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노무현당’이냐 ‘박·정·이 신당’이냐

오리무중 8·8 재보선 정국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4-08-31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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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달아오르고 있다. 한나라당의 절대우세 전망 속에 민주당은 선거전을 시작하기 전부터 내분 조짐에 휩싸여 있다. 위기의 노무현과 그를 흔드는 비주류. 과연 민주당은 깨질까. 정계개편은 현실로 나타날까.
    광역단체장 11명(한나라당) 4명(민주당) 1명(자민련)기초단체장 140명(한나라당) 44명(민주당) 16명(자민련) 2명(민노당)시·도의회의원 467명(한나라당) 143명(민주당) 33명(자민련) 11명(민노당)정당 지지도 52.2%(한나라당) 28.9%(민주당) 6.7%(자민련) 8.1%(민노당)….

    6·13지방선거에서 여야 정당이 받아든 성적표다. 한나라당의 압승, 민주당의 참패, 자민련의 몰락, 민노당의 약진. 언론은 선거결과를 이렇게 압축해 묘사했다. 선거 결과에 민주당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한동안 당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진 듯 맥이 풀렸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의 참패는 정치권 전체에 격렬한 진동을 몰고 왔다. 당장 민주당이 심각한 내분상태에 빠졌다. 비주류들이 속속 목소리를 높이며 노후보와 주류를 압박하고 있다. 이인제(李仁濟) 의원·박상천(朴相千) 최고위원·정균환(鄭均桓) 총무 등이 잇따라 이원정부제 개헌론을 들고나왔고 이들의 목소리는 당 내보다 당 밖에서 더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입법기관인 국회의원들에게 개헌론은 ‘OX퀴즈’와 같다. 기권은 불가능하며 어느 쪽이든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야 한다. 이런 속성 탓에 개헌론은 정계개편을 요구하는 세력이 곧잘 활용하는 무기다.

    개헌론을 제기하는 측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국회의원들은 마음속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하고, 행동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개헌론이 정계개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민주당에서 개헌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의 주도로 정계개편을 이루고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린 얘기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비주류의 반격에 직면한 민주당 주류도 혼란에 빠져 있다.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계속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노무현 후보체제로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에서 시작한 민주당 내 논쟁이 마침내 ‘노무현 후보가 과연 민주당의 후보로 대선에 나설 수나 있을까’하는 우려로 옮겨가고 있다.

    민주당의 입장에서 난처한 것은 지금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8·8재보선에서도 민주당 패배, 한나라당 완승이란 결과를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 자체 여론조사에서도 호남을 제외한 전체 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의 지지도가 한나라당 후보보다 10%이상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관계자 누구를 만나봐도 8·8재보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이가 없다. 당직자들 사이에서는 “지금 분위기라면 히딩크 감독이 귀화해 서울 종로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도 당선이 불투명하다”는 자조적인 얘기도 나오고 있다. 8·8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이 참패한다면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한 현 민주당 주류의 입지는 크게 좁아질 전망이다. 후보교체론은 더욱 힘을 얻을 것이고 결국 민주당의 분열까지 예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8·8재보선 뒤 정계개편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 정치권 일각에서는 8·8재보선 뒤 일부 정치세력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돌출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 공개적으로 정계개편을 요구하는 정객들도 나타나고 있다. 21세기 첫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요동치고 있고 월드컵에 쏠려 지방선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던 국민들도 다시 정치권을 건너보기 시작했다.

    과연 8·8재보선 이후 정국은 어떻게 흘러갈까. 정계개편이 일어난다면 그 폭과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정계개편은 12월 대통령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정계개편 시나리오를 검색하기에 앞서 지난 10여 년간 한국 정치판을 뒤흔든 정계개편의 역사를 리뷰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의 지혜를 빌려올 수 있다는 격언은 정치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는 정계개편의 연대였다. 1980년대가 민주화 투쟁의 시대로 정치가 군부독재와 운동진영의 대결에 압도당했다면, 1990년대는 정치권이 여타 세력을 누르고 힘을 발휘한 연대였다. 1990년 이후 우리 정치권에는 크게 두 차례의 정계개편이 있었다.

