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글라이스틴 “‘2등 시민’ 전라 도민의 지역주의가 폭동 불렀다 ”

  • 글: 이흥환 美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4-04-28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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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사의 어느 구석을 들춰봐도 미국의 흔적은 또렷하다. 5·18의 광주도 예외가 아니다. 1989년 6월 미 국무부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 성명서’를 내놓았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이었다. 한국에서 광주를 직접 겪은 미 행정부의 두 고위 관리인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도 각각 비망록 형식의 저서를 통해 나름대로 광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귀한 자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광주가 흘린 피의 진실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1980년 5월 주한 미 대사관은 한 달 동안 매일 평균 3∼4건의 비밀 전문(電文)을 워싱턴으로 타전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 ‘광주 보고’ 전문 가운데 일부는 그의 저서에도 실려 있고, 한국 학계나 언론계에 일부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12·12 쿠데타에서부터 5·18의 발단과 전개, 그 이후 상황을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만을 통해 시간대와 날짜순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신동아’는 이번 호부터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 발굴과 분석 작업을 하고 있는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 한반도 정보서비스넷)과 공동 작업으로 5·18 관련 미 비밀문서를 통해 1980년 5월을 재구성하는 특집 연재물을 싣는다. 새로 발굴된 800매 가량의 광주 관련 미 비밀문서 가운데 가려 뽑은 1차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초기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의 오판, 5·18을 전후한 미국의 침묵과 분노, 진압군 특전사 병력의 이동 상황, 12·12로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 신군부와의 세(勢) 겨루기, 정보 공백 상태에서 판단마저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가장 균형 잡힌 광주 보고’라고 평가한 광주 체류 미 선교사의 현장보고 등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첫 회는 ‘글라이스틴의 오판’ 편이다. 집필을 맡은 KISON의 이흥환 편집위원은 ‘미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2002년)을 발간한 바 있다(편집자).》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24년이 지난 1980년 5월 광주의 참극을 되짚어본다. 1980년 봄, 미국의 역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미국이 한국 국내문제라는 이유로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미국과 광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좁혀질 수 없다. 오히려 이 거리를 제대로 측정하지 않고서는 1980년 봄은 물론 광주 비극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기 어렵다.

    5월18일 광주에서 시작된 평화로운 시위가 유혈 참극으로 막을 내리는 과정에서 미국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미국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하지 않았나? 이는 미국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미국이 마땅히 취했어야 할 행동이나 취하지 말았어야 할 태도에 대해 묻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1988년 여름 한국 국회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겨울 외무부를 통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 대사와 존 위컴 전 미 8군사령관에게 광주특위 출석 증언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해 12월2일 미 국무부는 이들의 특위 출석 증언을 거부하고 성명서로 답변을 대체했다. 국무부가 ‘배경 설명(Background er)’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이 성명서와 이를 보충해 발간한 ‘광주 백서’가 지금까지 미 행정부가 보여준 공식 입장의 전부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이 각각 자신들의 저서에서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고 ‘광주사태’라는 용어 사용이 신군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이 글에서는 1980년 5월 당시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쓴다 해서 과거사를 잘못 인식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해 ‘광주사태’로 표기함 : 필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국무부의 공식 문건인 ‘배경 설명’ 및 ‘광주 백서’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일부 민감한 부분은 사용한 어휘까지 똑같다.



    미 정부 입장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귀한 기록을 남긴 글라이스틴 대사나 위컴 장군도 하고 싶었던 말은 하되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킬 만한 구석은 피해갔다. 그들의 글은 국무부의 ‘배경 설명’이나 ‘광주 백서’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하다’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게 마련인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만으로는 광주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한계가 많다. 당시 상황을 기록해놓은 미 비밀문서들은 왜 이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다. 주한 미 대사관과 워싱턴의 국무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 국방정보국(DIA) 보고서 및 백악관 상황실의 회의록 등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한국 현대사에 한미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삽입되어 있는지 들추어본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에 발간된 ‘뒤얽힌 관계, 영향력의 한계(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라는 저서에서 광주사태를 ‘한국에 영원한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한국전 이후 한국사에서 평화로운 시기에 발생한 가장 심각했던 위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표현이다. 사태 발생의 주체,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모두 피했다.

