하고 있다. 스턴은 어린 미켈란젤로가 여성의 나체화 등을 그렸다고 하나, 실제로 남아있는 것은 몇 장의 모사 펜화뿐이다.

    이듬해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가 세운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배운다. 소설에서는 이를 ‘정원’이라 표현하고 있으나 터무니없다. 그곳은 아테네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아카데미와는 전혀 무관한, 지극히 자유로운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자기만의 역동적인 조각기법을 연마한다. 그러나 당시에 만든 조각들은 지금 거의 남아있지 않다.

    1494년,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에 침입하자 피렌체에서는 민중 봉기가 터진다.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무능한 아들이 추방되면서 신부 사보나롤라의 근엄한 공화정이 시작된다. 사보나롤라는 물질적 쾌락과 호화생활에 젖은 당시 교황과 로마 교황청을 비난하고 그 타락에 대한 신의 형벌로 인해 이탈리아는 멸망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는 프랑스 군대를 노아의 홍수에 비유하면서 그들이 이탈리아를 무너뜨릴 것이니 피렌체 시민은 이제라도 빨리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1498년, 교황에 의해 화형당하고 만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미켈란젤로도 그의 사상에 심취해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 중심의 교회개혁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에 의해 고향마을이 불타는 순간 미켈란젤로는 그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우선 사보나롤라는 예술마저 부정한 인물이었다는 해석, 또는 미켈란젤로가 겁쟁이였다는 주장, 한편으로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이교적 지식과 기독교 사이에서 번민했다는 설 등이다. 나는 그 모두를 수긍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10대 소년이었다는 사실이다.

    “난 기적을 믿지 않아”

    19세의 미켈란젤로는 베니스, 볼로냐를 거쳐 로마로 갔다. 로마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가 그에게 최초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1499년, 그의 나이 불과 24세의 작품이나, 그야말로 걸작 중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쩌면 돌을 흙처럼 주물러 자유자재로 빚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언뜻 보기에도 ‘피에타’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성모가 죽은 청년 예수를 안고 있다. 성모의 실제 나이는 50세가 넘었으련만 얼굴은 10대, 아니 그 밑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앳되기 그지 없다. 이는 사보나롤라를 비롯한 당시 기독교인들이 성모는 무원죄의 영원한 순결 처녀라 말한 것을 따른 결과다.

    어린 모습에도 성모의 얼굴은 지엄하기 짝이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아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눈물은커녕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피에타’를 자애로운 성모상이라 예찬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나는 도무지 그런 견해에 찬성할 수 없다.

    1501년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4년간 ‘다비드’ 등 수많은 걸작을 생산한다. 당시 이미 공화주의적 자유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숭상된 ‘다비드’ 상에 대해 최근에는 권력의 과시를 표현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으나, 적어도 당시 피렌체인에게 이 작품은 위기를 맞은 공화국이 지향하는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다비드’상 또한 이상하다면 이상한 구석이 적지 않다. 언뜻 보기에도 신체가 불균형하다. 손은 너무 크고 발은 너무 작아 발보다 손이 더 커 보인다. 팔뚝은 소년인데 가슴은 청년의 그것처럼 떡 벌어져 있다. 눈은 적을 응시하고 있으나, 양팔은 완전히 긴장을 푼 것처럼 매우 부드럽다. 코도 너무 커다란데 당시 피렌체의 지배자가 이를 지적하자 코 위에 돌가루를 뿌리며 이제 됐냐고 반문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미켈란젤로는 왜 이런 상을 만들었을까? 조각가인 그가 신체의 불균형을 몰랐을 리 없다. 여기서 우리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도나텔로의 동명 작품이 골리앗을 물리친 유약한 소년인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건장한 청년임에 유의해야 한다. 구약성서에는 15세 가량의 어린 소년이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나오니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도나텔로가 옳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처럼 건장한 근육질이어야만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뜻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골리앗을 이긴 것은 기적이 아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당연한 결과다.

    그렇다. 미켈란젤로는 기적을 부정한다. 그에게 기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설사 신의 기적이 있다 해도 이는 정신적인 것에 불과하다. 도리어 초인적인 의지와 지혜, 그리고 체력을 갖춘 ‘인간 다비드’야말로 진실이다. 그러므로 다비드는 가장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 표현되어야 한다. 아마도 ‘다비드의 강인함’이란 ‘불균형의 균형’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리라.