    대선기획단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참모들이 써주는 원고나 발언요지를 거의 무시하던 노후보가 최근 들어 이를 적극 참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가 발생한 결정적 계기는 지난 12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있었던 ‘노무현맨’들의 비상회동. 떨어지는 노후보의 인기를 만회하고 위기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비상대책회의 성격의 이 모임에는 김원기 고문, 문희상 대선기획단장, 이강래 정세균 의원 등 기획단 멤버와 천정배 염동연 정무특보, 배기선 기조위원장 등 핵심멤버 12명이 참석했다. 문단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노후보는 곁에서 경청하는 식으로 진행된 회의는 낮부터 시작해 밤늦게까지 문을 걸어 잠근 채 계속됐다.

    회의의 결론은 “정면돌파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회의에서 노후보 진영은 8월 말까지는 대선을 위한 중앙선거대책위를 구성해 8·8재보선결과와 상관없이 늦어도 9월부터는 본격적 대선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8월 선대위구성’론은 8·8재보선 후 본격 제기될 것으로 보이는 후보교체론이나 제3후보론에 정면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이한동이든 정몽준이든 박근혜든 이인제든 누구든지 경선을 희망하면 기득권을 포기하고 재경선을 할 수 있다는 게 노후보의 변함없는 생각”이라며 “그러나 현실성도 고려하지 않은 채 당내 뒷전에 앉아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차라리 당을 떠나는 게 민주당을 돕는 길”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인사가 언급한 인물 가운데 이한동 전 국무총리는 조만간 민주당에 입당할 것으로 전망되는 인물. 이 전총리는 지난 11일 이임사에서 “꿈을 잃은 정치인은 정치인도 아니다. 나에게도 꿈이 있다”는 말로 자신의 정치행보를 시사한 바 있어 만약 그가 민주당에 입당한다면 노후보는 ‘제3후보론’에 적지 않게 시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 다른 회의 참석자는 토론 결과에서 나온 구체적 실천방안을 이렇게 정리했다.

    “솔직히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자는 얘기부터 했다. 7월4일 노후보가 청와대에 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했으나 청와대는 사실상 무시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방선거 결과는 어땠나? 전국적으로 우리 당은 견제권을 상실한 야당에 머물렀다. 그러나 많은 당직자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 과거 민주당이 야당이었을 때 보여줬던 저돌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공격을 할 계획이다. 청와대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비판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당원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솔직히 집권 이후 우리 당 당직자들이 단 한순간이라도 집권여당의 당직자라는 프리미엄을 누려본 적이 있는가? 더 이상 누릴 것도 잃을 것도 없다는 야당시절의 정신으로 돌아가 똘똘 뭉쳐 싸워보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우리부터 이 일에 앞장서기로 했다. 다행히도 한나라당이 최근 잇달아 실책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이명박 시장의 실책, 김무성 후보비서실장의 실언 등 우리가 득표할 만한 요인들은 적지 않다.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견제심리도 살아나고 있다. 잘만 활용하면 8·8재보선에서 예상 밖의 성적을 올릴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 8·8재보선 이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는 게 참석자들의 생각이었다.”

    이 인사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12일 이후 민주당의 달라진 모습은 여기저기서 확인되고 있다. 16일 발행된 민주당보는 전면에 이명박 서울시장의 아들과 히딩크 감독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실어 한나라당의 실책을 공격하고 나섰는데, 야당시절을 능가하는 강성 당보라는 게 민주당 주변의 평가다.

