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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기고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의 독설 한마당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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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응당 그러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깨졌다. 미군을 비난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나,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냉전수구세력의 음모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저런 모순을 머리에 담아놓고 살아갈 수 있을까?

최근에 벌어진 또 다른 사건의 예를 들어보자. 말 많은 조선일보의 편집예술을 열렬히 성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이번에 방송위로부터 ‘주의’를 받은 MBC의 프로그램(‘사실은’)을 보았을 것이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 방송의 고약한 편집기술 또한 열렬히 비판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조선일보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편파보도이지만, MBC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꼭 집어 드러내는 공정보도라는 것이다. 정합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분열된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당파성

저들에겐 내가 아직도 럭비공처럼 보일 것이나 그 동안 나는 나름대로 저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먼저 나는 ‘저들도 호모 사피엔스인 이상 자기 행동을 규제하는 모종의 원리를 갖고 있을 것’이라 가정했다. 그리고 내 눈에 모순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동 속에도 어떤 일관성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관찰해 보았더니, 과연 그들에게도 일관성은 있었다. 논리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의 일관성. 말하자면 저들은 특정 사안을 놓고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로만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바라보면 그들의 언행 역시 대단히 일관적임이 드러난다.

우리 사회의 일관성은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정치적 고해(political commitment)의 일관성이다.

내가 시대를 너무나 앞선 나머지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하는 무슨 비범한 생각이라도 가지고 ‘왕따’를 당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하는 얘기가 그렇게 비범한 얘기던가? 내 것은 하나도 특이하지 않은 얘기, 너무나 당연해 진부하기까지 한 얘기,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얘기다.

유·불리를 떠나 사유와 언행의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게 뭐 대단한 주장인가? 이렇게 평범한 상식을 말하는 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회. 내게는 이 사회야말로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왜들 그럴까? 과잉 정치의식 때문이다. 가령 신문을 보자. 일부 보수언론은 버젓이 “대통령 잘못 뽑았다”는 내용의 칼럼을 게재하고 대통령이 내뱉은 말 한마디를 1면 톱에 올린다. 신문이라면 독자가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객관적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신문들은 필요한 정보는 누락시키고, 불필요한 정보는 과장함으로써 독자가 내려야 할 판단을 대신 내려주려 한다. 이로써 독자는 정보의 수용자가 아니라 정치적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 반대편은 어떤가. 거기에도 문제가 있다. 당파적 저널리즘에 대해 또 다른 당파적 저널리즘으로 맞서려 한다. 몇몇 인터넷 신문은 거의 여당을 위한 선전매체라는 느낌을 준다. 야당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행적이 의심스러운 김대업씨를 졸지에 사회적 의인(義人)으로 만들고, 야당 후보 아들과 같은 몸매를 가진 사람을 찾는다는 이벤트를 벌이며, 개혁당의 유시민씨가 출마한 동네에 그의 사진을 실은 무가지를 살포하여 그의 당선을 돕기도 했다.

정치의 과잉, 조직의 쓴맛

정치적으로 오염된 매체를 통해 견해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온전할 리 없다. 언론이 당의 기관지가 되어버리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히 당 기관원으로 전락한다.

거기서 그치는가. 이렇게 과잉 정치의식을 갖게 된 독자들은 다시 자신의 흥미를 채워줄 당파적 기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럼 언론은 이런 소비자의 요구에 응하여 더욱 더 센세이셔널하게 당파적 저널리즘을 실천하고픈 유혹을 받게 된다. 한마디로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정치의 과잉이 정작 정치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정치의식이 차고 넘치는 사회에, 정작 제대로 된 ‘진성당원’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한마디로 모든 사안을 당파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과잉 정치의식이 시민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한갓 동원의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치의 과잉이 사회적 소통에는 도움이 되는가. 그럴 리 없다. 당파와 파벌로 찢어진 사회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은 합리적 소통이다. 아마겟돈의 전장 속에서 당파의 차이를 떠난 합의의 장은 설자리를 잃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그 ‘공론의 장’을 확보하려는 이들은 이 넓은 사회에서 졸지에 철거민 신세가 된다.

싸움은 있어도 심판은 없다. 신문방송학과 없는 학교 없고, 언론학회가 한 둘이 아니고, 언론학자의 칼럼을 안 싣는 신문이 없다. 그런데도 ‘미디어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학자들은 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상징자본’을 먹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입술 서비스’나 해주고 있다. 이러니 언론감시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송두율 교수 사건 때 보수언론은 검찰의 피의 사실을 마구 공개했다. 하지만 이 반칙을 제지하는 언론학 교수는 거의 없었다. 외려 그들은 칼럼을 통해 송두율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이걸 보고 나는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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