    자신의 표현대로 글라이스틴은 ‘한국전 이후 가장 심각했던 평화시 위기’ 상황을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 자리에 있을 때 맞았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지 반 년 뒤로, 연이어 터진 12·12 군부 쿠데타의 여파로 긴장 상태였으며, 계엄령 하에서 ‘1980년 봄’의 사태 추이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때였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19년 후에 발간한 저서에서 광주사태를 10·26이나 12·12보다 더 심각한 위기라고 평가했던 글라이스틴은 사태 초기에는 그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국무부에 타전한 대사관 비밀 전문에는 5월18일 유혈 진압이 시작된 지 사흘이 지난 5월21일까지도 광주 상황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실시된 첫날인 5월18일 오전 9시, 주한 미 대사관이 워싱턴의 국무부로 타전한 3급 비밀 전문(제목 : 5월18일 오전 9시 현재 한국 상황)은 ‘오전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된 후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하다’라는 문구로 시작된다.

    「오전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된 후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함.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군 병력이 경계를 서고 있는 정부 주요 건물에 무장 병력 수송 차량이 주둔. 오전 2시, 군 병력에 대학 구내 진입 지시 하달됨. 일부 인사가 체포되었다는 보고 들어옴. 김대중씨 부인과 접촉했던 서방 기자들에 따르면, 다수 군인이 김대중씨 집을 샅샅이 수색한 후 김대중씨를 연행해 갔음.」

    이 문서는 김대중씨 외에 김종필 공화당 총재,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문익환 목사 등 주요 인사들의 연행 사실도 전하면서, 전문 마지막 부분에 광주를 언급하고 있다.

    「5월18일 오전 4시 이후 AFKN 방송을 통해 한국 내 미국 시민들에게 활동 자제와 계엄령 준수를 주의시키는 대사 명의의 성명이 방송되고 있음. 광주, 부산, 대구 소재 미 문화원 보고에 따르면 모든 것이 평온함.」

    소문 소문 소문…

    5월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국무부로 타전된 또 하나의 전문 역시 광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5월18일 서울, 학생/대학 상황’이라는 제목의 이 전문에는 ‘5월18일 자정 직후 서울의 모든 대학이 군 병력의 통제하에 들어갔다’는 내용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이 시간 광주에서는 이미 시위 군중에 대한 무력 진압이 자행되고 있었다.

    광주에서 시위 군중을 상대로 특전사 병력의 진압작전이 실시된 시간은 5월18일 오후 3시였다.

    이날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50여명이 특전사 부대원과 대치하던 중 투석전이 벌어졌으며, 오전 11시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작된 시위대의 연좌시위는 오후 2시가 넘어서면서 시위 군중이 1600여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이 진압에 실패하자 특전사가 투입됐다.

    주한 미 대사관이 국무부로 발송한 전문에서 광주사태가 처음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5월19일 오후 5시부터다. 다음은 ‘5월19일 오후 5시 한국 상황’이라는 제목의 전문 가운데 주요 부분이다. 이 전문은 광주사태 초기 상황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미국의 이런 시각은 이후에 전개된 광주사태 전반에 대한 인식의 바탕이 되고 있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5월19일 하루 종일 광주를 제외하고 서울과 한국 전역이 조용함. 서울의 공공건물과 언론사에는 병력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음. 신민당과 공화당 중앙당사에도 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음.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있으리라는 소문이 있으나 오후 5시 현재 아무 징후 없음.

    5월18일 광주에서 발생한 폭동(riots)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오후 3시 현재 수천 명의 군중이 길거리에서 시위중인 것으로 알려짐.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학생 한 명이 무장병력 수송 차량에 깔려 죽음.

    광주 폭동과 관련해 서울에까지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특전사 병력이 착검한 소총을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학생 희생자가 다수 발생했음. 일부 광주 시민은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북한인보다 진압군이 더 무자비하다(ruthless)고 말한 것으로 알려짐.

    교토통신 보도와 광주 미문화원 보고에 따르면, 상당수의 일반 시민이 학생과 함께 시위에 가담하고 있음. 오후 5시 현재, 3000명 가량의 시위대가 군인 한 명을 인질로 잡았다는 경찰 보고가 있음. 잔인한 진압 소문에 대해 경찰은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음. 이런 소문들은 서울 및 기타 지역의 학생 및 일반 시민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

    견해 : 서울에서 우리가 만나본 사람들 대부분은 계엄령 확대 조치에 실망하고 있음. 재야인사들도 실망감을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군부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는 입장임.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으며, 일부 소수 인사들은 정치인들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음.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미국이 군인들을 병영으로 복귀하도록 만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재결집해 군부 통제를 흔들 수도 있으리라고 보고 있음. 광주 폭동은 광주가 김대중씨의 출신지라는 점에서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음.

