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검찰, 법무부와 김대웅 고검장 징계 사전조율했다

‘검찰 게이트’ 막전막후

  • 이상록 <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 myzodan@donga.com

    입력2004-09-01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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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찰이 또 한번 권력의 풍향을 좇은 ‘갈대’였음이 드러났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광주고검장은 그 갈대의 ‘뿌리’였다. 법과 정의 대신 정실과 청탁을 앞세운 일부 검사들로 인해 검찰 내부엔 자괴감이 팽배해 있다. 검찰은 역대 정권에서부터 이어져온 정검(政檢) 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광주고검장을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 등으로 오늘중 불구속 기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7월11일 오전11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7층에 자리한 기자 브리핑실. 대검 중앙수사부 박만 수사기획관이 수사 브리핑을 듣기 위해 모여 앉은 기자들을 향해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한 수사기밀을 누설할 때 두 사람이 같이 있었습니까?” “신 전 총장이 검찰수사와 관련해 압력을 행사한 직권남용 혐의도 적용됐습니까?”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기획관은 하나씩 차분히 답변해나갔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검찰조직 전체를 뒤흔들고 지나간 커다란 파도가 조금씩 잦아드는 순간이었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전국 검찰을 총지휘하는 검찰총장 자리에 있었던 신승남 전 총장. 대검 강력부장과 중수부장·서울지검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던 김대웅 고검장. 현 정부 들어 검찰내 최고 ‘실세’로 꼽혔던 전·현직 고위 간부 두 명의 불명예스런 ‘추락’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명재 검찰총장도 이날 신 전 총장과 김고검장에 대한 기소를 끝으로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했다. 검찰의 추락한 위상을 또다시 국민들에게 보여줘 큰 실망감을 안겨준 점과 스스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 검찰조직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 새 지휘부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게 용퇴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총장의 사표는 즉각 반려됐다. 뒤늦게 총장의 사의 표명 사실을 안 대검 간부들은 총장실로 몰려가 “검찰조직을 위해 남아달라”고 만류했고, 이총장은 결국 사퇴의 뜻을 접었다.

    같은 날, 과천 정부종합청사에 위치한 법무부의 분위기도 뒤숭숭하긴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이날 발표한 개각 명단에 ‘예정대로’ 송정호 법무부장관의 이름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송장관의 교체는 7월 초순 검찰수사에 대한 청와대 압력설이 불거지면서 기정사실화됐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에 대한 검찰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4월 이후 청와대 관계자들이 송 장관에게 수십번 전화를 걸어 홍업씨의 선처를 부탁했다는 게 청와대 압력설의 요지다.

    하지만 송장관이 이를 거절한 뒤 홍업씨는 구속됐고, 곧바로 ‘장관의 조직 장악력과 업무 추진력에 문제가 있다’는 말과 함께 경질론이 흘러나왔다.

    이같은 압력설이 불거지자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며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법무부의 분위기는 달랐다. 일부 간부들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원칙과 정도(正道)에 따라 검찰이 수사하고 법무부가 중립을 지킨 게 뭐가 문제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 송장관의 퇴임식은 오후3시 법무부 2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했다.

    “…권력자나 그 주변을 관리하고 처벌하는 일은 검찰의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근래 검찰이 보여준 엄정한 수사에 대하여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 수사는 국가의 미래와 정의를 위하여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지금 법무부와 검찰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이란 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검찰은 옳고 바른 길을 내줄 수는 없습니다….”

    검찰은 한국 최고의 ‘파워 엘리트’ 집단 중 하나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상명하복’의 원칙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런 검찰의 ‘움직임’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 때문일까. 검찰 인사 및 수사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잡음의 근원엔 언제나 검찰 독립과 중립성의 문제가 놓여있다. 특히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둘러싼 논란은 건국 이후 어느 특정 시기를 가릴 것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정권과 검찰은 어떤 관계인가. ‘권력의 시녀’ ‘정치 검찰’이란 오명(汚名)으로부터 검찰은 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번에 검찰이 공개한 신승남 전 총장과 김대웅 고검장의 공소사실에는 수십년간 계속돼온 정권과 검찰간 ‘악연(惡緣)의 고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김고검장은 지난해 11월 초순 이수동 당시 아태평화재단 상임이사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대검에서 곧 도승희씨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텐데 형님은 걱정되는 부분이 없소?”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곁에 있던 신 전 총장이 전화를 이어받는다.