    비슷한 시기 민주당 수뇌부들의 태도도 돌변했다. 12일 한화갑 대표는 고위당직자회의에서 안기부자금 총선자금 유용사건, 국세청 동원 대선자금 모금사건, 이후보 아들 병역비리 은폐 의혹 사건, 최규선씨로부터 미화 20만달러 수수의혹 사건, 빌라 게이트 등을 ‘5대 의혹’ 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회에서 철저하게 조사, 준엄하게 추궁할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평소 말이 없던 유용태 사무총장까지도 “세풍아이디어를 내 실질적인 배후역할을 했던 석진철씨가 이회창 후보 캠프에 다시 합류했다. 검찰은 왜 석씨를 수사하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이 재보선에서 어떻게 한나라당과 싸울 것인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민주당 분위기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6·13의 패배를 만회할 정도는 아니다. 8·8재보선의 예상결과를 뒤집을 정도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게 자평이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는 주류 비주류를 떠나 “결과와 상관없이 일단 최선을 다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자세 변화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분석이다. 자칫 민주당 구성원 모두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그 첫번째 이유, 재·보궐선거에서 또다시 참패할 경우 책임추궁을 면하자는 게 두번째 이유인 듯하다. 민주당이 와해돼 분당을 하든 탈당을 하든, 최선을 다한 사람은 당당할 수 있고 명분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 시계는 8월8일을 향해 지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째깍 째깍…”

    첫번째는 1990년의 3당 합당이다. 민정·민주·공화 3당의 전격합당과 민자당의 창당은 태생이 다른 3개의 정치세력이 합당으로 덩치를 키우는 상향식 정계개편이었다. 민정당과 민주당·공화당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당과 신당창당에 동의했지만, 이질적인 세력간의 결합인 까닭에 곧 깨질 것으로 예상됐다. 실제 1991년 당내 대선후보 선출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치열해지면서 앞서의 예상이 적중하는 듯했다. 하지만 일반의 예상과 달리 민자당은 김영삼 총재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고 오늘날 한나라당으로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또 한 차례 기억할 만한 정계개편은 1995년 김대중씨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이다. 국민회의는 민주당이라는 거대 야당에서 DJ의 정치적 노선에 동의하는 일부세력이 탈당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방식으로 탄생했다. 국민회의는 그후 주변의 세력을 끌어안아 덩치를 키워갔고 마침내 지금의 집권 민주당으로까지 성장했다.

    1990년과 1995년의 정치적 격변을 거쳐 오늘날의 여야 정당구도의 기본골격이 갖추어졌다는 점에서 두 차례의 정계개편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눈길을 모으는 것은 두 차례 거대 정계개편의 중심에 김영삼과 김대중 두 김씨가 있다는 점이다. 1990년 3당 합당의 주인공은 김영삼씨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DJ의 평민당에도 밀려 3당으로 전락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자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논리로 3당 합당을 단행하게 된다.

    신생 민자당에서 소수파의 리더였던 YS는 그러나 치열한 내부 권력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1992년 민자당 대선후보로 출마, 대통령에 당선되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했던 군부독재세력과도 손을 잡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비난은 두고두고 YS를 괴롭혔다.

    1995년의 국민회의 창당은 더 극적이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뒤 DJ는 전격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1994년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사실상 정계에 복귀한 뒤, 이미 자신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시작한 민주당의 틀을 깨고 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하는 공세적 정계개편을 단행했다. 국민회의 창당 이후 치러진 1996년 15대 총선에서 DJ는 참패했지만 곧바로 재기, 1997년 대선에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통령에 당선됐다.

