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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조선의 호걸, 철학자, 정치인 정도전을 다시 본다

재상 중심의 완벽한 내각제 꿈꾼 야심가

  • 글: 최상용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 syongchoi@korea.ac.kr

조선의 호걸, 철학자, 정치인 정도전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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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호걸, 철학자, 정치인 정도전을 다시 본다

정도전

이상에서 볼 때 정도전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철했던 정치적 인간으로서 남다른 자질을 소유했던 정치가요, 정치이념의 실천에 헌신했던 직업정치가임은 물론이고, 실권을 가진 지도적 정치가로서 역량을 발휘한 정치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의 상황은 한마디로 위기였고 역사적 전환기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연속성보다 변화에의 욕구가 강렬했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상황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혁명적 위기상황은 경제 파탄, 도덕의 부패, 힘의 균형의 파괴로 나타난다. 고려말 경제의 파탄은 근본적으로 토지제도의 문란에 그 원인이 있었다. 당시는 토지소유가 극도로 편중되어 빈부격차가 심해 중농정책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자립을 포기한 이들은 농토를 버리고 전업을 하거나 유민이 됐고 심하면 도적이 됐다. 당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50%의 고율지대를 바치는 차경(借耕)제도에 있었다. 정도전은 “빈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며 역다자(力多者), 강자(强者), 호강자(豪强者) 등으로 표현된 지주의 횡포를 비판했다.

혼란기에 태어난 정치적 인간

이처럼 여말(麗末) 사회는 극심한 부의 불평등으로 계급간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가족·사회·국가 질서가 와해됐으며 그에 따른 도덕과 윤리체계가 붕괴된 ‘사회적 아노미’ 상태였다. 고려말의 아노미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불교와 유교의 반(反)도덕성이다. 특히 고려말 사회의 도덕적 부패는 고려 건국 이래 이념적 기반이었던 불교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불교는 원래 청정(淸淨)과 과욕(寡欲)의 종교임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대지주로서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삼봉은 사원이 “평민 10가(家)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탕진했다”고 적는다.

원래 고려는 신라말 신흥 호족세력이 중심이 돼 건국한 나라로 호족 세력간 힘의 균형 위에서 중앙집권체제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무신의 난을 계기로 중앙문벌세력과 지방호족세력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됐고, 그 결과 전자가 붕괴하고 후자가 득세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깨졌다. 그후 힘의 균형이 회복되지 않은 채 여말에 이르러 몰락 양인과 부곡민 같은 하층민까지 물리적인 힘을 배경으로 권력투쟁에 관여하게 됨으로써 정치체제가 몰락하고 말았다. 이처럼 고려말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전형적인 위기상황이었으며, 정도전은 그 위기상황의 한가운데에서 자기의 사상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해나갔다.



정치적 인격의 형성에는 그 인간의 정치사회화 과정에서 경험한 상대적 가치박탈이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가치박탈에 대한 보상의 수단으로서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인격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좌절과 울분의 경험이 정치가를 만든다.

그런데 정치적 인격 형성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가치박탈과 가치부여 사이를 떠도는 상태다. 즉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산계급이 입신출세의 온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중산계급의 ‘자유부동성(浮動性)’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중소지주인 중간층 출신의 정도전은 시대상황과 그 자신의 가치박탈의 체험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혁적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쌓아 나갔다. 정도전의 부계는 경상도 봉화지역 향리의 후손이다. 봉화 정씨의 시조인 정공미는 정도전의 고조부로서 호장(戶長)을 지냈고, 증조부인 영찬은 종7품∼8품의 하급관리였으며, 조부인 균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었다.

좌절과 울분 속에 성장

봉화 정씨로 중앙정부에서 관직을 지낸 사람은 정도전의 아버지 운경(云敬)이 처음이었다. 운경은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수령을 거쳐 공민왕 때에는 병부시랑 형부상서 검교밀직제학에까지 올랐다. 관직에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훗날 ‘고려사’ 양리전(良吏傳)에 오를 정도로 청렴결백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아버지 운경이 “평소 가산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공리에 담박”하였으며 “집에는 여유 있는 재산이 없어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으나 이를 담담하게 여겼다”고 말한다. 장남인 정도전은 아버지로부터 노약(老弱)한 노비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이다.

부계만 보면 정도전은 당시 중소지주출신 향리 집안의 평균 수준이었으나, 모계는 그가 중앙무대로 진출하는 데 장애가 됐고, 그가 신분상의 상대적 박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태조실록’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정도전의 어머니 우(禹)씨는 우연(禹淵)의 딸로 우연은 승려 김진과 여자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또 정도전의 부인 최씨는 최습(崔?)의 첩의 자식으로, 최습은 우연(禹淵)의 부인 연안 차(車)씨의 오빠 차안도(車安道)의 사위였다. 요컨대 어머니와 부인의 출신이 미천하다는 사실은 정도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공양왕 3년 10월에는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함에도 지나치게 높은 벼슬을 얻어 조정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정도전을 나주로 유배시키라는 내용의 상소가 있었다. 공양왕 4년 4월 정몽주는 김진양 등으로 하여금 “정도전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다”는 내용의 모욕적인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하던 동심우(同心友) 정몽주로부터 받은 수모는 정도전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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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상용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 syongchoi@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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