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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강(長江)문명의 원류를 찾아서

‘황토’가 ‘찰흙’을 이긴 까닭은?

  • 권삼윤 < 문화비평가 > tumida@hanmail.net

‘황토’가 ‘찰흙’을 이긴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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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씨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사오싱에 내리면 위야오나 허무두로 가는 차편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허무두란 곳이 워낙 작은 마을이라 많은 자료를 뒤적여 보았으나 교통편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만한 정보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를 한두 번 겪은 바가 아니기에 몸 달아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현장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몰라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내가 이런 속을 털어놓자 린씨는 “일단 사오싱으로 가봅시다. 해결방법이 있을 겁니다”라며 나를 달랬다. 사오싱에 도착하자 다행히 비는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차창에 비친 사오싱 시내의 길은 아주 길고 곧았다. 최근에 새로 닦은 듯했다.

린씨는 터미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매표소로 달려가 위야오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았다. 오후 2시35분에 출발하는 차가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나마 오후엔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허무두는 몰라도 위야오는 제법 큰 도시로 알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는 차가 하루에 세 편밖에 없다는 말을 들으니 적이 실망스러웠다. 위야오를 지나면 동중국해를 끼고 있는 닝보(寧波)라는 대도시가 있고, 더구나 중국은 아직도 대중교통에 수송의 상당 부분을 의지하는 실정 아닌가.

위야오에서 사오싱으로 돌아오는 차편도 알아보았다. 차편 자체가 아예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루 두 편이 운행되는데, 이미 그곳을 출발했다는 것이다. 잠시 표정이 굳어 있던 린씨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택시밖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한번 알아보자”고 했다.

터미널 앞이라 택시는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허무두!”라고 외치자 한 젊은이가 아는 체를 해왔다. 언젠가 한번 다녀온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게 일단 마음에 들었다. 린씨는 그에게 얼마면 다녀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더도 덜도 말고 300위안(약 4만8000원)을 달라고 했다. 버스를 이용하면 30위안 정도면 될 터라 그 10배를 줘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 “250위안이면 어떠냐”고 되묻자 그는 “가는 데 2시간, 오는 데 다시 2시간, 둘러보는 데 2시간 해서 6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오고 가는 길에 톨게이트 비용만 100위안이 든다며 그 아래로는 절대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가 11시50분. 오후 6시 전후해서 돌아올 요량을 하고 그 젊은 친구에게 의지해 허무두로 향했다. 린씨에게는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메일 주소도 주고받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차는 곧장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하자 택시기사인 한펑(韓峰)은 자신이 태권도 2단이라며 자랑했다. 20대 중반의 혈기 넘치는 젊은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속도를 냈다.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는 차로 가끔은 시속 170km까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바람에 불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필담을 나누기도 어려워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자 그는 일본 가요 테이프를 틀었고,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인도음악으로 바꿔 틀었다. 나도 인도음악을 좋아하는 터라 “음악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흥이 나는지 노래를 따라불렀다. 그는 일본음악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는데, “한국 노래는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자 “별로”라고 했다. 왠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척 솔직한 친구였다.

야오강(姚江)을 건너서

사오싱도 그렇지만 위야오도 항저우만에 연해 있기에 지형은 평탄했다. 그래서 주위는 온통 파란 벼가 자라는 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사이로 달리는 수로는 잘 정비돼 있었고, 띄엄띄엄 나타나는 마을은 개량작업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깔끔하고 산뜻해 마치 서유럽의 농촌마을을 보는 듯했다. 이런 농촌지역에까지 ‘중국식 새마을사업’이 진행된 것을 보면 중국의 개혁정책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추진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에선 고속도로가 아닌 도로에서도 톨게이트료를 받는다. 대중교통수단에는 더러 면제해주는 곳도 있으나, 승용차나 택시는 예외없이 돈을 내야 했다. 그들 말로는 그 돈을 새로운 도로 건설에 쓴다고 했다. 기름값보다 톨게이트비가 무서워 차를 끌고 다니기 어렵다고 하는 중국인들도 많이 봤다. 나는 한펑이 톨게이트 요금을 낼 때마다 걱정이 됐다. 너무 비싸서 그걸 내고도 남을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사오싱을 떠난 뒤로 몇 개의 대교를 건너고, 또 몇 개의 도시를 지나자 닝보로 가는 길을 알리는 도로표시판이 나타났다. 닝보는 9세기 장보고 선단이 활동한 바가 있어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곳에서 이슬람 상인들과 만나곤 했는데, 이런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는지 고려 사신들이 머물던 고려관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얼마간 달리자 ‘허무두 유지(遺址)’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팻말이 보였다. ‘앞으로 5km’라는 글귀와 함께. 팻말이 이끄는 대로 고속도로를 벗어나 2차선 길을 달려 막다른 데까지 이르렀다. 그때 ‘허무두 유지’란 안내판이 우리를 맞았으나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유적지 같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숲속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보았으나 거기서도 시야를 가로막고 나선 것은 유적지가 아니라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었다. 강 건너편에 뭔가 있나 하고 살펴보니 돌을 세워 만든 푯말과 전시관 같은 것이 어슴프레하게 눈에 들어왔다. 유적지는 강 저편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안내판을 이쪽에다 세워둔 것일까. 강폭은 못돼도 200m는 될 것 같았다.

더욱이 강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 위를 오가는 보트도 보이지 않았다. 도움을 청할 데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날씨는 잔뜩 흐려 당장에라도 장대비가 퍼부을 것 같았다.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는데, 강을 못 건너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강가의 돌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할 말을 잃기는 한펑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허무두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 그의 말도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안쓰러워하는 표정에서 어떻게 해서든 나를 강 건너로 데려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면 되는 것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천만다행으로 강 저편에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노를 젓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공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소리도 질러댔다. 사공이 우리를 봤는지는 몰라도 배는 서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났고, 한펑의 얼굴도 환하게 피어났다.

그렇게 한 1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배가 우리 앞에 닿았다. 여자 손님 두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 한펑은 급히 사공에게 다가가 무어라 하고는 나를 향해 빨리 타라는 시늉을 했다. 차를 강가에 세워둔 채 우리는 배에 올랐다.

우리가 건너는 강은 야오강(姚江)이었다. 사공은 “야오강은 양쯔강의 지류로 항저우만으로 흘러든다”고 했다. 강폭이 넓고 수량도 많았으나 강이 굽이를 이뤄 물살이 느린 곳에는 누군가가 쳐놓은 그물도 보였다. 물빛이 흐린 게 고기가 많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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