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상황이 안 좋았고 생각도 많았다. 그냥 서울에 남아 있으면 누군가를 필요 이상으로 미워하거나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하지 않았던 패배의 아픔도, 빠른 경질의 고통도 간단치 않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가 이어졌다. 극에서 극을 달린 몇 개월을 보내고 난 느낌은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왔다가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 와서 그 동안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놓는 것은 나로서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칫하면 패장의 변명처럼 들릴 수 있으며, 면피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위원 같은 공식적인 자격을 갖춘 사람의 말이라면 논리가 서겠지만 지금의 박항서는 이도 저도 아닌 ‘백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신동아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것은 지나간 몇 달 동안 대표팀이나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좋은 경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개인 박항서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지만 이번 일로 축구계의 행정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은 부분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히딩크 만나 오해를 풀고
독일로 출발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이 난 사람은 다름아닌 히딩크 감독이었다. 경질이 되고 나자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우선 마음에 걸렸던 것은 9월7일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 당시 감독님의 벤치 착석문제로 일어난 일련의 잡음, 이른바 ‘벤치사태’였다. 나에게 누구 못지않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이고 함께 월드컵 4강이라는 큰 일을 해낸 분인데, 그렇게 떠나 보낸 것이 못내 마음이 아팠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감독님이 서운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꼭 찾아뵙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10월25일 네덜란드로 잠시 건너가 아인트호벤 클럽하우스에서 만나 뵌 히딩크 감독은 나를 무척이나 반겼다. 바쁜 와중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감독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벤치 착석 문제는 내가 뭐라고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남들 말에 신경 쓰지 말자. 당신과 나는 말이 필요한 사이가 아니지 않으냐. 우리는 영원히 함께 가야 할 형제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아시안게임 문제에 대해서는 “수고 많았다. 빨리 잊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최근의 한국축구상황, 정치적인 문제들, 선수들의 근황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대화가 오갔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아도 히딩크 감독은 누구보다 한국축구를 둘러싼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일인 11월8일 이후에 귀국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독일에서 보낸 시간 가운데 잊을 수 없는 또 한가지 경험은 쾰른체육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는 유럽 축구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일이다. 그들 또한 한국축구의 최근 상황이나 나의 대표팀 감독 경질 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는데, 당신이 보기에는 한국축구의 시스템이나 인프라가 그만한 수준이나 여건이었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할말이 많은 듯했지만 대표팀에서 경질되어 독일까지 날아온 내 앞에서 쏟아놓기는 민망한 모양이었다. 한국 축구인들이나 국민들의 시선은 높아졌지만, 해외에서 한국축구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서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그것은 누구 책임일까.
당초에는 8월10일경에 독일에 다녀오려고 했다. 연말까지 해외에 머물며 공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에 7월 축구협회에서 연락이 와 면담을 가졌다. 아시안게임까지 대표팀 감독을 맡아달라는 얘기였다. 많은 생각이 겹쳤다. 아시안게임까지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짧은 시간에 지나가듯 감독을 맡는 게 무슨 의미나 효과가 있겠느냐는 주위의 충고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