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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고발

‘두 번 죽는’ 의료사고 피해자들

사고발생부터 사후대책까지 피해구제시스템 총체적 부실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두 번 죽는’ 의료사고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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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도 ‘실체 없는 자작극’으로 결론난‘민경찬 펀드’ 사건. 사건 당사자 민씨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한때 그에게 의료소송 상담을 의뢰했다 정신적·금전적 피해를 당한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서글픈 현실은 그늘로 남았다. 이 땅의 의료사고 환자와 그 가족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들이 피해구제로 이르는 길은 ‘머나먼 정글’이다.
‘두 번 죽는’ 의료사고 피해자들
“그날 이후의 삶은 제 인생이 아닙니다.”이행석(40·서울 신림동)씨는 2002년 6월6일 14개월 된 외동딸 효민양을 잃었다. 35세에 뒤늦게 결혼해 어렵게 얻은 딸인지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효민양은 이른바 ‘의료사고 사망자’다. 감기증세로 동네 소아과를 3차례 찾았던 효민양은 “호흡을 힘들어 하니 종합병원에 입원하는 게 좋겠다”는 소아과 원장의 권유로 B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효민양은 치료과정에서 계속 호흡곤란 상태를 보이다 입원 후 18시간 만에 숨졌다.

B병원 전문의 K씨 등 담당의사 2명을 형사고소해놓은 이씨는 소아의 천식 또는 기타 호흡기질환에서 가장 중요한 검사가 동맥혈가스분석검사임에도 효민양이 호흡곤란을 시작해서 호흡부전-심폐부전-사망으로 진행되는 동안 의사들이 단 한 번도 이 검사를 시행하지 않는 등 적절한 진단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생업도 팽개친 채 딸의 의료사고 해결에 매달리느라 8000만원의 빚까지 져 생활고와 무력감에 빠진 이씨는 결국 지난 2월 부인과 이혼했고 끝내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 나버렸다. 삶의 의욕을 잃은 채 학원강사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이씨는 오로지 딸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겠다는 단호한 결심만 하루하루 굳혀가고 있다.

“병원측이 위로금 조로 1억5000만원을 주겠으니 형사고소를 취하해달라는 제의를 해왔지만 거부했습니다. 내가 아버지로서 바라는 건 돈이 아니라 딸의 허망한 죽음에 대한 병원측과 담당의사들의 진정한 사과입니다. 끝까지 법적 투쟁을 벌일 겁니다.”

의료사고 사망자 한 해 4500∼1만명 추정



대한민국에서 의료사고 피해자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피해를 제대로 구제받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구축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두 번 죽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선 국내에서 의료사고가 얼마나 발생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2001년 발표된 울산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이상일(44) 교수의 논문 ‘의료의 질과 위험관리’에서 국내에서 해마다 의료과실로 숨지는 환자가 4500∼1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되긴 했지만, 이는 미국에서 개발돼 사용중인 의료사고 사망자 추정모델을 국내 현실에 적용해 산출한 추정치다. 따라서 학자들은 미국보다 의료비를 훨씬 덜 쓰는 국내 현실을 감안할 때 실제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의료사고 건수는 더욱 많을 것으로 분석한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하 소보원)에 접수되는 의료서비스 불만관련 상담 및 피해구제요청(괄호 안) 건수만 봐도 이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연도별로 보면 2000년엔 9776(450)건, 2001년은 1만2139(559)건, 2002년은 1만1296(727)건, 2003년의 경우 1만2822(661)건으로 소보원이 의료서비스에 대한 피해구제업무를 시작한 첫해인 1999년(4∼12월 상담 5670건, 피해구제요청 273건)을 제외하곤 매년 1만건 안팎의 상담실적을 보이고 있다. 올해의 경우 1∼2월에만 상담 2098건, 피해구제요청 53건이 접수됐다.

소보원 분쟁조정2국 권남희 과장은 “소보원을 통하면 의료소송에 의하지 않고도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예전엔 진료행위로 인한 부작용이나 후유증 등 비교적 경미한 의료사고와 관련한 피해구제요청이 많았는데 최근 2∼3년 동안은 사망, 장애 등 중한 사고에 관한 구제요청이 늘고 있다”고 밝힌다. 소보원에 대한 피해구제요청은 의료사고 피해자와 병원측간 합의가 성사되지 않을 때 소보원이 조정에 나서는 것이지만, 강제력이 없어 사실상 해당의사나 병의원이 조정에 불복하면 더 이상 도움을 얻기 힘들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의료사고 관련소송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사법연감의 의료소송 증가추이를 보면 1992년 82건에 그쳤던 의료소송이 2002년 882건으로 10배 이상 폭증했다.

‘더 이상 수사할 가치가 없다’

의료소비자들의 권리의식이 향상되면서 이렇듯 의료사고 대응방식도 과거의 ‘체념’과 ‘포기’에서 ‘적극적 문제제기’로 급전환하는 추세다. 하지만 막상 의료분쟁을 직접 체감하는 피해자들은 피해구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신속’ ‘공정’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험난하기 짝이 없는 ‘가시밭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의료사고를 둘러싸고 대체 어떤 구조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통상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피해자들이 밟을 수 있는 길은 대략 3가지로 귀결된다. 병원측과 서둘러 합의하거나, 소보원 혹은 보건복지부 등을 통해 분쟁조정을 도모하거나 아니면 담당의사나 병원을 상대로 형사고소 또는 민사소송에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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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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