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보수 외교, 반일 대신 우호‧협력으로 실리 얻어야

[이근의 텔레스코프] 大韓民國, 자유주의 국제질서 지켜야 산다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4-08-12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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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보수는 근대화 이끈 ‘고도 경제성장 세력’ 후예

    • 근대화 세력 자임하며 전근대적 행태 보이는 아이러니

    • 합리성, 과학, 법치, 전문성… 보수의 가치

    • 보수 외교 핵심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혁신

    • 근대화된 국내·국제 ‘양 날개’로 날아야

    5월 26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5월 26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대한민국에서 보수와 진보는 흔히 근대화를 이끈 세력(보수)과 민주화를 이끈 세력(진보)으로 구분되곤 한다. 근대화라는 개념은 전근대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꿨다는 뜻이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법, 교육, 외교 등 국가와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끈, 이른바 보수는 고도 경제성장이라는 경제 부문에 커다란 공로를 세운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잘살아 보세”로 대표되는 구호로 고속 경제성장에 가장 집중한 것. 반면 특정 세력의 폭력적 권력 독점에 대한 도전에서 생겨난 세력이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친일 세력, 군부 세력, 재벌 등이 폭력적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영구히 하려는 노력과 제도에 도전하며, 권력이 보편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교체될 수 있도록 정치제도를 바꾼 세력이다.

    물론 보수와 진보가 위와 같이 ‘칼로 무 베듯’ 깨끗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수는 자신들이 대한민국을 지금처럼 잘살게 만들었고, 그 힘으로 세계 10위권 강국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이와 달리 진보 세력은 국민이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리며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자신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정리하면 고도 경제성장 세력의 후예가 지금의 보수고, 민주화 세력의 후예가 지금의 진보라는 말이 된다.

    보수, ‘권위주의적 근대화’ 시정해야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 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탄 차가 첫 번째로 도로를 통과하고 있다. [동아DB]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 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탄 차가 첫 번째로 도로를 통과하고 있다. [동아DB]

    전근대를 규정하는 기준과 근대를 규정하는 기준은 그 시대 안에선 보편적으로 통용되곤 한다. 종교, 신분, 농업경제가 중심인 전근대에 비해 근대는 과학, 법치, 자본주의 시장경제, 합리성, 자유, 공정 등의 기준이 통용된다.

    이러한 근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우리나라 보수는 근대화 세력을 자임하고 있기 때문에 근대화 완성·혁신에 방점을 두는 세력이어야 한다. 여기서 근대화란 경제성장뿐 아니라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전근대적 관행과 가치를 철폐하고 근대적 기준을 도입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사회주의적 근대화가 아닌 자본주의적 근대화다. 즉 우리나라 보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조응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보수는 ‘반공 보수’이자 ‘시장 보수’다.

    아직 근대 시대가 지속되는 만큼, 우리나라 보수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근대라는 시대 속에서 시장, 정치, 사회도 진화하고 있다. 기술의 변화와 새로운 산업의 출현, 그리고 그에 따라 변화하는 문화가 이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보수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아직 지속되고 있으며, 또 지속돼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는 다른 선진국 보수와 달리 하나의 큰 왜곡을 보이고 있다. 왜곡의 발원은 바로 고속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권위주의적 근대화’에 있다. 우리나라 보수의 계속되는 근대화 프로젝트엔 이 왜곡의 시정이 포함돼야 한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고속 근대화’였다. 이에 일본의 근대화 모델인 ‘권위적 발전’ ‘연성 권위주의’ ‘국가 주도 발전’을 해야 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머스 존슨은 이를 ‘발전국가’라는 개념으로 개념화한 바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전근대에 형성된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국가를 활용해 경제개발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 권위주의가 만든 근대화의 모순

    우리나라와 같이 내수시장이 발달하지 못한 작은 나라가 고속 근대화를 하기 위해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자본·시장·기업가·근대적 노동력을 신속하게 만들고, 근대적 제도 및 법을 도입하고, 수출 가격경쟁력을 위해 노동을 통제하고, 투자 유치를 위해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해 정치 불안을 해소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통제되고, 민주주의도 제한됐다. 이러한 발전 모델을 그래서 권위주의적 발전, 연성 권위주의, 국가 주도 발전 등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제는 고속 근대화를 위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성취하고자 했던 궁극적 목표는 ‘근대화’이지 ‘권위주의’가 아니다. 권위주의적 통제는 시대적으로 잠시 필요한 수단이었을 뿐 목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근대화 과정의 왜곡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권위주의가 ‘전근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권위주의라는 데 있다. 그래서 일군의 정치경제학자들은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유교가 이끈 근대화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근대적 전통은 윗사람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절대적 우위를 내세우고, 직업보다 직위를 중요시하고, 가치·비전 실현이 아닌 출세를 목표로 하는 지도층의 관습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전근대적인 근대화’라는 일종의 형용모순적(oxymoron) 결과를 낳게 됐다.