    DJ 역시 정계개편 직후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정치적 입신을 위해 은퇴 약속을 번복했을 뿐 아니라 멀쩡한 야당을 깨고 신당을 창당하는 무리수를 뒀다는 점에서 YS의 3당 합당에 버금가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두 김씨 외에 김종필 자민련총재 역시 정계개편이 한 축을 담당했지만 그의 역할은 앞서의 두 김씨에 비해 제한적이었다. JP는 1990년 3당 합당에 공화당을 이끌고 참여했고 1994년에는 민자당을 깨고나가 자민련을 창당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정계개편까지는 아니지만 1997년 DJ와 연대해 그의 대통령 당선을 돕는 결정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1990년 이후 3김씨 외에 정계개편다운 정계개편을 주도한 정치인은 없다. 3김씨가 선택하면 그를 따르는 많은 정치인들이 함께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정치권은 파란에 휩싸였다. 3김씨의 정치행태는 구악(舊惡)으로 비판받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정치판을 흔들 만한 힘을 갖춘 정치인은 없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0년대 정치판을 풍미한 3김은 아직 생존해 있고 그 가운데 한 사람 JP는 군소정당의 당수로 정치판 한가운데 머물고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이들 3김씨가 한국 정치판을 흔드는 사태가 발생하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DJ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면서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

    사실상 3김의 정치적 영향력이 사라진 가운데 정치권은 현재 대개편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3김 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으리라 보았던 정계개편이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포스트3김 시대 첫 정계개편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3김이 빠진 정계개편이기에 어쩌면 3김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의 판짜기가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만약 정계개편이 현실화된다면 DJ식 정계개편, 즉 뜻 맞는 사람들이 기존 정당을 이탈해 신당을 창당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후 일정기간을 거쳐 YS식 정계개편, 즉 흩어진 정치세력의 합당으로 시너지 효과를 올리는 정계개편을 단행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이 모두가 미래의 일, 불가측성은 정치권 인사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바로 그 정치권 대변혁의 출발점이 8·8재보선이 될 전망이다.

    노무현 후보에게 8·8재보선은 시련의 시험대가 될 것같다. 대선 주자로서 그가 어느 정도의 뚝심을 갖췄는지를 국민들 앞에 공개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고통스런 무대이기 때문이다. 13개 재·보궐선거구 가운데 만약 과반수에 가까운 선거구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는 당 안팎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군산과 광주북갑 등 호남지역 2곳을 제외하고는 안심할 수 없는 게 민주당의 처지다. 영남지역 3곳은 제외하더라도 수도권 7곳 가운데 적어도 3곳 이상에서 승리해야 체면치레를 할 수 있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1990년과 1995년, 김영삼 김대중 두 김씨가 주도한 정계개편에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는 한결같이 두 김씨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3당 합당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이던 노후보는 공식석상에서 YS에게 항의하며 저항했고, 끝내 합당을 거부한 채 ‘꼬마민주당’을 사수했다.

    1995년 DJ가 단행한 또 한 차례 정계개편에서도 노후보는 DJ의 국민회의를 거부한 채 다시 한번 ‘꼬마민주당’깃발을 지켜야 했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라는 정치결사로 당랑거철(螳螂拒轍), 힘겨운 싸움을 벌인 끝에 1997년 국민회의에 입당했지만 노후보의 1990년대는 두 김씨가 만들어놓은 정치지형에 순순히 적응하지 않는 반항의 세월이었다.

    두 김씨가 만든 변화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노후보에게 1990년대는 가혹한 시기였다. YS를 따라 민자당으로 가기를 거부한 직후에 치러진 1992년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서 낙선했다. 1995년 부산시장선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해 다시 낙선한 뒤, 이듬해인 1996년 DJ의 국민회의에 따라나서지 않고 민주당 깃발을 사수한 채 종로에서 총선에 나섰다가 또 떨어졌다. 1998년 보궐선거때 종로에서 당선돼 반짝 기쁨을 누렸으나 2000년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구에서 출마했다가 다시 낙선했다.

