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바캉스에 딱! 추리소설 베스트 10

‘종이 에어컨’으로 더위 탈출

  • 정석화 < 추리소설가·‘계간 미스터리’ 기획위원 > goodnovel@hanmir.com

    입력2004-09-01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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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리소설은 부활하는가. 매년 침체를 면치 못했던 추리소설이 올들어 대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청·장년층에게 추리소설은, 지난 시절 무더위를 떨치는 데 없어선 안되었던 ‘필수품.’ 성큼 다가온 2002년 여름, 모처럼 추리소설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책 읽기의 와중에서 자연스레 떠오를 ‘여름날의 옛 추억’들은 오로지 독자들만 누릴 수 있는 덤이다.
    추리소설은 음악으로 치자면 왈츠가 아닌 힙합에 가깝다. 격하지만 냉정하게, 그러면서도 즐겁게 읽는 맛이 난다.

    한국의 독자들은 추리소설을 호러소설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너무 오래된 고정관념이어서 그러려니 하지만, 순문학과 비교해가며 이런저런 평가를 내리는 데는 더러 말문이 막힌다. 처음부터 그것이 가능한 비교였나 하는 의문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장르소설이고 대중문학이다. 대중문학과 극을 이루는 순문학은 엄연히 다른 역할과 기능을 담당한다. ‘미스터리 소설의 스승’으로 불리는 영국의 키팅(Henry Reymond Fitzwa lter Keating)은 ‘추리소설 작법’ 서문에서 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미스터리 소설이란 흥밋거리로서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면서 쓴 소설이고, 그 주제가 어떤 것이든 범죄의 모습을 띠고 있다. 즉 미스터리 소설은 작가 아닌 독자를 우선으로 삼는 소설이다. 순소설은 작가가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다고 믿거나 느끼는 그런 것에 대해 쓴다.

    그러나 미스터리 작가는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런 것을 쓰기보다는 독자의 흥미를 끌어들이는 일에 더욱 전념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국내 대다수 추리작가들의 주장도 키팅과 다르지 않다. 아다시피 추리소설은 장기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쩌면 ‘엔터테인먼트’라는 추리소설 본래 기능의 약화가 침체를 가속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추리소설이 설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한국에서 추리소설은 최근 몇 년간 국내외 작품을 불문하고 해마다 겨우 서너 작품만 출간됐을 뿐이다. 그나마 외국 추리소설에 비해 한국의 추리소설은 양적으로 훨씬 적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올해 벽두부터 이변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추리소설이 출판계의 히트상품으로, 화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것도 고전 추리소설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홈스와 뤼팽이 ‘부활’해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홈스와 뤼팽의 시리즈는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그중 한국 독자들이 가장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는 작품은 ‘바스커빌 가문의 개’와 ‘기암성’이다.

    ▶ 바스커빌 가문의 개 / 아서 코난 도일 지음 / 백영미 옮김 / 황금가지

    ‘한밤중에 황야로 나가지 말라’는 얘기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영국의 유서 깊은 가문 바스커빌가(家). 그곳의 가장 찰스 바스커빌 경(卿)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유산 상속인으로 지목된 헨리 바스커빌 경은 가문의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갈등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홈스에게 자문을 구하기에 이른다. 헨리 경은 왓슨 박사와 동행하여 영지로 돌아간다.

    소설의 전개는 런던에 있는 홈스에게 보내는 왓슨의 편지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한다. 편지는 법정싸움을 좋아하는 이상한 이웃 노인, 미녀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스테플턴 박사, 흉악한 탈옥수, 황량한 벌판과 늪지, 한밤중에 울려퍼지는 묘한 울음소리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되는 바스커빌가의 사람들, 그만큼 그들의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간다.

    역량의 한계를 느낀 왓슨 박사는 홈스가 영지로 오기를 간곡히 청한다. 그러나 홈스는 런던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홈스의 역할을 왓슨이 대신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 작품은 편지에 담긴 이야기들로 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킨다. 독자들은 왓슨의 편지를 읽음으로써 함께 추리를 해나갈 수 있고, 마치 자기 자신이 홈스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랄 수 있다.

