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9일 서울대 문화관에서는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이하 민교협, 회장 이애주) 주최로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서울대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한다’. 이 토론회를 준비한 서울대 민교협 임홍배 교수(독어독문학)는 “그 동안 서울대 안팎으로 개혁론이 난무했는데 내용적으로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답답한 마음에 다시 시작해 보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이번 토론회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서울대가 바깥 세상의 비판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교문을 한 발짝만 나서면 서울대 폐교론을 비롯, 서울대의 위상과 구실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그런데 정작 서울대 안에서는 개별적인 비판의 목소리는 있어도 공론화된 적이 없다. 이번 토론회에는 서울대 안팎의 목소리를 모두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발제를 맡은 김인걸 교수(국사학)는 “서울대의 정체성 위기는 서울대에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 특히 정부 지원을 매개로 한 구조조정 요구에서 촉발되고 전면화된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면서 극복 방안으로 ‘정부로부터의 자율성 확보(대학정책 수립과 운영의 자율성, 총장의 사무국장에 대한 인사권 및 재정권)’에 무게를 실었다.
정체성 위기 맞은 서울대
학생 대표로 나온 서울대 철학과 이지선씨는 “2000년대부터 학사관리 엄정화 방안, 학사 경고, 전면적인 광역화 실시까지 학생들에게 무비판적이고 기계적인 취업준비생이 되기를 강요하는 제도들이 실시되고 있다. 이제 학교는 거대한 취업학원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비판한 뒤 “서울대는 대학으로서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살 만한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서울대 책임론을 주장했다.
서울대 출신으로 외부자의 시선에서 서울대 비판을 맡은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서울대의 ‘우월의식’을 이렇게 꼬집었다. “한국에 지식생산 사다리가 있다면 서울대는 당연히 그 맨 꼭대기에 놓여 있다. 지식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워낙 오래 있다 보니, 서울대는 특별하게 대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지방 국립대학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서울대특별법안’도 그런 경우다. 이런 법안이 나오는 데에는 서울대의 사정이라는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특별한’ 법안을 준비하려는 태도 자체가 서울대가 자신을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다. 비슷한 방식으로 서울대 교수는 ‘서울대에 들어오는 학생은 당연히 최고의 수학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박병덕 전북대 교수(전국국공립대학교수협의회 사무총장)의 ‘국립대학발전계획’과 ‘국립대학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이 갖고 있는 문제점 분석에 이어, 김진균 서울대 교수(정치학), 김길중 교수(영어교육), 김현철 교수(건축학), 강봉균 교수(생명과학)의 토론으로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특히 김진균 교수는 “서울대 문제가 학력·학벌주의 문제의 정점에 속한다는 비판과 서울대가 세계적 수준의 대학이 돼야 하지만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은 정반대의 해결책을 요구한다”며 “혼란스러운 서울대 비판론에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학력·학벌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울대의 우수학생 독점과 대학서열화 타파, 대학간 균형발전 등이 해결책이겠지만, 후자의 문제라면 정반대로 더 많은 국가적 지원이 서울대로 집중돼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대 밖에서는 전자를, 서울대 내부에서는 후자를 주장하기 때문에 서울대 개혁론은 늘 논의만 무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그 해법도 다양한 서울대 개혁론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1975년 관악산 기슭에 새 터를 마련한 후 서울대는 양적 팽창을 거듭했지만 그때부터 이미 국제수준의 대학원중심대학을 목표로 질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비슷한 내용이 1994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교육개혁위원회가 내놓은 ‘연구중심대학’이며, 1999년 김대중 정부 새교육공동체위원회가 발표한 ‘국립대학발전계획’으로 이어진다.
서울대 구성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이러한 개혁 추진과정에 서울대가 배제됐다는 부분이다. 즉 정부나 교육관료들이 서울대가 자체 개혁의지나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사이 서울대는 정체성 위기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