    ‘다비드’가 광장에 세워지자 사람들은 밤마다 여기에 돌을 던졌다. 이유는 불균형이 아니라, 성기가 성인의 그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당시까지 여성상은 성기 표현 없이, 남성상은 소년의 모양새로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대중이나 교회의 수준이란 고작 그 정도였다. 교회는 이후 ‘최후의 심판’의 성기를 모두 가리도록 명령하는 것으로 그 수준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1508년,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를 그린다. 건축가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에게 실패를 안기려고, 교황을 부추겨 조각가인 그에게 화가의 일을 맡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전혀 근거 없다. 한편 소설가 스턴은 미켈란젤로가 그 이유를 레오나르도의 질투 탓으로 여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나 이 역시 근거가 없다. 미켈란젤로가 천장화 작업을 원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대신 라파엘을 추천했다. 그러나 스턴의 책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어쨌거나 무엇이 사실이든 상관없으니 그림이나 보자.

    아, 사진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들에게 이 말만은 해야겠다. ‘최후의 심판’은 밑바닥에서 17m 높이의 그림을 올려다 보아야 하기 때문에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건 약과다. ‘천지창조’는 목을 뒤로 완전히 젖혀야만 겨우 눈에 들어온다. 바라보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다. 그렇다고 신성한 성당에서 누워 볼 수도 없다. 그러나 몇 년간 허리를 완전히 젖힌 상태로 그 그림을 그렸을 미켈란젤로를 생각하면 몇 분의 고생쯤은 괜찮다.

    ‘천지창조’는 신약성서가 아닌 구약성서를 소재 삼고 있다. 왜 예수의 일생을 그린 신약이 아닌 구약을 택했을까? 많은 학자들은 구약의 내용이 ‘더 인간적’이라는 점을 꼽는다. 미켈란젤로처럼 정말 인간다운, 그토록 모순된 성격을 생각한다면 특히 그러하다. 물론 여기에는 사보나롤라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인간의 조상인 아담이 지성을 얻음으로 인해 낙원에서 추방된다는 비극적 설정에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이고자 노력하는 것에 대한 신의 준엄한 심판에서 미켈란젤로는 신의 잔혹함을 느낀 것일까. 그 비극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모습이 모두 침울하고 슬픔에 잠겨있거나 격앙된 모양새로 그려진 것 또한 그 잔혹함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봐야 하리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다.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나 뱀의 유혹으로 인해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그 자손이 잇따라 죄를 지어 대홍수로 심판받는다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미켈란젤로 이전이나 이후에나 성기가 가려진 채 그려진 것이 보통이나 미켈란젤로는 이를 노출시켰다. 특기할 만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그림들보다 ‘노아의 홍수’에 특히 관심이 간다. 그림 중앙 위쪽에 상자처럼 생긴 노아의 배가 있다. 그 오른쪽에 텐트가 쳐진 좁은 바위가 있다. 그림 왼쪽 밑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도망가고 있는 거대한 대륙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 셋의 중간에 폭도들이 탄 보트 한 척이 있다.

    종래 노아의 배는 가톨릭 교회, 텐트는 유대 교회, 대륙은 이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가톨릭 교회를 빼고는 모두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은 당시 교황을 공격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군대로 해석했다.

    그러나 텐트 속 사람들은 물론 대륙의 사람들이나 보트의 사람들조차 모두 사악하다기보다는 인간적 사랑과 물질을 갈구하는 처연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당연히 죽어야 할 인간’이 아닌, 육체와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야말로 운명의 결정권자라는 르네상스 시대 신플라톤주의적 인간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란 책을 쓴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비코 델라 미란돌라의 제자였다. 그는 ‘인간은 세계의 중앙에 있다’, 즉 인간은 신과 물질의 중간자라 선언하고 물질, 즉 육체에의 집념을 버림으로써 신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켈란젤로가 그린 고뇌의 인간은 그런 집념의 르네상스 인간들인 것이다.

