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ARMY·노사모에서 트럼프의 MAGA까지

[21세기 문화 뉴노멀 지도] 팬덤, 외로움의 시대 향한 인간의 반격

  • 성지연 에세이스트

    입력2024-08-0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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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매해 주는 팬 1000명만 있다면…

    • 유통 구조 건너뛰고 ‘직거래’하다

    • ‘수동적 소비자’ → ‘능동적 소비자’

    • 인터넷 보급·확산이라는 변곡점

    • 지지자는 어쩌다 팬덤이 됐나

    전 세계에 팬덤 ‘아미(ARMY)’가 형성돼 있는 한국 대표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왼쪽). 2023 BTS 페스타를 찾은 ‘아미’들. [뉴스1, 뉴시스]

    전 세계에 팬덤 ‘아미(ARMY)’가 형성돼 있는 한국 대표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왼쪽). 2023 BTS 페스타를 찾은 ‘아미’들. [뉴스1, 뉴시스]

    새로운 것은 과장되기 쉽다. 새롭다는 것만으로 관심을 끌기 때문이다. 그러다 신기함은 익숙함으로 변하고,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으로 섞여 들어간다. 새로운 소리 가운데 소음이 되는 것도, 신호가 되는 것도 있다. 어떤 소리는 반짝 유행의 소음으로 사라지는 반면, 어떤 소리는 새로운 시대의 신호를 알린다. 낯선 신호가 반복돼 낯익은 현상이 되면, 그것은 ‘뉴노멀’로 자리 잡는다.

    이 기획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문화 뉴노멀’을 탐색하려는 것이다. 문화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 방식이자 삶의 이유를 알려주는 의미 체계다. 뉴노멀이란 비정상이 정상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21세기 문화적 뉴노멀 탐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선택한 뉴노멀은 ‘팬덤’이다. 팬덤은 광신자(fanatic)란 단어에서 온 ‘팬(fan)’과 영지 또는 나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덤(dom)’의 합성어다.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진정한 팬 1000명’

    팬은 언제나 있었다. 그리스에서 고전적 희비극이 공연됐을 때,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조각과 회화가 이름을 떨쳤을 때, 오스트리아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을 때, 놀라운 예술적 기예에 열광하는 사람이 당연히 있었다. 이때 이 예술가들을 먹여 살린 건 권력자와 부자들의 후원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대중문화 시대가 열린 이후 이제는 일반 시민이 이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다. 문학, 음악, 영화, TV 드라마, 스포츠 등에서 스타나 작품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팬덤을 이뤘다. 팬덤 시대란 팬덤이 사회적으로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시대를 말한다.

    잡지 ‘와이어드’ 초대 편집장 케빈 켈리가 쓴 ‘1000명의 진정한 팬들’은 팬덤 탐구에서 지나칠 수 없는 글이다. 켈리는 당신이 무엇을 만들어내든 구매해 주는 팬이 1000명만 있다면 창작자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순식간에 히트를 치는 대단한 작품만이 아니라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창작품도 구매자를 만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제 팬들은 기성 유통 구조를 건너뛰고 좋아하는 대상과 ‘직거래’한다. 거기다 한번 팬덤이 만들어지면 언론 평가 등 제도화된 통로의 영향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팬덤의 힘이다.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는 ‘텍스트 밀렵자들’에서 세련된 설명을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팬덤은 문화산업의 산물을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작품 제작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소비자 행동주의’를 보이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이다. 오늘날 창작자뿐만 아니라 팬덤이 대중문화의 주체로 활동하는 현상은 팬덤 시대가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다.

    대중문화 팬덤의 진화

    비틀스를 기다리는 팬들. [동아DB]

    비틀스를 기다리는 팬들. [동아DB]

    서구 사회나 우리나라에서 팬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팬덤 문화를 선도한 대중문화 분야는 대중음악이다. 1950~60년대를 풍미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밥 딜런 팬덤이 선구적 사례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밥 딜런은 전후 서구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의 우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팬들의 규모는 상당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조용필이 큰 인기를 얻었다. ‘오빠부대’라 불리던 팬덤이다. 이들은 공연장을 가득 채우고 ‘오빠’를 외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0년대 신드롬을 일으킨 3인조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을 응원하는 팬들. [동아DB]

    1990년대 신드롬을 일으킨 3인조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을 응원하는 팬들. [동아DB]

    ‌1992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청소년을 중심으로 한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95년 발표한 4집에 실린 ‘시대유감’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팬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음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되기도 했다. 팬덤의 힘을 실감케 한 사건이다.

    이후 팬덤 활동은 아이돌을 앞세운 K-팝 시장에서 두드러졌다. 팬들은 자신들의 스타가 음악 차트에서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길 바랐다. 순위는 문자 투표, 음반 판매량, 음원 스트리밍 등으로 집계됐다. 팬들이 할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1990년대 후반 걸 그룹 S.E.S.와 핑클, 보이 그룹 H.O.T.와 젝스키스 등의 팬덤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인기를 증명하기 위해 경쟁적 활동을 펼쳤다.