    노후보는 두 김씨의 정계개편에 맞서 통합의 기치 아래 독자노선을 고집하다 실패만 되풀이한 정치이력을 갖고 있지만, 두 김씨 주도의 정계개편의 최대 피해자이면서 한편으로는 이를 기반으로 지금의 민주당 대선후보에까지 오른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제 노후보는 정치적 피해만 안겨줬던 정계개편이라는 큰 파도 앞에 다시 맞서려 하고 있다. 과연 이번에는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결과물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인가. 불가피한 정계개편의 상황에서 노후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적극적인 공격과 철벽 같은 방어. 노후보 주변에서는 6·13참패 이후 어떤 전략으로 위기를 돌파할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후보 진영에서는 먼저 공격전술을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월초 노후보 진영의 젊은 참모진들 사이에 “이렇게 속절없이 당할 수만은 없다. 정면돌파를 시도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노후보의 한 측근인사는 “오래 전부터 노후보와 함께해온 젊은 참모들 사이에 더 이상 노후보에 비협조적인 당내 비주류 때문에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사건건 제동이 걸리는 상황에서 노무현다운 정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이 참모의 전언.

    “노후보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작이 어색해집니다.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고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 순간을 못 견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후보에게 반대파도 포용하라고 주문하지만 내가 아는 한 노후보는 태생적으로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할 줄 모르는 것을 억지로 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노후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후보와 뜻이 맞는 사람들과 정열적으로 일하게 하는 것, 그것이 노후보의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길이라는 얘기가 젊은 참모들 사이에 오고 갔습니다.”

    그 무렵, 노후보의 참모진에서는 민주당의 세력분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주당을 현역의원 중심으로 크게 6개 세력으로 분류했는데 이들 가운데 70%는 노후보의 개혁노선에 동의할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노후보 참모들이 분류한 6대 세력이란 이렇다. 노후보와 정서적으로 일치하는 개혁파가 첫번째 그룹. 재야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당에 입당한 인사들이 이에 분류되는데, 김근태 임채정 장영달 이재정 김태홍 임종석 의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

    두번째 세력은 쇄신파라 분류되는 당내 전문가 그룹이다. 신기남 추미애 정동채 천정배 박인상 송영길 김성호 정범구 의원 등 권노갑 고문의 동교동 구파와 대립하면서 민주당의 쇄신운동을 이끌었던 초재선 의원들이 그들.

    세번째, 그룹은 한화갑 대표의 측근 의원들로 이른바 동교동 신파로 분류되던 의원들이다. 한대표 외에 문희상 설훈 조성준 배기선 김성순 박병윤 의원 등이 그들이다.

    이들 3대 그룹의 어느 쪽이라고 딱히 말할 수 없지만 김원길 박상규 이강래 의원 등 당의 아이디어맨들도 노후보와 정서적으로 통하는 그룹으로 분류된다.

    비주류도 크게 3대 세력으로 분류했다고 하는데 첫번째 그룹이 이인제 의원과 가까운 충청·중부지역 출신 의원들이다. 충청권의 박병석 송석찬 홍재형 송영진 의원과 수도권의 안동선 원유철 이근진 이희규 의원, 강원도의 이용삼 의원 등 10여 명이다.

    두번째 그룹은 동교동 구파로 분류되는 의원들로 권노갑 전 최고위원과 가까운 정치인들이다. 김태랑 최고위원과 김옥두 이훈평 조재환 김방림 의원 등이다.

    세번째 그룹은 정균환 원내총무가 이끄는 중도개혁포럼의 핵심 의원들이다. 물론 중도개혁포럼은 특정 정파의 모임이 아니다보니 개혁파와 쇄신파를 제외한 다양한 계파의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색깔은 동교동계 구파에 가깝고 정치성향도 중도 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의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노후보 참모진에서는 이들 비주류 의원들이 전체의 30%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계산을 근거로 노후보의 일부 측근들은 “국민적 지지를 잃은 민주당을 탈당해 명실상부하게 노무현 후보의 지도력이 통하는 개혁신당을 건설하자”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시도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노후보의 핵심 참모인 김원기 정치고문과 문희상 의원 등이 극력 반대했다는 후문이다. 이들은 “신당창당이란 후보의 지지율이 50%이상일 때나 가능한 시나리오다.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따라나서겠느냐”며 신당창당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고 한다.

