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적극적으로 말린 것은 다름아닌 히딩크 감독이었다.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국제전화로 상황을 설명하자 감독님은 “그건 미친 짓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으냐. 절대로 맡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감독이 역량을 발휘해 팀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대회 결과가 안 좋을 경우 최소한의 보장도 없지 않냐는 것이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기술위원회에 “아시안게임까지만이라는 조건이라면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이야기하고 독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러자 8월6일 기술위원회가 열려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임기를 보장해 주겠다고 다시 제안했다. 운전 중에 협회의 제안을 들었다. 내가 한 말이 있었으므로 팀을 맡겠다고 승낙했다. 연봉이나 대우 등 세부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간의 관례와 관행에 따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갈등이 빚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감독 선임 결정은 기술위원회 소관이지만 계약은 행정을 담당하는 사무국에서 담당한다. 계약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협회에 들어가 남광우 사무총장과 마주앉았다. 당연히 구체적인 계약서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A4 종이 한 장에 담긴 설명이 전부였다. 계약조건도 그동안의 관례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표팀 코치시절의 조건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선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3세 이하 대표팀이 월드컵 대표팀과 다르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서로에게 예의가 필요한 것 아닌가. 상벌위원회에 청바지를 입고 가면 안 되듯 계약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러 들어간 자리에는 세부 계약내용을 준비해주어야 옳은 것 아닌가.
연봉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것을 두고 단순히 금액 문제로 기분이 나빴던 것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렇다. 기본 상식이라는 게 있다. 협회가 나를 감독으로 불렀으면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이 나를 선임했다면 감독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한 것이고, 그렇다면 그 자리에 나온 개인이 박항서라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든 감독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어야 옳다고 생각한다(당시 박감독이 요구한 금액은 히딩크 감독 이전 대표팀 감독의 연봉 수준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협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박감독에게 제시한 연봉이면 대표팀 감독을 할 사람이 줄을 섰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편집자). 그저 치사하게 돈 몇 푼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다.
“적당히 줘도 일할 사람은 널려 있다”는 발상을 협회가 계속 갖게 된다면 이는 축구인으로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자.
우리가 월드컵을 통해 4강에 오르고 세계적으로 위상이 올라갔다면 지도자들은 물론 축구협회도 위상이 올라간 셈이다. 그렇다면 축구협회의 시스템이나 일하는 방식도 그에 걸맞게 바뀌어야 할 것 아닌가. 언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할 것인가. 언제까지 축구인들은 협회가 불러준 것에 감지덕지해야 하는가.
이후 내가 생각했던 금액을 제시하는 등 대화가 오갔지만 이미 감정은 상해있었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기술위원장, 조중연 전무가 최종조건을 제의했다.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양자택일 하라는 것이었다. 그만두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솔직히 염려가 앞섰다. 나 스스로는 명분이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지만 바깥에는 돈 때문으로 알려질 게 뻔했다. 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차버리고 한국 축구의 앞길과 아시안게임 준비에 혼선을 불러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예상되었다. 협회는 거대한 조직이고, 나는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혼자 힘으로는 협회의 언론플레이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고민 끝에 “차라리 무보수로 하겠다”고 말했다. 돈 문제로 싸운다는 말이 오가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코치들에게 월급이 지급된 후에도 협회는 내 보수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지금 와 생각하면 차라리 무보수로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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