    세계 최고의 명탐정 셜록 홈스는 ‘주홍색 연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로 그는 코난 도일의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홈스는 저자 자신을 무척 많이 닮아있다. 젊은 시절 권투를 했다는 것, 코카인을 즐겼다는 것, 이런저런 실용적 지식에 해박하고 화학실험에 매달렸다는 것, 편집증적 증세를 보였다는 것 따위.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건, 경찰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을 거침없이 해결해버리는 그만의 뛰어난 수사력과 추리력이다.

    자신감에 넘치는 그는 겸손하기보다는 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의 시선으로 우러러본다. 홈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시선을 받아들인다. 괴테나 프랑스 속담을 막힘없이 인용할 줄 아는 영국신사, 그가 바로 홈스다.

    그에 비해 아르센 뤼팽은 조금 천박한 캐릭터다.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마음껏 뽐낸 뒤 여지없이 터져나오는 경박한 웃음소리. 또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끊임없이 혼잣말을 주절거리거나 춤을 추고 ‘브라보’를 연발한다. 그럴 때의 뤼팽은 마치 연극배우 같다.

    태생적으로 뤼팽은 홈스에 대한 대항마로 창조됐다. 어찌보면 홈스보다 훨씬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홈스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자, 라이벌 국가인 프랑스에선 그에 버금가는 캐릭터가 절실했다. 그리하여 순전히 상업적 발상으로 창조된 캐릭터가 바로 뤼팽이다.

    두 캐릭터는 천재적이란 점을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다르다. 홈스가 다소 무뚝뚝한 정의의 수호자라면 뤼팽은 로맨틱한, 악한들의 보스다.

    뤼팽은 홈스와 달리 변장술의 대가다. 그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이 가능하다. 천의 얼굴을 지닌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유모인 빅트와르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마땅히 도주할 만한 곳(방법)이 없는데도 경찰을 비웃으며 유유히 연기처럼 사라진다. 더욱 사람들을 기막히게 하는 건 그 자신이 도둑이면서도 경찰간부, 또는 탐정이 되어 의문의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이다.

    ‘기암성’은 뤼팽과 레이몽드와의 애틋한 러브스토리, 고교생 탐정 보트르레의 뛰어난 활약이 펼쳐지는 작품이다. ‘기암성’은 그야말로 유럽의 보물이란 보물은 모조리 모아놓은 보물섬이다. 이 기암성을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해 뤼팽은 보트르레를 이용한다. 홈스 못잖은 추리력을 지닌 보트르레는 뤼팽이 던져준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가며 기암성의 비밀에 접근한다. 이 와중에 로마시대 케사르가 골족(族)을 굴복시켰던 역사적 사건, 프랑스대혁명, 루이 16세의 처형, 왕비 앙투아네트에 대한 일화들이 순차적으로 열거된다.

    그러나 결론은 비극. 홈스가 쏜 총탄에 맞아 뤼팽의 연인 레이몽드는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뤼팽의 마니아들은 홈스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 정창 옮김 / 열린책들

    2002년 추리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홈스와 뤼팽의 시리즈는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전작이 모두 출간됐거나 출간중에 있다. 추리소설 마니아들로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근래 한 작가의 두 작품이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더욱이 일본이나 미국, 영국이나 프랑스 작가가 아닌 낯설기 그지없는 스페인 작가의 작품들이다.

    스페인 대중문학계의 선두주자인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La tabla de Flandes, 프랑스 ‘탐정소설 그랑프리’ 수상작)과 ‘뒤마 클럽’(El Club Dumas)이 바로 그것이다.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유럽의 대표적 작가로 손꼽히는 레베르테는 최근 10년간 스페인에서 베스트셀러를 가장 많이 발표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15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거장 반 호이스의 그림 ‘체스게임’을 둘러싼 역사적 음모와 배신을 파헤친 작품이다. 미술복원가인 훌리아는 체스게임을 하는 모습이 담긴 15세기 플랑드르 패널화를 복원하던 중 그 속에 감춰진 라틴어 문장을 발견한다.