    민주당 대선기획단의 한 인사는 “누구보다도 노후보 본인이 신당창당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국민경선으로 당선됐음에도 자신을 당선시켜준 정당을 뛰쳐나가 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겠는가”라며 “일부 참모들이 도상(圖上)연습 수준으로 그런 시나리오를 그렸지만 곧 수그러 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노후보의 한 측근도 “노무현 신당이라는 표현은 외부에 지나치게 확대포장 돼 알려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민주당 내부에서 ‘노무현식 신당’, 즉 노후보의 단일지도체제가 확고하게 통하는 민주당으로 체질을 변화시키자는 주장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노무현식 신당’ 역시 실행단계에서부터 당내 반발에 부딪혀 어려움에 직면하고 말았다.

    앞서의 측근은 “노후보도 주변으로부터 당을 확고하게 장악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태’라고 해야 옳다. 민주당은 당권과 대권이 분리돼 있는 수평적 리더십의 정당이다. 노후보도 여러 차례 당이 수평적 리더십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노후보더러 당을 장악하라는 것은 스스로 말한 원칙을 깨라는 말이라고 노후보는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노후보는 소신에 따라 민주당 장악에 나서지 않고 있으며, 설령 노후보가 그럴 생각을 가진다 해도 현실적으로 당의 구조가 이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노후보 본인도 “나더러 나무에 올라가라고 하는데 밑에서 흔드는 사람이 없어야 올라갈 것 아니냐”는 우회적인 말로 불만을 나타낸 바 있다.

    노후보는 8·8재보선에서 그의 스타일에 맞는 후보를 공천하지 못한 것에도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측근은 “광명의 남궁진, 영등포을의 장기표, 금천의 김중권 등 그나마 민주당이 해볼 만하다는 선거구의 공천 대상자들의 면면을 보라. 과연 그들에게서 노무현 후보의 색깔을 찾아볼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남궁진 전 장관은 누가 뭐래도 DJ의 최측근인사로 DJ와 차별화를 시도하려는 노후보의 구상과 정면으로 부닥치는 인물.

    장기표에 대해서는 노후보가 직접 공천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끝내 공천되고 말았다. 김중권 전 민주당대표의 금천구 후보 추대도 개혁을 표방하는 노후보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결정이라는 것.

    재보선 후보 공천에 대해 노후보의 불만은 극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후보 주변에서는 “8·8재보선 결과는 노후보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노후보의 의견이 공천과정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는 논리다.

    하지만 당내 비주류는 8·8재보선 결과를 놓고 노후보에게 책임을 물을 태세다. 지방선거 참패에 이어 8·8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이 의미있는 결과를 내지 못할 경우 노무현 후보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후보측은 “8·8재보선 결과에 책임을 묻기에 앞서 그만한 권한을 준 적이 있느냐”는 말로 반발하고 있다.

    이런 양측의 시각 차이는 재보선이 끝나면 곧바로 대충돌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13곳 재보궐선거구 중 적어도 절반 이상에서 승리를 거두지 않는 한, 노무현 후보의 거취를 놓고 민주당은 내분사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앵글을 반대로 돌려 노무현 후보의 주류와 맞서 있는 민주당 비주류 진영의 현재 분위기를 탐색해보자. 노무현 후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민주당 내 그룹은 크게 3곳이다. 앞서 노후보측 참모들이 분석한 비주류의 성향과도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3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인제 의원과 박상천 최고위원, 그리고 정균환 원내총무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지난 6월말부터 이원정부제(이인제)와 분권형 대통령제(박상천·정균환)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박상천 최고위원과 정균환 총무의 개헌론과 이인제 의원의 개헌론은 내용은 비슷하지만 그 배경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의원측이 노후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기저에 깔고 있는 반면, 박최고위원과 정총무의 비판은 아직까지는 당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공세의 성격이 짙다.

