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12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9일 만에 공개된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생활 모습.
당장은 노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정지당했고 권좌에서 밀려 떨어질 수도 있는 벼랑 끝 상황을 맞았지만, 결국은 4·15 총선에서 안정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복권(復權)과 함께 집권 2기를 자신감 있게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탄핵이라는 최대의 위기사태가 기사회생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이 같은 예측은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한 1당을 차지하면서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이미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인 2003년 1월23일 민주당 지구당위원장 연찬회에서 이른바 ‘반(半)통령’ 발언을 통해 이번 총선의 정치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부여한 적이 있다.
“요즘 생각하면 내가 대통령 당선자인지, 반(半)통령 당선자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다음 총선에서 못 이기면 나는 반통령이고,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반권(半權)을 잡은 것이다.”
지금은 세인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발언이지만, 여기에는 임기 1년 만에 맞게 되는 국회의원선거 결과에 따라 남은 임기 4년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절박한 인식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57만여표(2.32%포인트) 차로 어렵게 대권을 쟁취했지만, 거대야당이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는 ‘이중권력’ 상태를 해소하지 않고는 노무현식 개혁의 추진과 완성이 어렵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임기 첫 해를 거대야당과의 쟁투로 지새워야 했고, 급기야 탄핵소추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다. 물론 노 대통령으로서는 얼마든지 야권과 타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6대 국회를 구시대 정치세력의 집합체로 규정하고 있었던 노 대통령은 타협의 미소를 보내기보다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사사건건 국회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반(反)의회주의자’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야권과 진검승부에 나섰던 것은 어찌 보면 집권 1년 만에 맞게 될 총선을 계기로 정치판 전체를 뒤엎는 것이야말로 노무현 개혁을 임기 내에 완성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완전한 대통령 권력의 확보냐’ 아니면 ‘반통령으로 머물 것이냐’라는 의미를 부여했던 4·15 총선 결과는 반통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박정희 시대를 마감한 이후 한국의 민주화 흐름이 본격화된 시기인 1981년 3월 11대 총선 이후 6차례의 총선에서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구 여권의 보수 우파 정당은 단 한 차례도 놓치지 않고 1당을 차지해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권력교체가 이뤄졌던 1997년 대선 이후 치러진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1당을 차지했던 것에 비춰볼 때, 이번 17대 총선 결과는 입법부에서도 20여년 만에 첫 ‘세력교체’가 이뤄졌다는 역사적 함의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 결과는 노 대통령에게 있어 자신이 추구해온 사회 전반의 개혁 구상을 가속화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총론적·대세적 관측이 구체적 현실로 나타나기까지는 여전히 험로가 남아있다.
당장 노 대통령으로서는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소추라는 ‘덫’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탄핵소추를 강행한 야권을 역(逆)탄핵함으로써 헌재로서는 ‘조속한 탄핵 기각’ 결정의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됐다. 총선 결과가 반드시 헌재의 판단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民心)을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과반선 확보로 인해 2003년 10월 노 대통령이 측근비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며 제안했던 ‘재신임’ 약속은 자연스럽게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돌발적인 탄핵사태 때문에 구체적인 재신임의 기준선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노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재신임과 연계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열린우리당의 과반선 확보로 재신임 문제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