    보안사령부의 나중 보고에 따르면, 광주 폭동에 관련된 숫자는 소문보다 훨씬 적으며, 사실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함. 」

    이 문서는 광주사태에 대한 글라이스틴 대사의 초기 상황 파악과 관련해 중요한 점 세 가지를 알려준다.

    첫째, 글라이스틴 보고가 사실이라면, 그는 광주사태 첫날에 발생한 특전사 부대의 무력 진압 사실을 하루가 지난 뒤에야 소문 차원에서만 알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책에서 ‘광주 미 문화원 보고를 통해 주한 미 대사관이 광주에서 일이 터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간은 5월18일 밤’이라고 적고 있다. 18일 밤에 첫 보고를 받았고, 이튿날 소문을 듣기 시작한 셈이다. 광주 미 문화원의 첫 보고가 글라이스틴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시킬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은 앞으로 더 살펴볼 문서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5·18 초기 주한 미 대사관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역감정이 빚은 ‘폭동’으로만 인식하고 안이하게 대응했다. 사진은 당시 버스시위 장면.

    둘째, 신군부 통제하에 있는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광주사태를 ‘폭동’으로 인식했다. 폭동은 시위 군중이 일방적으로 무질서하게 ‘폭력을 행사(violent)’했을 때 붙일 수 있는 말이다. 계엄하의 한국 정부나 미 대사관의 광주에 대한 시각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5월27일 진압군 재투입에 대한 신군부와 미 대사관, 위컴 장군의 논의에서도 미국은 신군부에게 ‘최소한’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진압 병력 동원’에 동의했다.

    셋째, 사태의 원인, 동기 등 본질적인 문제가 파악되기 전에 광주가 김대중의 출신지라는 점과 전라도라는 지역 특성을 사태를 바라보는 중요한 틀로 인식했다. 이런 편향된 인식은 이후에도 그의 사태 판단에 크게 작용한다. 광주사태가 진압군 재투입으로 또 한번 피를 뿌리며 마무리되는 5월27일까지 국무부로 타전된 문서는 물론 이후의 사태 평가보고서에서도 전라도의 지역 요인은 자주 강조되고 있다. 글라이스틴의 책에서도 역시 이 점을 강조해놓았다.

    넷째, 사태 발생 이틀째까지도 광주보다는 서울 상황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책에서도 ‘서울 상황에 몰두해 있었다’고 쓰고 있다. 5월20일 하루 사이 국무부로 타전한 6건의 문건에서도 광주사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5월19일 박동진 전 외무장관과의 한국 국내 정치 토론’ ‘체포된 정치인 명단’ ‘5월20일 내각 사퇴’ ‘5월20일 한국 상황 보고’ 등의 제목이 달린 문서가 광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3장짜리로 된 ‘5월20일 오후 2시 한국 상황’ 문서 끄트머리에는 광주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광주를 제외한 서울 외곽 지역은 조용함. 광주에서는 질서 유지를 위한 군 병력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상당한 분노심이 유발된 것이 틀림없음. 광주 진압군의 잔악성에 대한 소문이 계속 서울에 유포되고 있음. 경찰 보고에 따르면, 민간인과 군의 충돌로 (농아자라고만 신원이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 1명이 발생했음. 대부분이 민간인인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보고도 있음. 다수 부상자 발생과 잔악 행위에 대한 소문은 진압군이 총검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해줌. 광주문화원 보고로는 착검한 병력을 보긴 했으나 무기가 사용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함.

    군 병력이 학생들을 색출하려고 가정집과 공공장소를 무작위로 수색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음. 군인들이 체포된 사람들(prisoners)의 옷을 벗기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어디까지 옷을 벗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함. 체포된 사람 수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음.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병력이 전라도와는 전통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경상도 출신이라는 소문 때문에 지역 적대감이 확산되고 있음. 광주문화원의 오후 1시45분 보고에 따르면 도심에 민간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음.」

    무자비한 무력진압 후 심각성 인식

    이때까지도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한 광주 관련 정보의 거의 모든 것은 소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미 국무부가 1989년 6월에 발간한 ‘배경 설명’ 성명서와 글라이스틴 개인의 기록에도 광주사태 초기에 주한 미 대사관이 접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광주문화원에서 보고되는 제한된 정보와 광주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는 미 공군기지로부터의 역시 제한적인 관찰 보고, 외신 보도뿐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위의 5월20일 오후 2시 발송 문서만 보더라도 진압군의 난폭한 진압에 대한 여러 종류의 보고가 있었음에도, 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 정치상황 보고에서 광주에서의 사태 진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미 대사관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21일부터. 그러나 이때는 이미 광주사태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뤄진 후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5월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진압보다는 5월21일을 사태의 정점(peak)으로 파악하고 있다.