    “도씨가 이용호씨 회사에서 돈을 가지고 간 것으로 돼 있는데, 앞으로 특검이 예상되어 조사를 철저히 해야할 것 같은데 정말 괜찮지요?”

    검찰총장과 서울지검장이란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던 두 검찰 고위간부와 자타가 공인하는 현직 대통령의 ‘영원한 집사’ 간에 이뤄진 전화통화는 이런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이수동씨는 1967년 야당 정치인이던 김대통령과 첫 인연을 맺는다.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1980년대 김대통령의 미국 망명시절 후원회 일을 도왔다. 그러고는 85년 귀국해 김대통령의 집사 역할을 맡아왔다. 그는 김대통령과 그 가족들의 사적인 일을 도맡아 처리했으며 홍업씨와 함께 아태재단 운영까지 책임져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론에 자신의 존재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아 더욱 김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최측근 인사다.

    이수동씨와 두 검찰 고위 간부 사이에 전화통화가 이뤄진 당시는 지앤지(G&G) 그룹 회장 이용호씨의 횡령 및 주가조작 등에 대한 대검 중수부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바로 그 시기였다. 더욱이 같은 해 9월초 이용호씨를 구속한 대검 중수부 수사팀이 수사 착수 한 달 보름여 만에 도씨가 이용호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아간 사실을 포착, 내사에 들어가면서 도씨에 대한 내사 착수 계획 및 조사결과를 신 전 총장에게 보고한 직후이기도 했다. 게다가 도씨는 G&G 계열사인 인터피온의 사외이사로, 이용호씨에게 이수동씨를 소개시켜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무튼 이후에도 신 전 총장과 김고검장은 이수동씨와 수차례 통화를 하며 도씨에 대한 검찰의 조사 방침과 조사 결과를 알려주며 직무상 취득한 ‘공무상 비밀’을 누설했다는 게 검찰이 내놓은 수사결과다.

    검찰과 ‘예상 피의자’ 간의 정보교환 때문이었을까. 검찰은 지난해 11월 도승희씨에 대한 조사에서 이렇다 할 수사결과를 내놓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감춰진 진실은 ‘이용호 게이트’ 재수사를 맡은 차정일 특별검사팀의 눈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이용호씨의 방대한 자금 흐름을 계좌추적을 통해 샅샅이 뒤지던 특검팀의 수사망에 이용호씨의 돈 5000만원이 이수동씨에게 흘러들어간 단서가 포착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월27일. 이수동씨는 1999년 10∼12월 이용호씨에게서 “KEP전자와 인터피온 등 계열사의 주가조작에 대한 금융감독원 조사를 무마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뒤 2000년 3월 사례금 명목으로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특검팀에 의해 구속됐다.

    며칠 뒤 이수동씨의 혐의 입증을 위해 수사에 박차를 가하던 특검팀은 이씨로부터 “지난해 11월 대검내 잘 아는 간부가 도승희씨에 대한 수사계획을 미리 알려줬다”는 뜻밖의 진술을 듣게 된다. 이는 결국 검찰의 도덕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파문의 진원이 됐다.

    이씨에 대한 수사를 맡았던 특검 관계자는 “이수동씨가 별 생각 없이 얘기를 해놓고 나중에 땅을 치면서 후회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대검에 조사받으러 갔던 도승희씨가 이용호씨에게서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썼다”는 허위 진술로 일관하고, 같은 시기 이수동씨는 미국에 다녀오는 등 사전에 수사에 대비한 냄새가 짙어 이수동씨를 집중추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검찰 간부 얘기가 나온 겁니다. 당시 이수동씨는 이용호씨에게서 받은 5000만원과 관련해 도씨 등 관련자들과 입을 맞춘 사실이 모두 드러난 때여서 자신이 한 말을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던 겁니다.”

    특검과 대검의 수사를 거치면서 이수동씨의 ‘위치’와 ‘역할’은 더욱 뚜렷이, 그리고 광범위하게 드러났다. 이씨는 1999년 3월 해군 정기 인사를 앞두고 이수용 당시 해군 작전사령관에게서 두 차례에 걸쳐 총장 승진 청탁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수용씨는 이수동씨에게 ‘해군참모총장 관리방안’이란 문건까지 직접 만들어 건네면서 자신이 총장 적임자라고 주장했고, 결국 해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금품이 오고간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수동씨가 홍업씨의 각종 이권개입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사실도 속속 밝혀졌다. 이씨는 홍업씨가 삼보판지의 모범 납세자 선정 청탁과 미스터 피자의 특별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안정남 전 국세청장을 홍업씨측에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이수동씨는 청탁을 성사시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씨에 대한 수사 결과는 “정권교체 직후부터 이수동씨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말이 결코 헛소문이 아니었음을 그대로 확인시켜준 셈이 됐다.