    근육질의 ‘모세’상에 담긴 뜻

    한편으로 텐트가 유대교를 상징한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텐트에는 가톨릭 미사의 상징인 포도주 술잔, 고귀한 황색 옷을 입은 신부, 가톨릭 교회의 승리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부를 교황이라 하면 그 텐트야말로 로마 교황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로마 교황청을 부정했다. 1496~98년을 로마에서 보내면서도 몇 차례나 피렌체로 돌아와 사보나롤라의 새 교회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 20년 뒤, 루터가 나타났다. 즉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 중앙의 노아의 배는 교황청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물론 미켈란젤로가 루터식 종교개혁에 찬성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천지창조’를 그리고 난 뒤 미켈란젤로는 심신이 완전히 녹초가 됐다. 목은 뒤로 젖혀져 편지 한 장을 읽으려 해도 머리 위에 두고 봐야 할 정도였다. 앞을 볼 수 없어 항상 어딘가에 부딪혔다. 한가지 다행한 점이라면 그림을 완성한 직후 교황이 사망하면서 그야말로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어 미켈란젤로는 죽은 교황과 약속한 묘의 조각을 시작한다. 그중 ‘모세’는 완벽한 조각으로 평가된다. ‘다비드’와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에게 모세가 홍해를 가른 기적 따위는 관심사 밖이다. 모세는 그저 초인적 의지력과 지혜, 체력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또한 모세는 다비드 이상으로 민족해방의 실현자다. 바자리는 이 ‘모세’상을 보고 많은 유태인들이 가톨릭에 귀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모세’상에는 어딘가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모세 앞에 놓인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모세의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피렌체의 운명에 대한 묘사로 볼 수 있다. 이는 ‘노예’상을 포로가 된 유대인, 또는 외세에 침략당한 이탈리아, 또는 메디치 독재하의 피렌체 민중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연결된다. 아무려나, 인간의 절대성을 믿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원초적 불안과 의혹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건 어떨까.

    미켈란젤로가 가난하고 불행한 민중을 동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동정’ 수준이었고 그들이 폭도로 변할까봐 공포에 떨었다. 그렇다고 군주주의나 귀족주의에 빠진 것도 아니어서 도리어 그들을 경멸했다. 그는 피렌체를 사랑했으나, 후반생에는 그곳에 돌아갈 수 없었다.

    1529년 미켈란젤로는 공화국 축성 책임자로 일했다. 그러나 이듬해 공화국은 멸망한다. 대예술가란 이유로 침략자로부터 사면받은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묘소를 위한 조각에 매달렸다. 각각 남녀인 ‘저녁’과 ‘아침’, ‘낮’과 ‘밤’이다. ‘아침’은 젊은 여인의 나신상이다. 미켈란젤로는 여성상보다 남성상에 더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되나, 적어도 이것만은 예외다. 그 모습은 환희가 아니라 고통의 시작이다. 이어 노력과 인내를 상징한다는 두 남자 ‘낮’과 ‘저녁’, 그리고 마침내 시든 몸으로 잠든 노녀(老女)로 표현한 ‘밤’이 등장한다. 잠자는 그녀의 얼굴 또한 아픔과 고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있는 로렌초의 동상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원형이라 할 정도로 고뇌에 차있다. 메티치가 사람들이 실제 모습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불평하자 미켈란젤로는 “10년만 지나면 누가 알아보겠느냐”고 대답하곤 절망의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최후의 심판’을 그린다.

    ‘최후의 심판’은 예배당 제단 정면을 가득 채운 대형 벽화다. 높이 17m, 폭 13.3m다. 그 그림 앞에 처음 서면 먼저 엄청난 공포가 엄습한다. 전체적으로 푸른 배경에 색이 바래 검은 빛으로 변한 고통스런 모습의 수많은 인체들이 처절하게 뒤엉켜 있다. 최근 원래의 밝은 색조로 보수했음에도 느낌에는 큰 변화가 없다.

    약 500년 전에 그려진 그림은 세상이 혼란에 빠져있음을 보여준다. 예수 출현의 약속을 고대하는 자들의 고통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사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언제 어느 나라 사람이건 자신이 사는 세상이 어지럽고 바르게 살기 어렵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공포심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처음의 충격 뒤 다시 그림을 보면 지극히 조화로운 인체의 배열에 묘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내 자신이 그중 하나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두세 번 다시 찾다보면 어느새 차분한 마음으로 구석구석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선함이란 무엇인가