    이인제 진영은 여차하면 개헌론을 매개로 적극적인 정계개편에 나설 태세지만 나머지 두 사람에게선 그런 결기를 느낄 수 없다. 세 사람 모두 ‘비노무현’에 공감하지만 구체적 실행방안에서는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정서의 차이 때문에 정가에서는 8·8재보선이 끝나면 이들 가운데 이인제 의원이 가장 먼저 행동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6·13지방선거 직후 민주당 일각에서는 노무현 후보체제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의원들이 탈당을 결행한 뒤 자민련 등과 힘을 모아 신당창당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D데이는 처음에는 7월 말이었다가 곧 8·8재보선 직후로 연기됐다는 후문이다. 아울러 그와 같은 ‘거사’를 일으킬 만한 인물로 서슴없이 이인제 의원을 거명하고 있다. 최근 이고문이 제안한 이원정부제 개헌론은 거사를 앞둔 일종의 ‘선전포고’라는 관측도 나돌고 있다.

    정가의 한 소식통은 “구체적으로 민주당의 충청권 의원들과 수도권 및 강원도의 친IJ계 의원 4~5명 등 15명 정도의 의원들이 8·8재보선 직후 탈당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이의원은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로부터 이미 자민련 의원들을 위임받은 상태인 것으로 안다. 김총재도 자민련 의원들에게 이의원에게 충청권 맹주의 자리를 넘겨준다는 뜻을 전달했으며 자민련에서는 L의원과 또 다른 L의원 등 2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김종필 총재의 뜻에 동의하고 사실상 이인제 의원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실제 민주당의 IJ계가 탈당당해 당을 만든다면 25~30석 가까운 현역의원을 확보하고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인사는 “신당창당을 통한 정계개편 구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인제 계보 의원과 자민련 의원들만으로는 중부권 신당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전국 정당으로 외연을 넓히기 위한 2차 정계개편도 계획돼 있다”고 전했다.

    2차 정계개편이란 동교동계 구파 등 민주당 내 보수성향의 의원들을 추가로 영입함과 아울러 영남 출신인 박근혜 의원의 한국미래연합과 합당한 뒤 정몽준 의원과도 힘을 모아 명실상부한 전국정당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한나라당의 영남 출신 의원들도 영입해 신당의 구심력을 높인다는 전략도 포함돼 있다.

    이와관련, 주목해볼만한 움직임이 있다. 지난 16일 수뢰혐의로 구속중인 권노갑씨가 측근을 통해 민주당 탈당의사를 밝혔다. 권씨의 탈당소식에 정가는 촉각을 곤두 세우며 그 파장을 저울질하고 있다. 만약 권씨가 탈당후 특정 정파의 손을 들어줄 경우 정계개편에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 있다. 권씨의 선택을 눈치챘는지 지방선거 이후 한화갑 대표를 포함한 민주당 주류측 인사들이 대거 권씨를 면회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고 한다.

    이런 연대구상이 실제 어디까지 현실로 나타날지는 미지수이지만 정가에서는 IJ계와 자민련 의원들이 힘을 모으는 1차 정계개편을 향한 물밑작업은 상당수준 진행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 이인제 의원은 지방선거를 전후해서 꾸준히 자민련 의원을 만나고 의기투합의 과정을 밟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근혜 의원과 정몽준 의원까지 포함하는 큰 틀의 신당은 아직까지는 구상단계인 것으로 보인다. 박의원과 정의원 두 사람은 대권도전을 꿈꾸는 잠재주자들로, 이인제 의원과 한 배를 타기 위해서는 치열한 좌석배정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이 작업이 쉽지 않아 보인다. 다들 만만치 않은 대중적 지지도를 갖춘 대선주자들인 까닭에 누구를 대선주자로 내세우고 누가 당대표나 선대위원장을 맡을지 교통정리하기도 여간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사정과 무관하게 정치권의 또다른 쪽에서는 이른바 반(反)이회창 연대, 즉 ‘반창연대’라는 명분을 앞세워 이인제 박근혜 정몽준 세 사람을 한데 묶는 대연정을 꿈꾸는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권력의 향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민감한 후각을 가졌다는 김윤환 민국당 대표다.