    신승남 전 총장에 대한 공소장에는 권력 핵심부의 또 다른 최측근 인사가 등장한다. 바로 홍업씨의 고교 동창인 김성환 전 서울음악방송 회장이다.

    그는 홍업씨를 배경으로 각종 이권과 청탁에 개입한 혐의로 5월2일 구속됐다. 김성환씨는 홍업씨의 대학 동기인 유진걸씨, 대학 후배인 이거성씨 등과 함께 홍업씨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김씨는 홍업씨의 주요 일정을 직접 챙기는 ‘비서실장’ 겸 ‘집사’ 역할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각종 이권 청탁이 들어오면 홍업씨에게 보고한 뒤 관계기관에 청탁해 처리하고, 그 대가로 금품을 챙기는 것이 그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검찰수사에서 드러난 김씨의 이권 개입은 검찰수사 무마 및 선처 청탁과 군부대 공사 수주를 비롯해 국세청 감세 청탁, 신용보증서 발급 청탁 등 전방위에 걸쳐 있다. 김씨는 1998년 7월 수원지검에서 수사중이던 만덕주택의 용인시장 뇌물공여 사건과 관련해서는 선처 청탁을 받고 직접 수사 관계자를 두 차례나 찾아가 홍업씨의 친구임을 과시하며 선처를 부탁한 것으로 드러났다.

    따지고 보면, 신 전 총장과 김씨의 관계도 결국 ‘청탁’으로 연결된 것이다. 신 전 총장은 대검 차장으로 있던 지난해 1월, 당시 1200억원대의 무역금융사기 혐의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를 피해 해외로 도피중이던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의 불구속 수사를 부탁하는 김씨의 전화를 받았다. 신 전 총장은 사건 내용을 알아본 뒤 “들어와도 되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검찰은 밝힌 바 있다.

    신 전 총장은 같은 해 5월에도 울산지검이 내사중이던 평창종합건설의 뇌물공여 사건에 대해 김씨의 선처 부탁을 받고 수사 지휘계통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는 사람의 부탁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 회사에 대하여 잘 되도록 해달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대답이 없자 신 전 총장은 다시 “내사를 빨리 종결하라”는 취지의 독촉을 했고, 사건은 결국 ‘범죄 혐의 없음’으로 종결처분됐다. 검찰은 신 전 총장의 이런 행동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검 수사팀은 신 전 총장과 김고검장에 대한 형사처벌을 결정하기까지 검찰 안팎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수사가 좀 지연된다 싶으면 “제 식구 봐주기 아니냐”는 외부의 비난이 빗발쳤다. 혐의 입증을 위한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되면 “물증도 없이 몰아세우는 것 아니냐” “특정세력 죽이기다” 등 검찰 내부의 반발과도 맞딱뜨려야 했다.

    이렇게 ‘제 식구’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검찰은 “고통스럽다” “수사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푸념을 자주 했다. 축소수사 의혹이 제기된 검찰수사를 담당했던 수사 관계자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조사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조사를 받기 위해 7월초 대검에 소환된 한 고위 간부는 자신을 수사할 후배 검사와 “왜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얼굴을 맞대야 하느냐”며 새벽녘까지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검 중수부 박만 수사기획관도 지난 6월25일 “(그들이) 마침 그때,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탓할 수밖에 없다”며 검사가 검사를 조사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탓하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직인 김대웅 고검장에 대해 검찰이 기소 하루 전인 7월10일 법무부에 징계를 청구한 것은 고육책(苦肉策)이었다고 한다. 법무부는 이날 검찰의 징계 청구가 있은 직후 징계위원회를 열어 김고검장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징계 청구가 있기 전 법무부와 검찰은 징계 문제를 사전에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의 한 고위 간부는 “현직 고검장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그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서둘러 김고검장의 직무를 정지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김고검장에 대한 징계 청구는 실제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 검찰의 기소가 있기 전 직무를 정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자진 사퇴를 거부하는 김고검장이 기소된 상태에서 검찰 업무를 계속 보는 일을 차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다음날 검찰이 김고검장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징계 절차는 대법원의 확정판결 때까지 일단 정지된 상태다.

