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9일 파주에 있는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 박항서 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박감독이 이날 발표한 성명서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현재 대한축구협회가 자신의 몸값을 너무 낮게 책정해 현실적으로 연봉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고, 계약기간도 2004년 올림픽까지 보장되지 않아 팀을 지휘하기 어렵다는 불만. 다른 하나는 7일 열렸던 2002년 남북통일축구대회에서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이 벤치에 앉은 것에 대한 문제지적이다.
사실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 감독이 상징적으로 벤치에 앉은 것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월드컵 4강신화를 기록한 이후 히딩크 감독은 2002년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우상이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오히려 국민들 입장에서 벤치에 앉은 그를 다시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짜릿함과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벤트였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그저 ‘돌아온 영웅’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이 일이 성사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답이 나온다.
예견된 불행 ‘벤치 사태’
이른바 ‘벤치 사태’가 일어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스포츠와는 동떨어진 정치적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통령 후보 출마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입장에서 히딩크 감독은 사전 홍보를 위해 가장 뛰어난 ‘얼굴마담’이다. 월드컵으로 급성장한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유지하는데 히딩크만한 카드는 없다. 히딩크 감독의 영향력과 소구력을 대신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이번 남북통일축구도 초청자의 특성상 이미 처음부터 대선을 앞둔 전략적 성격이 짙었다. 여기에 히딩크라는 강력한 카드를 덧붙임으로써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애초부터 벤치에 앉을 생각이 없었다. 필자가 지난달 중순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현지에서 히딩크 감독을 만났을 때도 그는 통일축구경기 벤치에 앉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필자에게 “현재 한국축구는 과도기에 들어갔다. 경험 많은 노장들이 은퇴하는 시점이라 젊은 선수들을 대거 보강해야 한다. 따라서 코칭스태프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것이다. 대표팀을 맡은 초반에는 승률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며 “내가 벤치에 앉는 것은 오히려 이에 역행한다. 벤치에 앉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일은 그의 말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9월4일 히딩크 감독이 입국하자마자 당장 그날 저녁 대한축구협회 고위 관계자는 그에게 벤치에 앉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히딩크 감독은 5일 오전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 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항서 현 감독에게 “벤치에 앉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고 박항서 감독은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아리송한 말로 어설프게 동의를 표시했다.
대놓고는 말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감정의 굴곡이 있었던 것일까. 박항서 감독은 다음날인 6일 오후 상암경기장에서 가진 훈련 직후 인터뷰에서 “축구협회로부터 경기 당일 히딩크 감독이 벤치에 앉을 것이란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때문에 이와 관련된 어떤 질문에도 답하고 싶지 않다”고 못박았다. 특별히 감정적인 발언은 없었지만 히딩크 감독이 벤치에 앉는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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