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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 배후는 이승만과 미국”

통일운동가 신창균옹, 그 고난의 삶

  • 김진수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jockey@donga.com

“백범 암살 배후는 이승만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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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얘기를 귀 따갑게 듣고 자란 그는 3·1운동에 열렬히 동참했다. 당시 충청북도에서는 가장 치열한 만세운동이었다. 시위 군중들은 일경 주재소를 파괴했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해 주동자 50여 명이 체포됐고, 그중엔 소년 신창균도 포함돼 있었다.

신옹 등 몇 명의 학동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매만 맞고 나왔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자립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졌고, 이후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계기가 됐다.

1922년 5월 신옹은 대전제일보통학교 3학년 재학중, 3·1운동 당시 옥고를 치른 사람들에 대한 의리로 항일 동맹휴학을 주동해 무기정학을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1927년 30대1이라는 당시로선 아주 치열했던 입학경쟁을 뚫고 충북사범학교(청주 소재)로 진학한다.

사범학교에서도 사상문제로 인해 수차례 퇴학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졸업을 한 신옹은 이후 10년간 청주, 충주, 음성 등지에서 교편을 잡으며 제자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그것만이 고통과 울분의 나날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항일운동을 하는 이들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신옹은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돼 심한 감시를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교직을 계속 수행하긴 무리였다.



임시정부의 마카오 연락책

신옹은 33세가 되던 1940년 6월 망명길에 오른다. 그렇게 파란의 삶은 시작됐다.

처음 도착한 곳은 남중국 광동성 수도인 광주. 이역(異域)에서의 심정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곧 용기를 낸 신옹은 빵 행상에 나섰다. 장사를 위해 여러 지방을 돌다보니 적잖은 경험을 쌓게 됐고, 그는 곧 광주와 마카오를 오가며 성냥무역을 시작했다. 마카오는 전력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성냥 원료가 귀해 장사가 잘됐다. 성공한 성냥 판매상이 된 신옹에게 행운이 겹쳤다.

그의 장사수완을 눈여겨본 중국 부호의 신임을 얻어 당시 남중국에서 가장 큰 사업체였던 중산전력회사의 사장직과 광동전력회사 부사장직에까지 올라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당시 마카오엔 조선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신옹은 재정적 기반이 탄탄하고, 마카오 총독부에 정식으로 등록한 뒤 거주하는 유일한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중경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됐다. 임시정부의 연락책을 맡은 것이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광동에 잠시 머물다 중경으로 옮겼는데, 김구 주석의 최측근인 조완구씨와 엄항섭씨 두 사람을 창구로 해서 임시정부와 긴밀한 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옹의 주임무는 독립자금을 보내주고 광동·광서, 홍콩, 싱가포르 등지의 정치·경제 상황과 일본군의 동태를 수시로 수집해 보고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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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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