    신 전 총장과 김고검장에 대한 형사처벌을 바라보는 법조계 인사들은 난마(亂麻)처럼 얽혀있는 권력과 검찰의 공생관계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전·현직 검찰 고위 간부와 권력 핵심부의 측근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얽히고설켜 있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도 없이 검찰권 독립과 중립성 확보를 외쳐왔던 우리 검찰의 현 주소가 과연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지 개탄스럽다”고도 했다.

    서울지검의 한 중견 검사는 “검찰 고위층을 통한 수사 청탁과 이에 따른 수사 왜곡, 외부 청탁을 받은 간부들의 수사상황 문의는 이미 오래된 관행이었다는 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서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될지 걱정이 앞선다”고 털어놓았다. 대검의 한 간부도 “전·현직 검찰 고위 간부에 대한 이번 수사는 검찰이 숨길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던 것”이라면서 “검찰의 고질적인 환부(患部)를 정면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선 검사들은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뭐라 말하고 싶지도 않다”며 입을 닫는 분위기다.

    법조계 인사들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는 ‘주범’으로 지역편중 인사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정 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검찰 수뇌부는 공안·특수·기획 등 주요 보직을 자연스럽게 특정 지역 인사들로 채울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 인사도 그렇게 이뤄져왔다는 것이다.

    권력자가 검찰 수뇌부 인사를 결정하고, 이렇게 결정된 검찰 수뇌부를 향해 일선 검사들이 ‘상명하복’하도록 돼 있는 현재의 검찰시스템에서 지역편중 인사는 곧 정치적 편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정권교체 직후인 1998년 3월3일의 일이다. 당시 박상천 법무부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검찰 인사의 정상화’를 내세웠다. 그는 “인권이 숨쉬고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를 구현하려면 우선 검찰 인사가 정상화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앞으로 검사들은 절대 인사 청탁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같은 달 19일 단행된 검사장급 인사는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인사에서 문민정부 시절 출세가도를 달렸던 PK(부산·경남)나 K1(경기고) 출신은 검찰내 핵심 요직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대신 TK(대구·경북)와 MK(목포·광주) 출신들이 빈 자리를 메웠다.

    2000년 9∼12월 동아일보 법조팀이 컴퓨터 데이터베이스로 분석한 ‘검찰의 지역편중 인사 실태’ 조사에 따르면, PK 전성기인 1997년 3월 PK 검사들은 기획·공안·특수 등 분야별 검찰 요직으로 분류된 46개 자리 가운데 37%인 17개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MK 출신 검사들은 7%인 3개의 요직만 차지했을 뿐이었다.

    당시 조사에서 법무부 검찰국장과 검찰 1∼4과장, 대검 공안 및 중수부의 기획관과 1∼3과장, 서울지검의 검사장과 1∼3차장 및 특수 공안 형사부장, 재경 지청장, 부산·수원·인천지검의 특수 공안부장, 여주 등 주요 5개 지청장 등이 요직에 포함됐다.

    그러나 1998년 3월 인사 직후 MK 출신 검사의 요직 비율은 23%로 늘었고, PK 검사들은 8%로 줄었다. TK 출신 검사들의 경우 TK정권이 오래 지속돼온 데다 검사 수가 많은 탓인지 현 정권 들어 상대적으로 급격한 자리 이동이나 세력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현 정권에서 ‘정치검찰’ 논란을 처음 불러온 것은 1999년 1월27일 불거진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의 항명파동이다. 그는 이날 오후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자청, ‘국민 앞에 사죄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읽어내려갔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비난은 근본적으로 과거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검찰의 업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검찰 수뇌부와 정치검사가 수많은 시국 사건과 정치인 사건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정치적으로 처리해 국민이 검찰을 정치권력의 시녀로 인식해왔기 때문입니다. 검찰총장과 수뇌부는 후배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무조건 사퇴해야 합니다…YS정부와 김현철씨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자리에 오른 검찰총장과 수뇌부는 정권 교체 이후에도 권력에 맹종해 자리를 보존하고 다음 총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검찰조직의 기초를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같은 폭탄선언은 검찰조직을 한바탕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폭탄선언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종기 변호사의 수임비리 사건이었다. 검찰 수뇌부가 이변호사로부터 떡값과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이른바 ‘이종기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검사들에게 사표를 요구하면서 불만이 노골적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 사건을 계기로 강도 높은 법조개혁을 요구하자 검찰 수뇌부가 이에 맞춰 후배 검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반발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김영삼 정권때 임명돼 기반이 약한 김태정 검찰총장이 ‘무리하게’ 일을 처리하려 한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이 곪아터진 것이 항명파동의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좀더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심고검장 파문은 수십년간 쌓여왔던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가 일순간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당시 법조인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정치검찰을 둘러싼 논란은 그 이전에도 끊이지 않았다. 문민정부 시절 12·12 사건과 5·18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는 정치검찰 시비를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다.

