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특별기획 한중수교 25년

한국-대만 단교 25주년… “한국은 배신자”

6·25 파병 혈맹에서 시기·질투의 관계로

  • 최창근|대만 전문 저술가, 한국외국어대 박사과정 caesare21@hanmail.net|

    입력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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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증 교차한 옛 친구… 교학상장(敎學相長)해야
    • 한국·대만 기업이 벌인 치킨게임
    • 독립의 길로 가는 서막 열어준 나라
    • 대만 사회 기저에 흐르는 反韓감정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한국인의 눈에서, 마음에서 멀어진 나라가 있다. 대만(臺灣), 엄밀히 말해 중화민국(中華民國)이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한국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수교 협정서에 서명했다. 한국은 냉전체제 속에서 지속된 적대관계를 공식 종료하고 ‘죽(竹)의 장막’을 넘어 중국의 손을 잡았다. 치러야 할 대가도 있었다. 한국은 ‘새로운 친구’를 맞는 대신 ‘옛 친구’ 대만과 강제로 헤어져야 했다. 



    중국 얻으면서 대만 잃어

    베이징에서 한중 양국 외무장관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날, 서울 명동의 주한중화민국대사관에서는 2000여 화교의 눈물 속에서 ‘청천백일기 하강식’이 열렸다. ‘마지막 주한국 대사’ 진수지(金樹基)는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로 참석자들을 위로했다. 그 말은 한국·대만 단교 25주년인 올해까지도 공허한 메아리로 울린다. 눈물 속에 내려진 청천백일기는 공식 석상에서 게양되지도, 돼서도 안 되는 존재다.



    중국의 대외 원칙인 ‘하나의 중국 정책(一個中國政策)’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전(全) 중국 유일 합법 정부라는 게 골자다. 대만·홍콩·마카오에 관해서는 ‘나눌 수 없는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조건도 붙는다. 베이징은 중국과 수교하는 모든 나라에 대만과 단교할 것을 요구했다. 원칙 적용에는 예외가 없었다.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인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일대 쾌거인 이 사건 배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가 있었다. 윤봉길의 거사 후 국민정부(國民政府·중화민국의 당시 공식 명칭)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4억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상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냉담하던 태도도 바꿨다. 1932년 8월 김구와 첫 만남을 가진 후 장제스는 임시정부 지원을 약속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도움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역만리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1940년 창설된 광복군은 장제스의 심복 후쭝난(胡宗南) 휘하에서 훈련받았다. 김구의 차남 김신(훗날 주대만 한국대사를 지냄)은 육군항공학교 졸업 후 전투기 조종사가 됐으며 훗날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밑거름 구실을 했다.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도 인정했다. 1943년 카이로에서 연합국 삼거두가 만났다.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설득해 ‘일본 패전 후 조선 독립’ 선언을 이끌어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의 승인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약소국 임시정부의 앞날을 신경 써주는 나라는 없었다. 강대국들은 “한국을 신탁 통치해야 한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종전 후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유일무이한 국제법적 근거가 됐다. ‘독립의 길’로 가는 서막이었다.