    그림은 전체적으로 가로 3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단은 예수와 마리아, 중단은 천사가 중심이고, 하단에는 지상의 인간들이 있다. 전체 구도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원형이다. 그림 왼쪽은 지상에서의 승천, 오른쪽은 지상으로의 낙하라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세상이 멸망할 때 예수가 부활해 인류를 구원한다는 기독교적 믿음의 핵심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소재라도 시대에 따라 그 표현방식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12세기까지의 중세 서유럽이나 9~15세기 비잔틴제국처럼 안정된 시대에는 예수가 재판관으로 중앙에 근엄한 얼굴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축복받은 영혼(선인)과 처벌된 영혼(악인)이 이분법적인 구도로 그려져 있다. 성모와 성요한이 양쪽의 변호역으로 그려지는 것 또한 일종의 공식이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결코 무섭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13~14세기 서유럽에서는 천국으로 가는 선인에 비해 지옥으로 떨어지는 악인의 모습을 과장되게 그렸다. 특히 지옥은 잔인한 고문과 학살이 난무하는 곳으로 무섭기 짝이 없다. 1305년경 지오토가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린 지옥은 그 전의 그림에 비해 매우 잔인하고 예수의 모습도 엄격함을 알 수 있다.

    12세기까지의 예수는 양팔을 같은 높이로 들고있어 구원과 처벌, 자비와 정의는 공평하다는 암시를 준다. 그러나 13~14세기에 들어서면 선인을 축복하는 오른팔은 높이 쳐들려 있고 악인을 처벌하는 왼팔은 낮추어 축복과 형벌을 명백하게 구분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지오토의 그림처럼 손을 손바닥 또는 손등으로 그려 악인은 손등으로 누르고 선인은 손바닥을 펴 축복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는 그러한 선악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선인과 악인, 성자와 사도, 상류인과 하류인, 천사와 악마 등이 전혀 구별 없이 그려져, 최후의 심판을 하는 법정다운 질서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인물은 모두 나체다. 예수도 마리아도 본래는 나체였다.

    예수 모습도 특이하다. 우선 축복과 심판의 팔이 뒤바뀌어 있다. 왼손은 쳐들고 오른손은 내린 모습이다. 이는 그림 전체의 구도와 연결된다. 즉 그림 왼쪽은 승천의 축복, 오른쪽은 추락의 처벌을 뜻한다. 한편으로 축복을 변호해야 할 성모 마리아는 그저 승천을 바라보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 구원의 성모라기보다는 심판에 떨면서도 그에 항의하는 여염집 아낙처럼 보인다. 더이상 ‘피에타’의 무표정한 성모가 아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예수의 심판 의지를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렇다고 예수의 얼굴이 무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타락하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내리고 있을 뿐이다.

    교회를 상징하는 베드로의 모습도 공포에 젖어있다. 이는 ‘천지창조’에서처럼 미켈란젤로가 당시 교회를 비판했음을 상징한다.

    참회하는 자에게 축복 있으라

    미켈란젤로가 이 그림을 그린 1541년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싸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보나롤라의 어린 사도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종교전쟁에 저항하며 교회의 결절이 아닌 통합과 화해를 모색하는 모임에 참여한다. 그 모임은 가톨릭의 내부 개혁을 도모하는 것으로, 젊어서부터 교황청에 반발해온 미켈란젤로는 이를 통해 ‘새로운 교회’, 나아가 ‘새로운 세계’를 추구한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사보나롤라를 극복했음을 암시한다.

    이 그림은 1536년에 시작해 5년 뒤인 1541년에야 끝이 났다. 화가 나이 61세에서 66세까지의 작품이다. 당시 그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그가 한 말이다.

    “나는 이제 예술을 나의 우상, 나의 왕으로 삼았던 고약한 상상들이 얼마나 심하게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전에는 덧없지만 달콤했던 사랑의 근심들은 내가 이중의 죽음으로 다가가는 이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연상한다. 톨스토이가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부정하고 신에 귀의했듯 미켈란젤로 역시 예술에 바친 삶을 부정하고 신에 귀의한다. 여기서 신이란 특정 종교가 아니다. 미켈란젤로 그림의 종교적 지향에 대해 흔히 절대신앙의 프로테스탄티즘인가, 본래적 가치추구의 가톨릭인가를 두고 논의하지만 그림 속에서 우린 더 이상 그런 종교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거다. 불교 신자든, 회교 신자든, 무신론자든,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상관없다. 인간은 누구나 참회하며 살게 마련 아닌가? 어떻게 완벽한 선인으로만 살 수 있겠나? 마찬가지로 극악한 자라도 참회는 한다. 그게 인간이다.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 그는 마침내 화해와 관용의 마음으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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