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별명과 달리 성인이 된 후 직장에서 얻게 되는 별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등뒤에 붙어 이력서 아닌 이력서 행세를 하면서 인생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좋은 별명을 만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7월2일 서울 광진구 제3대 민선 구청장에 취임한 정영섭(鄭永燮·70) 구청장은 1997년 펴낸 저서 ‘바보 구청장’에서 사회적 성공과 별명의 연관관계를 독특한 철학으로 풀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정구청장의 이름 뒤에는 늘 ‘직업 구청장’ ‘만능 구청장’ ‘구청장 전문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서울시가 ‘최장수 구청장’으로 뽑은 정구청장은 1978년 도봉구를 시작으로 성북·종로·동대문·중구·강남구청장(임명직)을 거쳐 정년퇴임한 뒤 1995년 광진구 민선 초대 구청장에 오르면서 또다시 구청장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그후 광진구에서 재선, 3선에 성공함으로써 구청장만 아홉번째 역임하는 드문 이력의 소유자가 됐다. 민선 3기 임기까지 구청장 재임기간만 계산하면 26년에 이른다. 1958년 성동구청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한 공무원 재임기간은 올해로 44년째다.
“붓대로 장난치지 마라”
강산이 네 번 바뀌고도 남을 세월 동안 시말서 한장 쓰지 않고 외길을 걸어오며 행정달인이 된 정구청장이 내리 세 번 민선 구청장에 당선된 데는 남다른 비결이 숨어있을 법하다. 특히 일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 피’와 ‘개혁’을 부르짖은 민주당 김태윤(41) 후보를 2만여 표차로 따돌리며 주민들의 마음을 쏠리게 한 저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정구청장은 “공직생활 동안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말은 ‘붓대로 장난치지 말라’는 맏형의 충고였다”고 한다. 그는 그 말속에 녹아있는 형의 절절한 한을 잊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일제 식민지 막바지에 일본인들은 군량미 조달에 혈안이 됐다.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벼를 공출했고, ‘부역’이라는 미명으로 인력을 마구잡이로 동원했다. 당시 같은 민족이면서도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반장이나 구장(동장), 면서기는 벼 공출량을 정하고 인력동원에 앞장섰다. 못 배우고 힘 없는 사람들은 더 큰 시달림을 당했는데, 정구청장의 형은 그때 겪은 억울함과 분이 평생 뼈에 사무쳤다. 그래서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동생에게 “학식과 직분을 이용해 못 배우고 힘 없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일렀던 것이다. 정구청장은 “민원을 처리할 때나 민원인과 대화를 나눌 때면 언제나 형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며 형의 한마디 충고를 지금도 민원처리의 귀감과 좌표로 삼고 있다.
광진구는 일년에 한 번씩 동별로 ‘터놓고 얘기합시다’라는 행사를 연다. 주민들은 그때마다 구청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하소연이나 화풀이 상대 노릇은 언제나 정구청장이 자청한다.
“민원인이 제게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구청장에게 화내고 욕한다 해도 나무랄 일이 아니죠. 아무리 심한 말로 다그쳐도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절반쯤 화가 가라앉아요.”
그래도 안되면 음료수를 권하고 밥을 사줘가면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다독거린다. 그럴 때는 민원은 해결해주지 않고 왜 밥을 사주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래도 정구청장은 태평이다.
“구청장한테 화내고 고함지르는 것부터가 지방자치의 긍정적인 면모입니다. 과거처럼 관청의 문턱이 높으면 주민이 주인 되는 지방자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어요.”
정구청장은 지방자치시대가 열리기 오래 전에 구청의 문턱을 낮추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성북구청장으로 재직할 때 그는 1년 동안 구청장실 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시국이 어수선하니까 주민들이 불안해서 우왕좌왕했어요. 그렇게 오다가다 마주치는 구청장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 안심하는 모습을 보고 아예 방을 개방했죠. 그 바람에 갖가지 민원이 담당 공무원 손을 거치지 않고 구청장실로 폭주하는 바람에 혼쭐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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