    대한민국 제1호 재외공관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독립했다. 1945년 11월 4일 장제스는 광복을 맞이해 조국으로 돌아가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해 환송연을 베풀었다. 귀국 편의를 위해 전용기도 내주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TCOK) 7개국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힘을 보탰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제스에게 195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로 보답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신생 대한민국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기여했다. 1949년 1월 4일 중화민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하고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해 6월 10일 샤오위린(邵毓麟)을 초대 한국대사로 임명했다. 훗날 ‘한국대사 회고록(使韓回憶錄)’을 집필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한국 정부는 국공내전의 승기가 공산당으로 기울어가던 1948년 11월 정환범을 주중화민국 초대 특사로 임명해 광저우(廣州)에 ‘대한민국특사관’을 개관했다. 대한민국의 첫 재외공관이다. 같은 해 8월 7일 장제스는 경남 진해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8월 26일 신석우가 초대 대한민국 대사로서 리쭝런(李宗仁) 부총통에게 신임장을 제청했다. 1949년 12월 중화민국의 대만 천도 후 대한민국 대사관은 타이베이에서 재개관했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우호관계는 이어졌다. 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무력간섭을 선언한 후 미국 해군 제7함대에 대만해협 진입을 명령했다. 제7함대 사령관 아서 스트러블, 태평양지구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차례로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장제스는 대만군의 중국 본토 파병, 제3전선 형성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3개 전투사단 병력 3만3000명 제공을 제의했다. 맥아더는 회의적이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 의견도 부정적이었다. 무엇보다 트루먼은 대만군 참전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우려했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 결성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에 불리하던 전세가 역전됐다. 미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다. 10월 19일, 중공군이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면서 전세는 재역전됐다. 11월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대만군 파병을 정식 요청했다. 대만군은 중공군 포로 심문과 정보 수집을 위한 소규모 부대를 파병했다.

    1953년 7월 6·25전쟁 정전(停戰) 후 이승만과 장제스는 ‘아시아판 나토(NATO)’를 구상했다. 공산주의 위협 속에서 지역 국가들이 집단방위체제를 구성하는 게 골자였으나 미국이 반대했다. 워싱턴은 한국·일본·대만·필리핀 등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이런 가운데 1953년 11월 타이베이에서 회동한 이승만과 장제스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결성에 합의했다. 이 연맹은 이듬해 6월 15일 경남 진해에서 민간기구 형식으로 공식 출범했다. 1966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은 세계반공연맹으로 확대·개편됐다.

    ‘아시아 반공전선’ 하에서 한국과 대만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항공협정이 체결됐다. 1961년 3월 3일 무역협정, 1965년 문화협정 서명이 이어졌다. 한국과 대만이 전후(戰後) 복구와 경제개발에 힘쓸 무렵 경제·무역 협력 관계도 긴밀해졌다. 1962년 3월 상공부 상무관이 미국·서독·태국·홍콩과 더불어 대만에 첫 파견됐다. 1965년 11월 한국·대만 무역회담, 1968년 5월 한국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만 중화민국국제경제합작협회(CIECA) 간 경제협력위원회가 개최됐다. 한국과 대만을 가리켜 ‘혈맹(血盟)’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고위층 간 교류도 활발했다. 1966년 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대만을 공식 방문했다. 그해 4월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蔣經國) 국방부장이 답방 형식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3년 후인 1969년 2월 재차 내한(來韓)했다. 1975년 4월 장제스 총통 국장(國葬) 시 한국 정부는 대통령 명의 조문 담화를 발표했다. 김종필 국무총리, 정일권 국회의장 등이 조문사절로 타이베이를 찾았다.



    돌팔매질 당한 한국대사관

    대만이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던 1970년대 들어서도 한국과 대만은 우호관계를 지속했다. 1971년 10월 중화민국(대만)의 유엔 퇴출, 1972년 대만·일본 단교, 1979년 대만·미국 단교 등으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이 극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자유중국’ 즉 대만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국교를 유지했다. 그 무렵 대만에 있어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더불어 3대 핵심 수교국이었다.