    팬덤이라는 새로운 문화 양상은 연예기획사에 안정적 수익을 보장해 줬다. 열성 팬들은 음반을 사고 공연장을 찾고 기획사가 제작한 ‘굿즈’를 구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팬덤은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소비자’로 진화한다. 수익의 원천인 그들 손에는 발언권과 권력이 주어졌다. 1990년대 이후 연예기획사들은 이러한 팬덤을 등에 업고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이끌어갔다.

    21세기 들어 K-팝 팬덤의 성장은 놀라웠다.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등에서 볼 수 있듯 K-팝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뒤흔들었다. 1970~80년대 비(非)미국 출신으로 세계적 인기몰이를 한 스웨덴 혼성 그룹 아바(ABBA)를 떠올리게 했다. K-팝 팬덤의 활동 영역은 때때로 대중문화를 넘어섰다. 예를 들어, BTS 팬덤 ‘아미(ARMY)’는 전통적 팬덤을 넘어 인권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적 목소리를 내왔다.

    ‘팬덤 3.0’의 저자 신윤희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이돌 팬덤은 세 단계로 진화했다. 첫 번째 단계의 팬덤은 10대 청소년이 주축이 됐다. 다른 스타들에 대해 배타적이었고, 또래 집단이나 지역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었다.

    두 번째 단계의 팬덤은 20~30대를 주축으로 해외까지 규모가 확장됐다. 다른 스타들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았고 엔터테인먼트산업과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이들은 온라인 중심의 친밀한 연대를 통해 하나의 문화공동체를 형성했다.

    세 번째 단계의 팬덤은 40대까지 확대됐다. 흥미롭게 이 팬덤은 ‘기획하고 양육하는’ 특징을 보였다. 2016년 방영된 ‘프로듀스 101’으로 탄생한 팬덤이 대표 사례다. 101명의 출연자가 실력을 겨루는 경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그룹 멤버로 뽑히는데 이 과정에서 팬들의 투표가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데뷔 이후에도 팬덤은 연예 활동은 물론 기획사와의 관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팬덤의 진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인터넷의 보급과 확산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의 팬덤은 오프라인 공연장이나 팬클럽 등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 이후에 생겨난 팬덤은 인터넷 발달로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 만나고, 정보를 나누고, 공동 행동계획을 세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사회의 양면성이다. 한편으로 정보사회는 개인주의 경향을 강화하고, 그 결과 개인은 무한 경쟁에 시달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함으로써 개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때 다른 한편으로 정보사회가 만들어온 온라인 공동체는 개인에게 이러한 정체성의 갈망을 채워준다. 스타에 대한 열광으로 형성된 팬덤이 팬 개개인에게 정체성으로서의 소속감과 연대감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본드는 자신의 저서 ‘팬덤의 시대’에서 팬덤을 ‘새로운 종족’이라고까지 말한다. 본드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특정한 현실을 경험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며, 자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팬덤에 합류한다.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되면 뚜렷한 정체성을 갖는다. 이 분명한 정체성은 공허한 삶에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

    문제는 팬덤의 다양성과 차이다. 앞서 주목한 것은 대중음악 팬덤이지만 영화, TV드라마, 스포츠 분야 등에도 팬덤이 형성됐다. 최근에는 취향에 따른 다양한 팬덤이 존재하고, 그 팬덤의 성향도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팬덤은 기본적으로 애정에 기반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스타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팬덤에 대한 일반론 못지않게 팬덤 간의 차이를 주목하게 한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 팬덤과 스포츠 팬덤은 작지 않은 차이를 드러낸다. 본드에 따르면, 프리미어리그 등 스포츠 팬덤은 제로섬 관계, 다시 말해 승패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여겨 많이 투자할수록 정서적 보상이 커진다. 승패가 분명한 또 다른 팬덤이 존재한다. 정치 팬덤이다.

    팬덤 정치의 명암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당시 평민당 대선 후보의 유세에는 130만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일주일 후 경쟁자였던 김영삼 민주당 대선 후보도 같은 광장에 130만 명의 청중을 불러 모았다. 당시 후보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는 물 건너갔지만, 두 정치가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열광은 대단했다.

    그 시절엔 대통령 후보의 지지자들을 팬이라 칭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특정 정치 리더의 팬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치가 갖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가에 대한 열광 없이는 정치적 동원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대표 형태인 대의민주주의 역시 시민의 적극적 참여가 없다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발적 정치 팬덤 ‘노사모’는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자금을 모금했다. [동아DB]

    자발적 정치 팬덤 ‘노사모’는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자금을 모금했다. [동아DB]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은 한국 정치인 최초의 공식 팬클럽이었다. 노무현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세 번째 낙선이었다. 노사모는 그때 등장했다. 노사모가 팬덤의 힘을 보여준 것은 2002년 대선 후보 국민참여경선에서다. 노사모는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후원금을 모으고, 거리 유세에 참여하고, 온라인 토론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노사모의 가장 큰 특징은 자발성에 있었다. 정치가가 시민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다가가는 것이 기성 정치였다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정치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팬덤 정치다. 팬덤 정치의 자발적 조직은 정치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지만 그렇다고 정치가가 팬덤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게다가 선거가 끝났다고 즉시 해산되지 않는 지속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팬덤 정치가 부상한 데는 대중문화 팬덤처럼 정보사회의 진전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제 시민들은 온라인을 통해 더 빠르게 정보를 획득하고 정치가 본인과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다. 과거에는 정당과 언론이 중재 역할을 맡았지만, 시민들은 온라인을 통해 정치가와 직거래가 가능해졌다.