    ‘Quis Necavit Equitem(누가 기사를 죽였는가).’ 골동품 상인이자 훌리아의 정신적 지주인 세사르는 이 문장이 500년 전의 살인사건과 연관돼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렇기에 그림에 그려진 체스게임의 비밀을 풀어야만 당시의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체스게임’은 15세기 당시 유명인사였던 한 대공과 기사가 체스를 두는 장면을 극사실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 그림의 한 귀퉁이엔 대공의 부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주인공의 조사에 의해, 그림은 이 기사가 의문의 살해를 당한 지 2년 뒤에 그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주인공은 미술사가, 골동품 상인, 체스 플레이어 등의 두뇌를 빌려 왜 화가 호이스가 이 문구를 그림 아래 숨겼는지, 또 이 그림이 기사의 의문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뒤쫓는다. 음모와 비밀이 가득한 500년 전 중세의 암투 현장과 저열한 탐욕이 흐르는 현대 미술시장이 교차되는 가운데,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이 숨가쁘다.

    ▶ 뒤마 클럽 /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 정창 옮김 / 시공사

    ‘뒤마 클럽’은 희귀본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배신도 가능하다는 고서적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했다.

    코르소는 고객의 주문에 따라 특정한 책의 초판이나 희귀본을 구해주는 이른바 ‘책 사냥꾼’(서적 중개인). 어느날 그는 스페인의 유명한 서적상이자 악마 연구가인 보르하로부터 이 세상에 단 세 권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아홉 개의 문’(악마를 부르는 교본)을 찾아 그 진위 여부와 A.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일부인 ‘앙주의 포도주’ 필사본의 진위를 확인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코르소는 이때부터 프랑스와 포르투갈 등을 전전한다. 그의 행적 뒤엔 꼬리표처럼 늘 희한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가 만난 고서 소장가들의 연이은 의문의 죽음. 코르소는 고서에 담긴 아홉 개의 삽화 속에 살인사건의 실마리가 있음을 직감한다.

    아홉 개의 삽화를 통해 악마의 초대를 받으려는 악마숭배주의자들의 위협 속에서도 코르소는 신비주의에 가려진 고서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고서의 베일이 벗겨질수록 드러나는 엄청난 역사적 사실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혹자들은 레베르테의 이 두 권의 소설을 움베로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와 동일선상에 있는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하는데,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도 좋은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독자들은, 추리소설은 반드시 홈스나 뤼팽과 같은 이야기와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착각 아닌 착각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왜 홈스와 뤼팽 같은 인물을 창조하지 못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이미 말했듯 추리소설은 엔터테인먼트다. 그만큼 현대의 과학 발전과 더불어 추리소설의 구조나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요즘 같은 시대에 홈스와 뤼팽이 부활한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보다 더 큰 역할을 담당할 수는 없다.

    요즘 시대의 홈스는 범죄집단의 보스는 될지언정 탐정이나 형사론 적합지 못한 인물이다. 만일 홈스가 지금의 형사라면, 편협한 인간성을 지닌 그는 조직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왕따’당할 게 분명하다. 뤼팽 역시 범죄조직 보스가 되려면 여러가지 역량부족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뤼팽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에 불과할 뿐이다.

    추리소설은 가장 현실적이고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문학이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못한 사건이라면 소설 자체가 불완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추리소설 선진국에서조차 더 이상 홈스와 뤼팽 같은 ‘스타’가 탄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네 종의 추리소설은 이미 출판·서점업계 베스트셀러 또는 화제작으로 부상해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러나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국내외 작품들도 부지기수다. 그중 몇 작품을 간추려 소개한다.

    우선 눈에 띄는 작품이 일본작가 텐도 아라타(天量荒大)의 ‘영원의 아이’다. 이 작품은 5년여의 집필기간만큼이나 완성도가 매우 높다.