    한국·대만 관계에 근본적 변화가 생긴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춘천 미군 공군기지에 불시착한 납치범들은 대만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사건 해결을 위해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와 선투(沈圖) 중국 민용항공국장이 만났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양국 간 첫 공식 접촉이었다. 회담에서 한중 양국 대표단은 기체 및 인질 중국 송환, 납치범들의 한국 내 재판 후 대만 송환에 합의했다. 대만은 납치범들을 ‘반공 의사’라 칭하며 즉각 송환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의 결정에 대만은 정부 차원에서 항의했고, 타이베이 시민들은 한국대사관 앞에서 태극기를 찢으며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4월 7일,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대만은 이때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국호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 복귀했다. 중국과 대만이 동시 참가한 대회 개막식에서 대회운영위원회는 중국대표팀의 오성홍기 사용을 허락한 반면 대만대표팀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을 원용해 청천백일기 사용을 불허했다. 대만대표팀은 이 같은 조치에 항의하면서 대회를 보이콧하고 철수했다. 이 사건은 대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으며 반한(反韓) 감정이 들끓었다. 다시금 타이베이 한국대사관은 시위대의 돌팔매질을 당했다. 4년 후인 1988년 7월 노태우 정부는 종전의 ‘중공(中共)’을 중국으로, ‘중국’ ‘중화민국’ ‘자유중국’을 ‘대만’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대만 정부는 “공식수교국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북방정책의 화룡점정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다. 1987년 대선 과정에서 ‘대(對)공산권 국가 국교정상화’를 천명한 그는 취임사에서도 ‘임기 내 중국과 수교’를 암시했다. 같은 해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에서 ‘남·북한 쌍방의 상대측 우방국들과 관계 개선에 협력’을 천명했다. 노태우 정부의 신(新)외교정책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에 빗대 ‘북방정책(Nordpolitik)’으로 명명됐다.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 김종휘가 주도한 대(對)공산권 포용정책은 가속도를 냈다. 1988년 주소련 영사사무소가 설치됐으며 1989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동유럽 공산국가와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1990년에는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몽골 등과 수교했다. 이듬해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며 대(對)중국 관계에서도 진척을 이뤄 1991년 서울과 베이징에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했다. 한중수교는 북방정책의 대미(大尾)요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1980년대 들어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 대(對)한국 관계에서 대만은 위기감을 느꼈다. 한국·대만 단교는 ‘시간문제’로 비쳤다. 한중 관계 변화 추이를 주시하던 대만은 공식·비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중국과의 수교 가능성과 일정을 문의했다. 1990년 양수룽(梁肅戎) 입법원장(국회의장 해당)을 단장으로 한 입법원 대표단이 한국을 찾았다.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한 입법위원이 ‘한중 관계의 미래, 중국과 수교 시 대만과 외교관계’에 관해 물었다. 노태우는 사견(私見)을 전제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도 옛 친구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옛 친구론’으로 대만을 안심시킨 노태우는 극비에 부친 한중수교 협상에 박차를 가했다. 1991년 10월 이상옥과 첸치천은 첫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개최했다. 같은 해 11월, 이듬해 4월에도 회담을 가졌다. 세 번째 회담에서 양국 외교장관은 수교를 위한 실무교섭에 합의했다.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를 대표로 한 협상팀은 1992년 5월, 6월 베이징과 서울에서 각각 두 차례, 한 차례씩 비밀교섭을 벌였다. ‘동해’라는 작전명이 붙은 수교 협상은 대만, 북한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진행됐다. 7월 29일 노창희 외무차관이 베이징을 방문, 쉬둔신(徐敦信)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만나 최종 담판을 벌였다. 수교 일정, 성명 문안, 공식 발표 날짜 등을 합의했고 수교협정서에 가(假)서명했다.



     “3일 내로 한국 땅 떠나라”

    1992년 5월 대만 정계 실력자 장옌스(將彦士) 총통부 비서장(대통령비서실장 해당)이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특사 자격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해 한중수교 진척사항을 문의했으며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게 불가피할 경우 ‘대만과 수교 1년 연장’을 요청했다. 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경제·무역상 최혜국 대우를 약속하면서 한중수교설을 공식 부인했다.

