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혹의 한 실마리를 쥔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는 국감 증언 후 부인과 함께 행방을 감췄다. 엄 전총재는 자신이 대출압력의 장본인으로 지목한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검찰 수사를 앞뒀다.
하지만 검찰이 대선 정국에서, 그것도 명예훼손혐의만으로 대북지원 의혹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를 벌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북 지원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嚴虎聲·47)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엄의원은 9월25일 금융감독위 국정감사에서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산업은행으로부터 4900억원을 지원받았고, 이 돈은 금강산 관광 대가의 웃돈으로 북한에 넘어갔다”고 폭로했다.
엄의원을 만나 그간의 의혹폭로 경위와 최근 사정 등을 들어봤다.
남북정상회담 발표 보고 직감
-초선(初選) 의원으로 큰 건을 터뜨렸는데, 언제 어떤 계기로 대북지원 의혹을 갖게 됐습니까.
“저는 1998년 11월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영입돼 총풍(銃風) 사건 변호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대북 교류와 관련된 정보를 많이 접했는데, 그쪽 전문가들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 있어요. ‘북한과 거래할 때는 반드시 뒷돈을 먹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는 어떤 종류의 딜(deal)도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2000년 4월20일, 16대 총선을 사흘 앞둔 그날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을 발표했습니다. 한나라당 선거캠프가 발칵 뒤집혔죠. 당시 저도 출마해(부산 사하갑) 뛰고 있었는데, 발표를 듣는 순간 깜짝 놀라면서도 무릎을 탁 쳤어요. 북풍을 이용한 여권의 선거전략이라는 게 빤히 들여다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뒷돈이 건너갔겠구나 하고 직감했죠. 언젠가 한번 파헤쳐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3월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작성한 ‘한미관계 보고서’를 보게 됐어요. 내용의 핵심은 ‘현대가 금강산 관광 공식 지원금 4억달러와는 별도로 4억달러의 웃돈을 북한에 전달했으며, 이 돈이 군사비로 전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2월에 그 목록을 한국에도 넘겨줬다’는 겁니다. CRS는 미 의원들이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싱크탱크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이 집결한 곳이라 여기에서 나오는 보고서는 신뢰도가 높기로 정평이 나 있어요. 그때부터 현대 관련 대출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엄의원은 현대상선을 통해 대북지원이 전개됐다는 제보를 입수, 금융감독원과 산업은행 등을 통해 현대상선의 여신거래 명세를 추적했다. 큰 액수의 대출건을 중심으로 담당자들과 접촉하며 사용처를 파악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전문성’을 톡톡히 발휘한 듯하다. 엄의원은 경찰 출신이다. 1978년 행정고시,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이듬해인 1985년 경찰에 투신했다. 강원도 영월경찰서장,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서울 중부경찰서장 등을 거친 후 1998년 경찰을 나와 변호사 사무실을 냈다.
-경찰이 범죄 수사하듯 조사했겠군요.
“금감원과 산업은행으로부터 처음 몇차례 받은 여신내용에는 4900억원 대출 사실이 빠져 있었어요. 근거자료를 들이대고 서로 크로스 체크를 하며 닦달을 해대니 그제서야 ‘수정내용’이라는 걸 끼워넣어 제대로 된 걸 보내왔어요. 2000년 6월7일 4000억원, 6월28일 900억원이 산업은행에서 현대상선으로 간 겁니다. 똑 떨어지더군요. 4900억원이면 그때 환율로 정확히 4억달러 아닙니까. 남북정상회담은 그 사이인 6월15일에 열렸고….
더구나 그해 여름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이 엄낙용 전총재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호소하고 다녔어요. ‘그 돈은 우리가 쓴 게 아니니 한푼도 못 갚는다.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그 얘기가 내 귀에도 들어왔을 정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