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여의도 민주노동당 중앙당사 선거상황실에서 17대 총선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비례대표 후보자들과 당직자들이 44년만의 진보정당 원내진출에 기쁨의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인하대 정영태 교수(정치외교)는 민노당의 원내진출을 ‘우리 시대의 절박한 요청’이라고 평가했다. “대내외적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우리 사회는 이에 대처할 정치적 리더십을 갈구한다. 그런데 영·미식 자본주의를 신봉한 보수정당들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식으로 재벌을 개혁하려다 되레 한국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이제 국민은 ‘진보정치’라는 새 대안을 접하게 됐다.”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입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당장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가 거론될 것이 불 보듯 뻔하고, 동시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위협 등 그동안 도외시됐던 주제들에 대한 토론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역사적 전환점’인 것이다.
사실 민노당은 2000년 4·13총선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민노당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됐던 울산 북구 선거에서 후보경선에 나선 지역 노동운동계의 분열로 인해 원내 진출에 실패했던 것.
당시 울산 북구 선거인수 7만5000여명 중 현대자동차(현차) 노조 조합원이 2만5000여명에 달했다. 이는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를 뺀 수치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1만9430표를 얻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가 민노당 최용규 후보를 500여표차로 따돌렸다. 민노당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 지지자들이 등을 돌린 결과였다.
‘보수는 부패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했던가. 민노당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고 많은 사람이 술과 눈물로 밤을 지샜다. 심상정 민노당 중앙위원은 이날의 심경을 ‘창작과 비평’에 이렇게 썼다.
“…4월14일 새벽 여의도 민주노동당 당사는 침울했다.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로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탓도 있었지만 내부 정치만 잘 됐더라도 진보정당 원내 진출이라는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자괴심이 컸다.”
민노당 원내 진출의 기초는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 때부터 착실히 다져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대선에서 노동계는 ‘국민승리21’을 내세워 노동자, 농민, 서민 대중을 대변하는 당 건설을 목표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출마시켰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 대중조직이 진보정당 건설과 선거 참여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앞선 진보정당 운동이 남긴 교훈인 ‘대중 지지기반’ 확보를 위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5년 후, 2002년 16대 대선에 ‘민주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꿔 또다시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첫 TV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방송공사(KBS)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건넸다.
“진보정당이 여기까지 오는 데 50년이 걸렸다.”
권 후보는 이후 각종 TV토론에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을 선보이며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권 후보는 16대 대선에서 95만7000여표를 얻어 3.9%의 득표율을 올렸다. 1956년 조봉암이 216만표(24%)를 얻은 이래 진보정당 사상 가장 많은 것으로, 15대 대선보다 3배나 급증한 대약진이었다. 1992년 이후 치른 몇 차례 대선에서 진보정당 후보는 1%대 지지율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초 민노당은 6~7%의 득표율을 기대했었다. 실제 3차 TV토론 뒤 권 후보의 지지율은 6~7%까지 올랐다.
그러나 투표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벌어진 정몽준 의원의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로 민노당은 민주당 못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의 기권과 사표(死票) 방지 심리 등으로 민노당 지지표가 민주당으로 옮겨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다. 관련 속보가 TV에 뜨자 민노당 홈페이지의 순간 접속 건수가 8만여건에 달해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이번만은 제발 노무현을…’에서 ‘한나라당 2중대’라는 씁쓸한 비난까지 줄을 이었다. 선거가 끝난 다음날엔 ‘권영길 후보를 찍으려고 했는데…. 정말 미안합니다’라는 글이 꼬리를 물었다. 정몽준의 폭탄선언으로 민노당이 ‘노 일병 구하기’의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