    한중수교 협상을 극비에 부친 까닭은 중국 측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다. 리덩후이 총통 취임 후 대만은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기반으로 한 ‘은탄외교(銀彈外交)’를 전개하며 외교 고립을 타개해가고 있었다. 그 성과로 라트비아, 니제르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는 중국을 자극했고 ‘외교적 보복’을 부추겼다. 대만에 있어 한국은 아시아 최후의 외교 거점이었다. 명동 대사관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사관은 역사적 상징성과 더불어 재산가치도 높았다. 대만은 한중수교가 이뤄질 경우 국제법에 따라 대사관을 중국 측에 넘겨줘야 할 것을 우려해 수차례 매각·소유권 이전을 시도했다. 중국 측은 수교 조건으로 대사관 양도를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대만 측의 대사관 매각·소유권 이전을 저지하던 형편이었다. 중국으로서는 ‘혈맹’ 북한도 배려해야 했다.

    1992년 8월 15일, 이상옥 외무장관은 광복절 리셉션장에서 만난 진수지 대만대사에게 한중수교 임박을 암시했다. 3일 후 이상옥은 롯데호텔(서울 소공동) 객실에서 비밀리에 진수지 대사를 만나 한국과 중국이 수교에 합의한 사실을 통보하고 추후 공식 발표 때까지 보안 유지를 당부했다. 진수지는 이를 대만 정부에 보고했다. 극비에 부쳐진 한중수교가 수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해 8월 21일 이상옥은 집무실로 진수지를 초치(招致)해 공식 단교문서를 전달하면서 3일 이내에 대사관에서 철수할 것도 요구했다. 이튿날 김석우 외무부 아주국장이 공식 브리핑을 통해 8월 24일 한중수교와 동시에 대만과의 단교를 공식 발표했다. 진수지는 8월 22일 긴급 기자간담회를 개최해 한국 측의 처사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명동 대사관 처리 문제에서도 ‘대만 외교자산 탈취를 막을 것’이라고 밝혔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진수지는 8월 24일 오후 4시 마지막 국기 하강식을 치렀다. 그날 오후 10시 20분 중화항공편으로 귀임하는 것으로 ‘마지막 주한국 중화민국 대사’로서 임무를 끝냈다. 같은 날 타이베이의 한국대사관도 국기를 내리고 현판을 뗌으로써 ‘대한민국 제1호 재외공관’으로서의 소임을 마무리했다. 


    2005년 국적기 운항 재개

    단교 후 한국의 집권당이던 민주자유당 차원의 진사(陳謝)사절단 방문이 추진됐다. 사절단장으로 7선 현역의원이자 대만과 친분이 깊은 김재순 전 국회의장, 고문으로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결정됐다. 1992년 9월 15일 타오위안(桃園) 중정(中正)국제공항에 도착한 진사사절단을 장샤오옌(蔣孝嚴) 외교부 정무차장, 진수지 본부대사가 영접했다. 문제는 공항 귀빈실에서 발생했다. 한국사절단이 귀빈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공항 직원들은 “중화민국 국제공항 귀빈실은 배신자들에게는 열리지 않는다”며 제지했다. 김재순은 복도에서 ‘부형청죄(負荊請罪·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때려달라고 죄를 청한다)’의 성명을 읽어야만 했다. 하오보춘(郝柏村) 행정원장(국무총리 해당)을 만난 자리에서도 사절단은 ‘배신자’라는 질타를 당했다. 이후에도 리덩후이 총통과 대만 외교부의 사절단에 대한 냉대는 이어졌다.