    근대화 이후에 태어난, 이른바 선진국 세대는 우리나라 보수에서 이러한 전근대적 권위주의·관습을 발견할 때마다 등을 돌린다. 공사 구별을 못 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하고, 법치를 무시하고, 전문성보다 개인적 인연을 따지는 보수의 모습은 선진국의 행태가 아닌 것을 넘어 너무나 전근대적이다.

    근대화 세력이 전근대적이니 “지금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진보의 전근대성도 마찬가지이나 이 글에서는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결국 우리나라 보수는 근대화라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전근대적 권위주의에 의해 근대화를 달성하다 보니 권력이 주어지면 손쉬운 권위주의로 흘러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는 합리성, 과학, 법치, 전문성, 그리고 인류 보편 가치다. 근대 자유시장을 통해 끊임없는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직(職)보다는 업(業), 연(緣)보다는 전문성, 공사 구별이 확실한 지도층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 근대화의 플랫폼이 돼온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켜내고 혁신하는 일 역시 지속적 과제일 수밖에 없다.

    보수 외교 핵심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혁신

    우리나라 보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그리고 우리나라가 부강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열린 세계시장’이라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즉 ‘근대적 국제질서’다. 이것이 무너지고 폭력에 의한,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로 돌아간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제국의 종속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따라서 보수 외교의 핵심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선진국과 함께 수호·혁신하는 일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법·규범·약속을 중요시하는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다. 특히 국제사회를 지탱하는 다자주의적 법과 규범(multilateralism)을 근간으로 한다. 이 질서의 참여자들이 ‘실리’라는 이름으로 법, 규범, 보편 가치 등을 도외시하면 다자주의 합의에 따라 제재와 벌칙이 가해진다. 국제적 ‘왕따’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제적 왕따가 되면 국익·실리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국제시장을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우리나라가 국제시장을 잃고, 제재받고,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같은 처지에 있는 국가들과 공조를 추구하게 되면 결국 북·중·러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교는 보수를 배신하는 외교다.

    그래서 요즘 진보가 주장하는, 미·중 혹은 미·러 간 등거리 실리외교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탈하는 ‘손실외교’다. 오히려 진정한 실리를 얻기 위해서는 반일(反日)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시장 세력인 일본과 우호협력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진보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주장했어야 할 주장을 21세기 자유주의 국제질서 시대에 하고 있다.

    보수 외교가 나아갈 길

    미국을 필두로 하는 주요 7개국(G7)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대표하는 국제사회 다자협상 및 선진국 모임이다.[ Gettyimage]

    미국을 필두로 하는 주요 7개국(G7)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대표하는 국제사회 다자협상 및 선진국 모임이다.[ Gettyimage]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보수 외교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첫째, 국가가 공적 영역에서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 국제사회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정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쌓인 ‘신뢰 자본’을 활용해 국제시장에서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정받지 못하면 국제사회의 중요한 논의, 핵심 공급망 및 군사협력, 정보 교환 네트워크, 조약 파트너에서 제외돼 국제적 왕따가 된다. 이 길을 선택한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우리나라 보수가 처참히 실패한 북한의 길을 따라갈 수는 없다.

    둘째,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한반도를 넘어서까지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세계시장 질서는 글로벌 가치사슬로 촘촘히 얽혀 있기에 이것이 한반도는 물론 다른 지역에서 무너지더라도 바로 우리나라 국익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이 질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넘어서는 군사력 투사를 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준비해야만 한다.

    셋째,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인 세계시장은 새로운 기술·산업, 시장 세력의 등장과 함께 진화 또는 왜곡되곤 한다. 따라서 미래 시장에서 우리나라에 불리한 왜곡, 법·규범, 제도 및 표준이 만들어지지 않게 주요 7개국(G7)과 같은 국제사회 다자 협상 및 선진국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인연이 아니라 실력에 입각한 전문가들을 양성·발탁하고, 그들이 외교 무대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난 정권에서 전문성보다는 인연을 중시하고, 개인의 출세를 위해 공공 자산을 활용하는 전근대적 인사·행태를 보여왔다. 특히 보수 정부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의전만 돋보이는 ‘겉멋 외교’ 혹은 무조건 미국을 추종하는 외교가 아니라, 내실 있는 의제를 발굴해 이를 전략적·체계적으로 추진하는 정상외교를 해야 한다. 정상외교는 이벤트가 아니다. 국가 간 최고 레벨에서 벌이는 의제 싸움이다. 화려한 이벤트뿐인 정상외교는 권력자만을 빛내는 전근대적 외교다. 우리나라 보수는 권력만 잡으면 전근대적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관성이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지 않다. 보수 외교는 근대화된 국내, 근대화된 국제라는 ‘양쪽 날개’로 날아야 한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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