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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스타 열전 ③

“노래의 생명은 테크닉이 아니라 순수”

스탠더드 팝의 전설 패티김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노래의 생명은 테크닉이 아니라 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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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벌이를 비롯한 전반적인 생활형편이 궁금했다. 잘 따지고 챙기는 성격이니 꽤나 부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기획사 직원은 그를 일러 ‘가난한 유명인사’라고 말했다.

“패티김이 가난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가난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살아요. 제 수입은 뻔합니다. 몇 차례의 행사나 공연에서 받는 돈이 전부예요. 많이 뛰고 뻔질나게 나다녀야 돈이 들어올 텐데 제가 딴 일은 하지 않잖아요? 부자는 못됩니다. ‘가난한 유명인사’는 좀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편차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나 봅니다.

사실 옛날부터 쭉 그래왔어요. 제 전성기 시절 가수의 주 수입원은 야간업소 출연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밤무대 환경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권유도 많았지만 저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더라고요. 한번은 끈질긴 섭외에 무교동 업소에 세 번 가량 출연했는데 어색해서 곧 그만두었습니다. 공연횟수가 적으니 큰돈을 벌 리 없지요. 돌이켜보면 전 아무리 인기가 있었어도 돈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한마디로 양보다 질을 택했던 거죠.”

-그렇게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알고 있습니다. 전 과거부터 지금까지 참 오해도 많이 받고 그래서 불이익도 많이 봤던 사람입니다. 제가 뭘 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다르더라고요. (격앙된 어조로) 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패티김은 미국에 살다가 용돈 떨어지면 한국에 와서 공연한다’는 말이에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낭설입니다. 오죽 화가 났으면 한때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일본으로 귀화할 생각까지 했겠어요.”



-내친김에 묻습니다만, 국적에 대한 소문도 알고 계십니까? 오래전부터 미국을 왔다갔다 하신 탓인지는 몰라도 일각에는 ‘패티김이 미국과 한국 이중국적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도 오해입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맹세코 전 미국국적을 소유한 적이 없어요. 아마도 1960년대부터 미국에 자주 들락날락하고, 제 생김새도 도도해 보이니까 확인절차도 없이 마구 얘기가 부풀려진 것 같습니다. 미국이니 돈이니 하는, 저와 관련된 얘기들은 상당부분 틀린 것들입니다.

물론 제 잘못도 있어요. 내가 너무 감추고 산 결과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주 나서서 말하고 사실을 밝혔더라면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열린 스타일이 못 돼요. 속으로 간직하는 스타일이죠. 그렇다보니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갈수록 더 엄격한 생활 쪽으로 가더라고요. 창살 없는 감옥이 따로 없었지요. 비록 외롭고 고독했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나 패티김은 떳떳합니다.”

‘외교관 지망생’이 ‘섹시한 가수’로

“노래의 생명은 테크닉이 아니라  순수”
주로 음악 얘기를 한다고 약속해놓고 사적(私的)인 얘기로 흐른 듯해서 화제를 노래로 돌렸다. 패티김은 처음에는 음악이 자신의 꿈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했다. 1938년에 함경도 함흥이 고향인 아버지와 경기도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어릴 적 꿈은 외교관, 좀더 커서는 방송국 아나운서였다.

음악은 당시 국악 또는 국극단이 인기 있던 시절이라서 중학교 3학년 때 국악을 접한 게 전부였다. 전국 중고교 국악콩쿠르 창 부문에서 1등을 차지할 만큼 재질은 뛰어났지만 ‘창 배우면 기생된다’는 집안의 반대로 국악과의 인연도 그나마 중앙여고 1학년 때 끝내게 된다. 그러나 이 짧은 인연은 이후 패티김의 음악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이를 계기로 성량과 가창력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것.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던 1960년대 현지 관계자들은 “팝송을 동양적인 분위기로 소화한다”는 평을 전하곤 했다.

평범한 학생이던 그가 본격적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한 것은 고교졸업 후 취직자리를 알아보던 시절, 음악을 좋아하던 주변의 오빠가 우연히 던진 “가수가 돼 보라”는 한마디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얼떨결에 미8군 쇼무대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59년 3월 미8군 무대에 데뷔한 그는 순식간에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음악관계자들은 한국 여성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폭발적인 가창력에다 서구적인 외모와 몸매에 넋을 잃었다. ‘섹시한 가수가 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가요계에 퍼졌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박춘석도 그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패티김은 그때만 해도 외교관 지망생답게 노래라곤 팝송을 원어로 부르는 것밖에 몰랐다고 한다. 박춘석씨는 그에게 앨범을 내자고, 그것도 우리말로 불러야 한다고 강력하게 설득했다. 그리하여 데뷔앨범을 통해 ‘사랑의 맹세’ ‘파드레’ ‘서머타임’ 등 지금도 올드 팬들의 기억에 선연한 팝 번안 명곡들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패티김씨는 음악얘기를 꺼낼 때마다 늘 박춘석 선생이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아마도 패티김씨에게 잘 맞는 곡을 써주었기 때문일 텐데요, 행여 다른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전 처음에 ‘사랑의 맹세’나 ‘파드레’를 우리말로 부르기를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에 가고 없는 동안, 즉 주인 없는 동안에도 노래가 대중들한테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더라고요. 참 놀랐어요. 저를 발탁한 것도 그렇지만 나중에 보면 박선생님이 권유한 게 맞는 겁니다.

박선생님이 제게 유난히 클래시컬한 곡을 많이 써주신 것도 그래요. 선생님은 트로트를 많이 쓴 분이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마치 특혜처럼 유독 그런 곡을 주시는 거예요. 한번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워낙 트로트 음악이 지배하는 풍토라서 많이 쓴 것이지 난 원래 클래식 쪽’이라면서 ‘패티김 아니면 그런 곡을 누구한테 주겠어?’ 하시더군요. 선생님은 정말 한국 가요작곡분야에서 다시는 없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국악을 빼놓고는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한 적이 없다고는 하셨지만, 악단이나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노래할 때는 여유있게 단원을 리드하고 심지어 틀린 연주가 있으면 지적까지 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이 땀 흘리며 악단에 끌려가는 것과 비교하면 신기합니다. 그런 능력은 어떻게 갖춘 것인지 궁금하네요.

“전 음악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땐 다 그랬어요. 공부하고 노래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단지 청각에 관한 한 선천적으로 발달한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악기음색이 다 들리고, 만약 연주가 틀리면 그게 귀에 딱 걸리는 거예요. 이럴 경우 지휘자가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할 때도 있는데 난 그걸 못 참아요. 끊고 과감하게 틀렸다고 말하고 다시 가는 거죠. 그런 점 때문에도 패티김은 깐깐하다는 악명을 얻었어요. 아무튼 난 무난한 가수는 못됐어요.”

음악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패티김은 스탠더드 팝 음악에서, 특히 발라드 분야에서 한 획을 긋는다. 하지만 당시 스탠더드 팝은 국내 가요계의 주류는 아니었다. 반대편에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 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트로트였으며, 여기에는 바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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