    정권 초기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연루된 이들 사건에 대해 12·12 사건 관련자들에게는 기소유예 처분을, 5·18 수사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란 논리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로 이들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나선 검찰은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의 수괴로 처벌했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 이어 1996년 4·11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 부속실 장학로 비서관의 비리가 터진 직후 검찰이 야당의 공천헌금 수사에 착수한 것도 다시 한번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는 1994년 미화 19만2000달러를 밀반출한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당시 검찰은 소영씨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으나 의혹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경환씨도 새마을운동 비리에 연루되는 등 ‘5공 비리’의 핵심 인물로 밝혀져 법의 심판을 받았다.

    검찰이 정치검찰이란 오명을 처음 갖게 된 사건은 1960년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대 발포 사건이다. 당시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지휘 책임을 물어 마산지청장 서모씨가 구속됐으며 검찰총장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던 법무부장관 홍모씨도 3·15 부정선거에 직접 개입한 혐의로 구속됐다.

    3공화국 때는 법무부 검사들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유신헌법을 제정하는 데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5공화국 당시엔 시국 공안사건의 거의 대부분이 정치권력의 뜻대로 처리되면서 검찰권 왜곡이 극도로 심화됐다.

    심고검장의 폭탄발언 뒤에도 정치검찰 시비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과 ‘총풍(銃風)’ 사건에 대한 수사, 2000년말 불거진 안기부 예산 불법 전용사건 수사와 각종 선거사범 수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터질 때면 항상 되살아나는 ‘망령’이었다.

    지난 몇 년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진승현 게이트’와 ‘정현준 게이트’ 수사에서도 정관계 고위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축소 수사 의혹과 편파 수사 의혹이 제기됐다. 그리고 수천억원대의 주가조작과 횡령 및 비자금, 정관계 비호 의혹이 어우러진 이들 대형 게이트 사건은 ‘예외없이’ 재수사로 이어졌다.

    검사장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되풀이되는 정치검찰 시비는 대통령 친인척들의 끊이지 않는 비리 행태와 똑같다”고 지적한다.

    지난 7월10일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기소된 홍업씨의 비리 행태는 5년전 역시 같은 혐의로 구속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그것과 똑같다. 측근을 통한 비자금 관리와 치밀한 돈세탁, 기업을 동원한 활동비 모금과 현직 대통령의 아들 신분을 배경으로 한 각종 이권 개입과 청탁까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검찰의 정치성 시비와 대통령 친인척 비리는 권력을 배경으로 그 부침(浮沈)에 따라 함께 움직인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결국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선행돼야만 가능하다는 점에 대한 방증인 셈이다.

    7월11일 열린 송정호 법무부장관의 퇴임식에는 법무부와 대검, 서울지검과 5개 재경 지청 등에서 모인 200여 명의 검찰 간부들이 참석했다. 커다란 ‘수마(水魔)’가 검찰조직을 휩쓸고 지나간 탓인지 간부들의 표정은 결코 밝아 보이지 않았다.

    “…검사에게는 사법연수원 출신만 있을 뿐이지 어느 지역, 어느 학교 출신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겠습니다. 연고를 따지게 되면 검찰은 분열되고 단결을 해치게 되어 사정 보루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검사에게는 연수원 기수만 있고 지역도 학교도 없다.’

    떠나는 송장관은 검찰내 지연과 학연을 배제하고 공명정대함을 되찾자는 말로 퇴임사를 맺고 있었다. 그의 맺음말엔 이제는 검찰을 둘러싼 정치성 시비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배어 있었다. 단상 아래서 그를 바라보는 검찰 간부들의 눈동자도 같은 바람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수십 년간 반복돼온 정치검찰의 망령을 검찰은 언제쯤 스스로 떼어버릴 수 있을까. 그리고 오직 정의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서만 공정한 ‘사정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검찰 자신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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