    소설은 유년기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문신처럼 새기고 살아가는 세 명의 ‘영원한 아이’-환자에게 헌신적인 종합병원 수간호사 구사카 유키, 성공한 법률사무소 소장인 나가세 쇼이치로, 경찰서 수사반장인 아리사와 료헤이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스물아홉 살. 그리고 공교롭게도 같은 과거(추억)를 공유하고 있다. 17년 전 이들 세 사람은 후다미 아동종합병원 제8병동에서 만났었다. 아버지의 성폭행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았던 유키, 남편과의 불화로 아들의 몸에 담뱃불로 상처를 낸 어머니를 두었던 료헤이,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문란한 생활로 상처를 받았던 쇼이치로.

    제8병동은 아동정신과 병동으로, 이른바 ‘동물원’으로 불린다. 병동에 입원한 모든 아이들은 스스로의 증상에 맞는 동물의 이름으로 서로를 호칭한다. 주인공인 세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정신병동 퇴원 기념이자 ‘구원의 제의(祭儀)’로 유키의 아버지를 살해한다. 그리고 17년이 흐른 뒤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이들은 재회한다.

    이 소설을 접한 독자들은 몇 번인가는 반드시 눈가를 훔쳐야 한다. 그만큼 가슴을 후벼내는 고통스런 장면이 부비트랩처럼 작품 곳곳에 장치돼 있다. 고백하건대 수년 동안 이처럼 비극적이고, 처절한 고통을 수반하는 추리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다. 저자의 고의적 감정 지배나 유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히 자연스럽게 감정이 폭발한다. 그 폭발은 격한 슬픔이자 잔인한 분노다.

    이 소설은 묻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관계는 ‘가족’이다. 그런데 정녕 그것이 사실일까?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아이는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고통받아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이 작품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너희들이 받은 상처는 결코 너희의 잘못이 아니다.’ 부모들의 필독서가 있다면 바로 이 작품이 그것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을 두고 무라카미 류는 “충격이란 말로는 모자란다. 텐도 아라타는 소년들의 장렬한 성장을 더할 수 없이 극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생명의 이야기가 사랑스럽고, 너무도 경이로웠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 낙원의 저쪽 / 백휴 지음 / 고려원미디어

    역시 ‘가족’과 관련된 정신병리 현상을 주제로 다룬 한국 추리소설을 한 편 소개한다. 근래 들어 작품활동이 뜸하지만 이상우, 김성종을 잇는 한국 추리소설계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백휴의 ‘낙원의 저쪽’(처음엔 2부 2권으로 출간됐으나 이후 1부 1권으로 재출간됐다. 여기서는 1부 1권을 텍스트로 삼았다)이다.

    피츠제럴드의 ‘낙원의 이쪽’과 유사한 제목의 이 책은 구조적으로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많이 닮아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론 당시 사회 흐름인 마광수 류(類)의 섹스자유주의에 반(反)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러 곳을 전전하던 정신과 의사 곽웅혁은 대구에서 개원한다. 대구는 지역적으로 분지인데, 거기서도 유독 여자의 생식기를 닮은 한 장소를 선택, 정착한다. 곽웅혁의 선택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함축한다. 모태로의 회귀와 모태에 대한 경멸. 동시에 작가는 이 ‘지역’ 자체를 소설을 읽기 위한 단초로 제공한다.

    성도착증을 프로이트 심리학에 입각해서 다룬 이 작품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과거가 차츰 밝혀지면서 그들의 내면에 잠재한 무시무시한 광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화자는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정신과 의사 곽웅혁 자신이다. 병원 문을 열고, 첫 환자가 그를 찾는다. 비 오는 날 빨간 레인코트를 입고 나타난 여자. 그녀는 불감증을 호소한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곽웅혁은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모든 의학 지식으로도 그녀의 불감증을 치료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의 불감증 호소는 사실 곽웅혁의 살인에의 불감증을 자극한 것에 다름아니었다.

    포주였던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정숙지 못한 여자만을 선택해 살해하는 편집증 환자인 곽웅혁은 다소 과장된 주장을 하고 있지만, 방종한 사회를 향해 거침없이 토해내는 주장이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다. 또한 이 책의 등장인물들(간호사, 환자, 환자의 애인 등)은 엑스트라가 한 명도 없다. 모두 주연이거나 주연급 비중을 지닌 조연들이다.

