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황을 살펴보면, 박항서 감독을 제외하고 모든 관계자들이 히딩크를 벤치에 앉히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구협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5일 히딩크 감독이 박항서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그를 벤치에 앉히기 위한 준비작업이 마무리되자 히딩크 감독과 동행한 축구협회 관계자들에게 “기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살펴보라”며 동태 파악을 지시했다. 그만큼 히딩크 감독을 벤치에 앉힌다는 것은 아이디어 자체부터 물의가 따를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그 과정도 ‘일단 밀어붙이기’ 식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9월6일 정몽준 회장(오른쪽 끝)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한 히딩크 감독(왼쪽 끝)
감히 히딩크를 상처내?
그러나 경기 당일 히딩크 감독이 보여준 행동은 벤치에 앉은 것이 순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경기 시작 전 대회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눈 히딩크 감독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벤치로 향했고 상석을 놓고 잠시 박항서 감독과 상투적인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히딩크 감독이 가장 상석에 앉고 바로 옆 자리에 통역이 착석, 그 옆의 박항서 감독과 완충지대를 형성했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시작 직전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고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여유를 보였지만, 전반전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어깨를 벤치에 푹 묻고 조용히 경기를 지켜봤다. 결국 후반전엔 벤치를 떠나 곧바로 VIP석으로 올라와 여자친구 엘리자베스와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일단 히딩크 감독을 벤치에 앉혀 국민들에게 ‘6월의 뭉클한 감동’을 다시 한번 각성시키는 데 성공한 축구협회는, 정몽준 회장의 대선 행보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더욱이 히딩크 감독은 정몽준 회장과 함께 청와대를 예방, 김대중 대통령을 만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몽준 회장에게 엄청난 홍보효과를 안겨줬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 상황은 꼬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9일 박항서 감독의 성명발표로 인해 자신들의 계획에 흠집이 나자 축구협회는 이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축구협회측은 “협회를 겨냥해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항명 감독의 경우 감독이 사표를 낼 수도 있고 협회가 직무정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징계 조치를 예감케 하는 대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