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28일 오전11시 서울지법 311호 중법정. 김용헌 부장판사와 두 명의 배석판사가 들어서자 법정 경위가 기립을 외쳤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재판부의 의례적 인사와 함께 착석한 방청객들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았다.
법정 왼쪽 검사석에는 임상길(林相吉) 주임 검사가, 오른쪽 변호인석에는 조석현 변호사가 자리잡았다. 공범으로 기소된 김희완(金熙完)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과 최규선씨측 변호인단도 앉았다. 아무도 서로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다. 김부장판사가 기록을 뒤적이는 소리만 흘렀다.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싸움.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사건번호 2002고합 xxx. 피고인 김홍걸.”
피고인 대기석의 문이 열리고 감색 양복을 입은 홍걸씨가 천천히 피고인석으로 올라왔다. 구속 40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초췌했다. 굵은 뿔테 안경을 썼기 때문인지 얼굴이 더 꺼칠해 보였다. 자해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철테 안경을 쓸 수 없게 한 구치소 방침 때문에 홍걸씨 안경은 갈색의 굵은 뿔테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법정을 둘러보지도 않고 엉거주춤 앉은 뒤 곧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긴장이 한계를 넘으면 저럴까. 방척석에서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은 경직됐다는 느낌을 넘어 오히려 멍해 보였다.
자신만만한 최규선 목소리와 대조
임검사의 주신문이 시작됐다. 홍걸씨의 혐의는 타이거풀스 인터내셔널(TPI)과 대원SCN 등에서 사업 청탁과 함께 36억9000만원 상당의 돈과 주식을 받고 그 돈을 차명관리하면서 2억2400여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
“김홍걸 피고인, 최규선 피고인에게서 타이거풀스의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네, 복권 선정과정에 잡음이 있다는 정도였습니다. 주식과 관련된 이야기는 훨씬 이후에 들었습니다.”
“동서인 황인돈씨를 통해 주식 약정과 관련해 계약서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내용을 한 번 본 적은 있습니다. 시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최규선 피고인에게서 타이거풀스 주식 6만6000주를 받은 사실은 있죠?”
“…네.”
혐의를 부인하는 홍걸씨 목소리는 조그맣게 새어나오다 곧 사그라들었다. 재판부가 “조금만 크게 말해달라”고 주문한 뒤에야 자신 없는 목소리가 약간 또렷해졌다.
처음부터 크고 자신만만한 최규선씨의 목소리와는 대조적이었다. 최씨는 질문마다 장황한 답변과 설명을 덧붙였다. 입에 가까이 댄 마이크 때문에 소리가 울릴 정도. 신문 도중에 “존경하는 재판장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고위공무원에게 청탁할 능력도 없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라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이날 세 사람의 주장은 한마디로 “돈과 주식은 받았지만 대가성은 없었다”는 것. 타이거풀스 주식은 회사 대표인 송재빈씨가 복표사업자 선정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신경써줘 고맙다는 뜻으로 준 것이고, 대원SCN 등에서 받은 돈도 “해외 기술합작을 도와준 정당한 대가”였다는 주장이었다.
“다음 재판은 7월19일 오후 2시로 하겠습니다. 변호인측 반대의견 있습니까? 없으면 그때 속행하겠습니다.”
한 시간 가량의 검찰 신문을 끝으로 1차 공판이 마무리됐다. 홍걸씨는 들어올 때와 똑같이 홀린 듯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방청석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어차피 방청석에 그를 지켜봐줄 가족은 없었다. 청와대 법률담당 행정관으로 파견된 강선희(姜仙姬) 변호사와 공무원 서너 명만이 뒤쪽에 앉아 재판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