    이들은 후반에 이르러 펼쳐지는 짜릿한 사이코 드라마의 대반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기다린다. 만일 여러가지 이유로 한국의 추리소설을 읽기가 꺼려진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소설을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순문학이든 대중문학이든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있게 마련이다. 추리소설 역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작가로는 에드거 앨런 포상을 수상한 모리무라 세이이치, 에도가와 람포상을 받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는 역시 김성종이다. 이들 모두 입에 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중 한 편씩만 골라 짧게 소개한다.

    ▶ 인간의 증명 / 모리무라 세이이치 지음 / 강호걸 옮김 / 해문, 전2권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중 작가 자신이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이 ‘인간의 증명’이다. 제3회 가도카와 소설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1991년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 그러나 일부 독자들에게만 반향을 일으켰을 뿐, 전체적으로 이렇다할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일본 시인인 사이조 야소의 시 ‘밀짚모자’다. 이 시는 작가가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찮게 발견해 읽게 되었는데 이후 20년이 지나 대표작의 모티브로 작용한다. ‘어머니, 내 그 모자 어찌 되었을까요?’로 시작하는 ‘밀짚모자’는 현실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릴 적 기억 속에 추상화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절절히 풀어내고 있다. 곧 어릴 적 어머니가 사준 밀짚모자(또는 그 무엇이든 상관없지만)는 기억 속에서 어머니 그 자체로 승화되는 것이다.

    사건은 조니 헤이워드라는, 허름한 바바리 코트 차림의 흑인이 도쿄 중심부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 스카이라운지 입구에서 무릎을 꺾고 쓰러지면서 시작된다. 그의 오른쪽 앞가슴엔 8cm 길이의 단도가 꽂혀 있다. 경찰은 범행현장이 어디인지 알아내려 수많은 경찰력을 동원, 호텔 안을 샅샅이 조사한다.

    그러나 결과는 극히 실망스럽다. 수사는 한치의 진전도 없는 제자리걸음. 그러던 중 무네스 형사가 범행현장이 호텔 안이 아닌 밖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의사 소견과는 반대되는 주장. 칼에 찔린 깊이나 상처로 보아 범행현장은 당연히 호텔 안이어야 하는데, 자료를 뒤져보면 같은 곳을 찔리고도 수백m를 걸어간 후 사망한 케이스가 있다는 것.

    형사들은 흑인이 머물렀던 호텔에 들러 유품을 조사한다. 헤이워드는 관광비자로 입국했지만, 다른 관광객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또 그런 행적을 보인 증거도 찾을 수 없다. 과연 헤이워드의 입국목적은 뭘까? 경찰은 미국경찰에 수사협조 공문을 띄우는 한편 장기 수사에 대비한다.

    딜레마에 빠졌던 사건이 활기를 되찾는 건 택시운전사의 증언 때문. 택시운전사는 시미즈다니 공원 근처에서 그를 태웠다고 증언한다. 공원을 수색한 결과 경찰은 그곳에서 아주 낡은 밀짚모자 하나를 발견한다. 더욱이 택시운전사는 뒤늦게 시집 한 권을 경찰측에 전해주는데, 그 시집엔 ‘밀짚모자’란 시가 실려 있다.

    흑인 헤이워드를 살해한 범인을 뒤쫓는 일본인 형사 무네스와 미국인 형사, 범인으로 지목되는 흑인의 일본인 어머니, 전혀 다른 사건인 뺑소니 교통사고의 가해자인 아들과 그의 어머니 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십 명의 인물들은 모두들 ‘과거’에 여러 사건 속에서 긴밀한 관계로 얽히고설켜 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과거란 결코 유쾌하지 못한 기억으로 해석된다. 그러니 그들에겐 과거의 재생이 고통일밖에.

    과거에 그들은 하나같이 인간이 아닌 ‘동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반면 현재가 불행했던 헤이워드는 늘 행복했던 과거를 기억했다. 행복한 과거의 증거로서 그는 밀짚모자를 기억했고, 일본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사랑했던 헤이워드, 그렇기에 그는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 모든 인과관계는 무네스 형사로 하여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한다. 그리고 모두(독자들까지도)는 작가의 놀라운 복선에 진저리를 치며 놀라게 된다.