    노사모가 출현한 이후 정치인의 팬클럽 탄생은 선택을 넘어 필수가 됐다. ‘명박사랑’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문재인공식팬카페’ ‘안철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주요 정치인의 팬클럽은 때로는 시위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강도 높은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최근 팬덤 정치의 두드러진 사례는 이재명 팬덤 ‘개딸’이다. ‘개딸’은 ‘개혁의 딸’의 줄임말이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2030세대 여성 지지자를 지칭하는 조어로 출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딸은 정치가 이재명에 대한 강성 지지자 전체를 포괄하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대깨문’과 같은 일종의 멸칭이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조국과 한동훈의 팬덤도 주목할 만하다. 조국은 ‘조국 사태’로 정치적 위기를 겪었지만 팬덤에 기반해 22대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한동훈은 이재명과 조국과 비교해 팬덤이 강력하지 않았다. 그런데 4·10 총선 이후 그를 지지하는 네이버 팬카페 ‘위드후니’를 중심으로 팬덤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 팬덤 ‘MAGA’. [Gettyimage]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 팬덤 ‘MAGA’. [Gettyimage]

    ‌정치인에게 팬덤이 생기는 것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 정치 팬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다. MAGA는 백인이자 남성이자 기독교 신자인 이들이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트럼프가 다시 대선 후보로 나설 수 있도록 강력한 지원 세력 역할을 떠맡았다.

    팬덤 정치를 바라보는 데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한편에서 노사모의 사례가 보여주듯 팬덤 정치는 정보사회의 진전 이래 정치적 참여 욕구가 실현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기성 정치가 기득권 지키기 정치로 퇴행하고 있다면, 이에 맞서는 참여적 팬덤 정치는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 점에 주목해 팬덤 정치는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된다.

    다른 한편에서 최근의 사례들이 보여주듯 팬덤 정치는 다원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팬덤 정치의 동력은 ‘지지·애착’과 ‘혐오·증오’라는 양가감정에 기반한다. 이 가운데 특정 상대에 대한 혐오·증오는 ‘좌표 찍기 ‘문자 폭탄’ ‘수박 색출’ 등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행동은 적잖은 우려를 갖게 했다. 이 점에 주목해 팬덤 정치는 정당정치를 우회함으로써 결국 대의민주주의의 기반을 허물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된다.

    상반된 두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팬덤 정치에 담긴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이 점점 더 두드러져 왔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정치 양극화는 물론 정서 양극화는 팬덤 정치에서 그 원인의 하나를 찾을 수 있다.

    팬덤 시대 살아가기

    외로움의 시대다. 종교도, 이념도, 국가도, 가족도 예전 같은 소속감을 안겨주지 않는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시대라고 하지만 혼자 헤쳐나가기에 사회가 만만하지도 않다. 더해서 경쟁은 자꾸만 심해진다. ‘경쟁에 의한, 경쟁을 위한, 경쟁의 시대’다. 무한 경쟁 아래서 우리는 무력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팬덤은 이러한 외로움과 무력감의 시대에 대한 인간적 반격 또는 집합행위라고 볼 수 있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고 애정을 쏟고 애착하는 대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것이 21세기 팬덤의 본질이다. 문화가 삶의 이유를 안겨주는 의미 체계라면, 팬덤은 이러한 의미를 채우는, 앞서 말했듯 정체성을 이루는 삶의 새로운 방식이다. 대상에 대한 이러한 순수한 애착과 헌신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팬덤이 논란이 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기획되고 양육되는’ 팬덤의 문제다. 팬덤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기획사 등의 자본이나 정치세력 등의 권력이 개입해 팬덤 본래의 자발성을 훼손하고 수익 창출이나 정치적 동원을 도모할 수 있다. 또 팬덤 안의 리더 그룹과 일반 시민 그룹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리더들의 큰 목소리가 시민들의 작은 목소리를 압도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지지와 애착이 과도한 팬덤의 문제다. 좋아하는 가수나 지지하는 정치인이 사회적 물의나 법적 일탈에 연루됐을 때, 안타깝고 혹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이 좋아해도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시민이다. 공적 책임을 물어야 할 때는 물어야 한다. 애정과 열정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이 애정과 열정이 공정의 가치를 대체할 순 없다.

    21세기 문화를 이끄는 두 개의 힘은 ‘참여와 인정’의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고, 또 많은 이들이 이를 들어주길 바란다. 팬덤은 이러한 참여와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를 제공한다. 이 점에서 팬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신호이자 뉴노멀로 자리 잡은 팬덤을 균형 있게, 그리고 성찰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성지연
    ‌● 에세이스트. 전 연세대 국문학과 강사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학 박사
    ● 여성동아에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연재
    ● 저서 : ‘어른의 인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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