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에 북한 책을 찾는 교수가 있어 도쿄와 홍콩까지 가봤는데도 찾는 책이 없더군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책도 못 구하는 내가 무슨 책장수인가. 책장수도 그야말로 꾼이나 쟁이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국내엔 전문서점이 많지 않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전문서적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김씨로선 그 점이 무척 아쉽다. 그래서 그는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북한서적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나는 책 장사꾼이지 학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북한연구 학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해주는 게 그렇게 보람될 수 없어요.”
통일을 앞당기려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원하는 책을 구해다주는 것뿐이라는 그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결코 거창하진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이야말로 통일을 앞당기는 데 한몫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동독의 책이 사라지더군요. 그건 역사가 사라지는 겁니다.”
김씨가 북한 책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이전에도 몇 권씩 구해보려고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북한 책을 사 모은 건 그때부터다. 북한 책은 배급제여서 초판만 찍어 부수가 많지 않고, 판매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데다 취급하는 서점도 없다. 그래서 없어지기 일쑤고, 책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 해야할 일이란 생각에 그가 나섰다. 조국의 역사가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책으로 앞당기는 통일
김씨는 1990년 중국 옌볜에 처음 갔을 때 우리말글을 지키고 사는 조선족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평양과 자매결연을 하고 북한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조선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 초판을 산 게 북한책 모으기의 시작이다. 김씨는 1947년에 나온 ‘조선문학’ 창간호부터 최근호까지 모두 소장하고 있다. 그 책들을 보면 언제부터 가로쓰기를 했는지도 알 수 있고, 어떤 문화적 변화들이 있었는지도 한눈에 보인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모은 북한 책은 모두 4200여 종 12만여 권. 책 구입 비용만도 20억원에 달한다.
“1989년에 처음 옌볜에서 북한 책을 사들여오는데, 공항에서 다 뺏겼어요.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구속 안하고 보내주는 것만도 고맙게 여기라더군요.”
그렇다고 사라지는 책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옌볜에 창고를 마련해 보관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교수들을 위해 몇 권은 숨겨서 들여오기도 했다. 쉽잖은 일이었다. 그래서 북한 책 수입을 허가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계속 미뤄졌고, 생각다 못한 그는 1999년 어느날 문화부장관이 행사차 온 곳을 찾아 직접 말할 기회를 만들었다.
“정치도 경제도 아닙니다. 책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북한을 연구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학자들에게 북한 책을 가져다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어렵던 것이 20일 만에 허가가 났다. 북한 책을 수집한 지 10년 만에 특수서적취급허가증을 받은 것이다. 기뻤다. 그해 8월 옌볜에 있던 책을 다 들여왔다. ‘두드리면 열린다.’ 그의 인생관은 변함이 없다. 지금은 웬만한 책은 다 구입할 수 있다. 북한 책의 70% 가량만 북한에서 가져오고 나머지는 중국·러시아 등지에서 사온다. 남들이 가당치 않다고 말해도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런 날이 왔듯, 통일도 금세 이뤄질 것이라 김씨는 믿고 있다.
“북한교과서가 특수물이라뇨? 참 우스운 일이지요.”
김씨의 사무실 한켠엔 북한 책 중에서도 특수물만 보관해둔 공간이 따로 있다.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곳이다. 그가 가진 북한 책 가운데 공개·판매할 수 있는 건 150여 종뿐. 들여오긴 했으나 공개하지 못하는 책이 대다수다. ‘김일성 자서전’ ‘김정일 선집’ ‘만고의 위인 김정일’ 등과 같은 책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교과서 역시 특수물이어서 그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 공개할 수 있는 종류는 순수문학, 의학, 예술, 조선말사전 정도다. 그는 교과서마저 특수물로 지정된 게 우습지 않으냐며 반공교육을 하려면 이걸 보여주는 게 오히려 낫겠다고 한숨을 내쉰다. 그는 북한 책을 다 공개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 책들을 보고 부화뇌동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