    인간관계라는 게 이리도 치밀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일까? 흔히들 추리소설은 치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치밀함의 최고조에 있는 작품이 바로 ‘인간의 증명’이다.

    일본에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있다면 한국엔 김성종이 있다. 김성종은 100여 권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역시 ‘피아노 살인’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유독 이 작품이 눈길을 끄는(작품성을 제외하더라도) 것은 집필 방법이 매우 특이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김성종은 매우 색다른 글쓰기를 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는 등단 후 줄곧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다. 그가 신문에 연재하지 않고, 전작으로 출간한 작품은 단 두 작품(‘최후의 증인’ ‘피아노 살인’)에 불과하다. 그중 ‘최후의 증인’은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후 신문에 연재됐으니, 선후는 바뀌었어도 연재된 셈이다. 그러나 ‘피아노 살인’은 곧바로 단행본으로 출간한 유일한 작품이다.

    이쯤에서 ‘피아노 살인’의 집필 방법이 왜 특이했는가를 밝혀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작가가 원고지와 씨름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해운대 백사장을 운치 있게 거닐면서 녹음기에 육성으로 녹음하여 발표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철학과 교수인 ‘나(안중구)’는 바다가 보이는 부산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소설은 아내가 호들갑스런 소식을 안중구에게 전하면서 시작된다. 아내의 호들갑은 다름 아닌 딸(미림)의 피아노 교습을 맡고 있는, 바로 위층에 살던 피아니스트가 죽었다는 것.

    피살당한 오세란의 사인은 스타킹에 의한 질식사. 형사들은 벌거벗은 채 연주중 피살된 오세란의 최근 행적을 포함한 주변조사, 그리고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 대한 탐문조사에 주력한다.

    그러던 중 안중구는 강력계 형사로 변신한 대학동기생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술자리를 빌려 안중구의 주위를 자꾸만 어슬렁거린다. 안중구가 오세란을 죽였다고 의심하는 걸까? 그러나 범인은 뜻밖의 인물. 그럼에도 안중구는 피아니스트를 살해한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집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햇볕 때문에”란 대답은 유명하다. 이 소설 역시 살해동기를 “피아노 소리 때문에”라고 한다. 오감을 자극하는 김성종의 문체에 익숙한 독자라 할지라도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비장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리하여 손이 아닌 가슴으로 쓴 소설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 디디알 / 황세연 지음 / 태동출판사

    마지막으로, ‘포스트 김성종’을 희망하는 젊은 작가 황세연의 ‘디디알’과 매년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줄곧 베스트셀러 행진을 이어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디디알’은 오락기계 DDR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Danger Dance Revolu tion’이란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독자에 대한 경고로 시작한다.

    ‘수많은 징크스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당신의 용기를 시험해보라!’ 경고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표지를 넘기면 또다른 경고 문구가 나온다. ‘노약자나 임산부, 용기 없는 자는 절대로 읽지 마시오.’ 이 경고를 무시하고 또 한 장을 넘기면, 어차피 극복하지 못할 공포라면 차라리 즐기라고 은근하게 유혹한다.

    대체 얼마나 끔찍한 소설이기에 이렇듯 엄포를 놓는 것일까? 사람들의 심리는 참으로 묘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경고 문구 따윈 광고 문구로 치부해버린다. 아니면 자신의 용기를 과신하는 것일까? 아무튼 여러 이유로 이 책을 완독한 사람들은 그때부터 많은 징크스에 시달리게 된다. 밤낮 가리지 않고 뒷덜미가 섬뜩해진다는 사람, 밤잠을 못 자고 가위에 눌린다는 사람 등등.