    김윤환 대표는 정치권 외곽에 있으면서도 그동안 꾸준히 반창연대의 가능성을 검토해온 인물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그 측근들에게 떠밀려 공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김대표는 기회만 있으면 이후보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고 자신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반창연대는 바로 그가 꿈꾸는 권토중래(捲土重來)의 디딤돌인 셈이다.

    김대표의 초기 반창연대의 밑그림에는 박근혜 의원이 중심에 있다. 지난 2월말 박의원이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왔을 때 김대표는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그를 영남후보로 내세워 반이회창 세력이 결집하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후 돌연 등장한 노풍 앞에 김대표는 ‘노무현 중심의 영남신당론’으로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하지만 노풍이 예상 밖으로 빨리 수그러들자 그는 이 또한 자신의 단견(短見)임을 인정하고 숙고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던 지난 7월5일 이인제 의원이 개헌론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서자 김대표도 즉각 이에 화답했다.

    “모든 정파가 개헌논의를 활발하게 벌여야 한다. … 대선 전 개헌이 안된다면 대선 과정에서 개헌세력이 단결해 대선 후에라도 개헌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개헌논의 등 정계개편의 요인이 있는 제반문제와 관련해 관계 인사들이 금명간 자리를 같이해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개헌론에 뜻을 같이하는 정파들은 일단 단결해 세력을 형성하라는 것, 그리고 대선에 단일 연대로 참여하라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의 한나라당과 노무현 후보의 민주당 주류만이 개헌에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이라면 결국 이인제 박근혜 정몽준 의원 등과 JP의 자민련이 연대의 기본 구성멤버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던 셈이다.

    김대표의 의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최근 그는 사석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신당을 만들어 정몽준 의원이 대권주자로 나서고 이인제 의원이 당권을 맡으면 파괴력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박근혜 의원은 정의원과 대선주자 자리를 놓고 겨뤄야 하겠지만 정의원이 대선주자를, 박의원이 선대본부장을 맡는 것이 현재로는 좋은 모양이 될 것이다.”

    김대표는 만약 “세 사람이 힘을 모아 신당창당에 나선다면 2000명 이상의 발기인을 모을 수 있고 발기위원장으로는 총리를 지낸 거물급을 데려올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내다봤다.

    김대표가 꿈꾸는 반창연대가 실현되려면 넘어야 할 고비가 너무나 많다. 반창연대 정계개편의 피해자가 될지 모를 이회창 후보의 한나라당이 수수방관할 리가 없고, 자신을 소외시키는 정계개편에 노무현 후보 또한 그냥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나라당과 이후보는 말 그대로 ‘부자 몸조심’하며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자칫 악재의 기미가 보이는 사건이 터지면 틀어막기에 분주하다.

    노무현 후보도 최근 들어 자신의 스타일에까지 손을 대가며 사태예방에 나서고 있다. 토론을 즐기는 정치인으로 알려진 노후보가 최근 주요 현안들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변화의 모습이다. 기자들의 질문에 자신의 입장을 거침없이 밝혔던 것과는 달리 “모르겠다”는 말부터 꺼낸다. 노후보는 또 공개석상에서 “괜히 여러가지 얘기를 하게 되는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 출연 일정을 잡지 말라”고 공보팀에 지시하는 등 자신이 ‘말조심’에 상당히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 측근인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그의 손에서 일정수첩을 빼앗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대선후보가 되기 전까지 자기 뜻대로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던 노후보를 정해진 틀 속에서 움직이도록 하려면 DJ에 못지않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노무현 스타일을 고치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력의 성과물이 드러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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