    1992년 10월 한국과 대만은 비공식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대만의 국호 및 국기 사용 문제, 비공식 대표부 직원의 지위 문제 등으로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대만 측은 ‘대만’ 명의 대표부 설치를 고집했고, 한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에 의거해 수용할 수 없다는 견해였다. 수차례 협상과 결렬 끝에 1993년 7월 27일 오사카에서 양측은 비정부 대표기구 수립에 관해 합의했다. 오사카회담에서 한국과 대만은 서울과 타이베이에 각각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 ‘주타이베이한국대표부’를 설치하고, 대표부 직원에게는 외교관에 준하는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후 그해 11월 서울, 이듬해 1월 타이베이에 대표부가 개설돼 한국과 대만은 ‘비공식’ 틀 속에서 ‘상주대표부(Permanent Mission)’라는 동등한 기구를 통해 실질적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대표부 설치 후에도 관계 정상화의 길은 험로였다. 관건은 서울-타이베이 간 직항노선 문제였다. 단교와 동시에 ‘항공협정’이 폐기돼 양국 국적기 취항이 불가능해졌다. 1995년 3월 직항노선 부활을 위한 1차 협상이 개최됐다. 대만은 ‘민간 항공협정’에 대만을 ‘영토(領土· Territory)’로 표기할 것을 주장했다. 한국은 영역(領域·Area)’이어야 한다고 맞섰다. 이후 협상에서도 대만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태도를 고수해 협상이 연달아 결렬됐다. 그러던 중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로 한국 방문 관광객 수요가 급증했다. 이를 계기로 ‘전세기’ 형식의 사실상 정기편이 생겼다. 2년 후인 2004년 9월 항공협정이 체결됐고, 이듬해 3월 국적기 정기 항공편 운항을 재개했다.



    중국 일변도 외교가 간과한 것  

    2000년대 들어 한국과 대만은 경제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반도체, LCD, LED, 화학, 철강 등 주력 수출 품목이 겹쳤다. 대기업 위주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기업들은 브랜드 파워, 규모의 경제를 이용한 원가 절감 등을 무기로 대만 경쟁 기업을 압박했다. 반도체와 LCD를 중심으로 벌어진 ‘치킨게임’에서 한국은 대만 기업들을 도산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이는 단교 시 앙금에 이어 대만 내 반한 감정의 진앙이 됐다.

    이런 가운데 2010년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에서 대만 태권도 대표 양수쥔(楊淑君)이 규정 위반을 이유로 실격패 당했다. 이를 발화점으로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을 향한 반한 감정이 불붙었다. 대만 언론들은 선정적 보도로 이를 부추겼고, 지방선거를 맞이한 각 정당과 정치인들도 이를 선거에 악용했다. 이 사건은 대만 사회 기저에 흐르는 반한 정서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단교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음에도 민간 부문을 중심으로 한국·대만 관계는 긴밀해지고 있다. 2003년 상호비자면제협정이 체결됐고, 2012년 비자 면제 기한을 90일로 연장했다. 항공편도 늘어나 종전 인천·타오위안 외에 김포·쑹산(타이베이), 부산·가오슝, 대구·쑹산 등을 잇는 정기 항공노선이 증설됐다. 상호 방문객 수도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다. 2014년 연간 상호 방문객 100만 명 돌파 후 급증세를 이어가 200만 명을 바라본다. 경제·무역 부문 교류도 증가 일로다.

    1992년 단교 이후 25년 동안 ‘하나의 중국 정책’ 속에서 한국과 대만은 공식 외교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으나 단교 이전보다 경제·무역·관광 등 민간 교류를 기반으로 실질 관계는 긴밀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 있어 ‘옛 친구’ 대만의 존재감은 낮다. 젊은 세대들은 타이완(Taiwan·대만)과 타이(Thai·태국)를 헷갈리기 십상이다.

    비록 눈에서도, 마음에서도 멀어졌지만 대만은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도 안 되는 가까운 이웃이다. 한국과 대만 관계는 애증(愛憎)이 교차한다. 다행히 무관심은 아니다. 서로 너무나 닮았기에 질투하고 시기하는 게 아닐까? “지구상의 가장 비슷한 두 나라”로 꼽히는 한국과 대만은 서로 배울 점도 많다. 경원시하기보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을 얻음으로써 강제로 헤어져야 했던 ‘옛 친구’ 대만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중국 일변도 외교정책을 펴면서 우리가 간과했거나 잃은 것은 무엇인지도 자문(自問)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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