    ‘디디알’의 화자는 작가 황세연이다. 이 설정 자체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참히 허무는 작가의 실험정신이 빚어낸 결과다. 황세연은 우연히 알게 된 추리소설 마니아 모임인 ‘작당’ 회원 나영희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나영희는 황세연의 아파트 건너편에 살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황세연에게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소리를 횡설수설 늘어놓더니, 갑자기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열린 창문으로 그녀의 죽음을 고스란히 목격한 황세연은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죽은 나영희는 무복과 비슷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나영희와의 전화통화 때 들었던 탬버린 소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영희의 죽음 이후 ‘작당’ 회원들의 사건과 사고가 줄을 잇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살하거나 정신병자가 되거나 의문의 실종을 당한다. 이 점에 의문을 품은 황세연은 ‘작당’ 회원 서현주(교사)와 함께 회원들의 행적을 파고든다.

    ‘소설은 허구’라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소설이 허구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디디알은 소설(허구)이 아니다’라고 시위하듯 소설 곳곳에 자살한 ‘작당’ 회원의 얼굴, 그들이 죽었을 때의 모습, 그들이 입었던 옷, 비틀어진 농, 문에 찍힌 칼자국, 목에 남겨진 화인 같은 흔적 따위를 버젓이 사진으로 실어놓았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을 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설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 백야행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는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소문이 자자한 작가다. 그는 한 해에 서너 종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적도 있는데, 이런 왕성한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여전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 걸 보면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백야행’은 ‘하얀 어둠 속을 걷는다’는 의미다. 그 의미 그대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하얀 어둠 속을 걷는 사람들이다.

    전당포 주위엔 짓다 만 건물이 있다. 덕분에 건물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다. 아이들 중엔 전당포 주인남자의 아들 료지도 있다. 하필이면 이 건물에서 날카로운 흉기에 가슴이 찔린 남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피살자는 다름아닌 전당포 주인남자. 그는 날카로운 가위에 가슴을 찔렸다. 감식반은 상처가 깊어 1분 이내 사망했을 것으로, 그리고 피살자의 뒤로 넘겨진 머리칼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점으로 미뤄 면식범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한다.

    사사가키와 나카마츠, 두 형사가 사건을 전담한다. 사건의 첫번째 의문은 피살자의 시신이 하필이면 왜 공사가 중단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건물에서 발견됐는가 하는 점. 누군가 그를 살해하고 이곳으로 옮긴 걸까? 조사 결과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세 사람이 용의자로 압축된다. 피살자의 부인, 전당포 직원인 젊은 남자, 그리고 어린 딸과 함께 사는 후미요란 여자. 그러나 이들 세 명의 알리바이는 분명하다.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당포 주인의 아들인 료지와 후미요의 딸 유키오. 료지의 아버지인 전당포 남자의 죽음을 계기로 두 사람의 비밀스런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연인도 친구도 주종관계도 아니다. 유키오는 료지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방해되는 인물을 응징하려 료지에게 암시적 말투로 명령을 내린다. “엄마가 날 때렸어. 차라리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친구란 좋다가도 싫은 것이야.” 따위. 그녀의 발언 다음엔 항상 료지의 잔인한 결심이 뒤따른다.

    ‘백야행’은 의문과 역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소설의 빛깔은 때론 그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던가. 이 소설의 빛깔을 말한다면, 그야말로 ‘화이트’다.

    하얀 옷, 하얀 벽, 하얀 차, 하얀 바지, 하얀 카드, 하얀 치아, 하얀 수트, 하얀 전화, 하얀 손수건, 심지어 하얀 운명까지. 그러나 ‘하얀 것’에도 그 층이 여러 겹이란 걸 이 소설은 일깨운다. 숱한 ‘하얀 것’들이 제각기 다른 층의 속성을 드러내며 왠지 사람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빛의 속성은 거부당함으로써 제 빛깔을 여실히 드러내는 법. ‘하얀 어둠 속을 걷는다’는 자체가 빛의 속성-역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일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언급한 열 권 외에도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에로’(에드거상 신인상 수상작)와 한국추리작가협회가 단편들을 모아 매년 출간하는 ‘올해의 추리소설’ 시리즈도 읽어볼 만하다.

    추리소설은 인간의 욕망을 해부하고 도덕적 잣대에 메스를 들이대지만, 결국 인생의 반전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선물이라고 추리소설 작가들은 말한다. 이 여름 모든 이들이 ‘선물’을 한 보따리씩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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