    진압군의 구타 장면, 체포된 시위대가 발가벗겨진 채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는 모습, 군화로 구타당하는 젊은이의 모습 등 광주사태 초기의 현장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전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료는 5월19일 또는 20일의 기록물들이다. 20일 오후가 지나면서 강경진압에 분노한 군중의 시위는 MBC 방송국과 시청을 점령하는 등 과격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21일에는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사태 초기 소문 차원의 정보에 의존해 광주사태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미 대사관의 판단대로라면 시민군과 무장 병력이 대치하는 사태로까지 번진 5월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월21일 글라이스틴은 국무부에 총 6건의 문서를 타전한다. 청와대 동정, 신임 국무총리(박충훈) 임명 등 일반 보고 문서가 2건이고,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 보고가 2건이며, 나머지 2건이 광주 관련 보고다. 5월18일 이후 독립적인 제목으로 광주 관련 보고가 타전된 것이 이때부터이며, 5월21일자 문서에서 비로소 광주사태의 원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광주 폭동은 지역주의가 원인”

    5월21일 문서 가운데 첫째는 광주 투입 병력의 시위대에 대한 발포 사실을 언급한 문서다. 이때부터 보고되는 시민군의 공공건물 파괴와 진압군에 대한 공격 사실은 소문의 형태가 아니라 미 대사관이 파악한 ‘사실’의 형태로 기술되고 있다.

    「제목 : 5월21일 오후 2시40분 현재 한국 상황 보고서울, 부산, 대구 계속 평온 유지. 광주 관련 소문 계속 유포중.광주 : 5월20일 광주 도심에 시위 군중 8만∼10만 운집. 오후 7시 시위대가 특전사 병력과 공공건물 공격. 최소 5개 경찰서가 공격당함. 2개 방송국은 전소됨. 지방 계엄사령부와 시청, 우체국, 도청 등이 모두 포위당하거나 점령당함.5월21일 늦은 아침, 광주의 한 미군 관찰자는 진압군이 발포했다는 사실을 보고함. 서울을 출발한 한국군 2∼3개 연대가 광주에 투입되고 있음.」

    다음은 5월18일 이후 처음으로 광주 관련 제목을 독립적으로 붙이고 광주 관련 내용만 담고 있는 2장짜리 3급 비밀 문서다. 사태의 원인에 대한 언급도 처음으로 담겨 있다.

    「제목 : 광주 폭동과 향후 정치적 안정

    5월21일 오후부터 광주의 무질서 상태가 극도로 심각한 상태로 진행중임. 군부가 질서 회복을 위해 상당한 병력(considerable force)을 투입할 것으로 보이며, 향후 몇 년간 지속될 상처와 피해가 이미 많이 발생했음.

    광주의 구호들은 여러 면에서 서울이나 기타 지역의 구호와 유사함. 그럼에도 왜 이 남부 지역 도시는 심각한 폭동 상태에 빠졌으며, 정부의 공공질서 유지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는가? 아마도 격렬한 광주 폭동에는 지역주의가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전라도민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를 2등 시민이라고 느껴왔으며, 전라도의 정치 지도자인 김대중 구금 소식과 계엄 확대 소식을 접하고 민첩하게 정부 당국과 대치하려는 생각에서 시위가 가속화되었음.

    경찰과 군은 이들에게 특히 가혹하게 대응했는데, 이는 정부 당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으나 전라도민은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음.

    광주 폭동은 정치 환경에 반미 감정이라는 약물을 투여하게 되었음. 대다수 한국인들은 미국이 상황을 제어할 수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폭동의 부산물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구타와 방화가 일어난 점 때문에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훨씬 생생하게 깨져버렸음.

    폭도들은 미국이 한국군을 지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발생한 일에 대해 책임이 있는 쪽으로 연결시키고 있음. 바깥에서 악역을 찾으려는 이런 경향은 향후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이 문서에서도 글라이스틴은 광주사태의 발생 원인으로 지역주의를 거론하고 있다. 전체 5개항 42행의 문서 분량 가운데 35행을 할애해 사태 원인과 향후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지역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주한 미 대사관의 국무부 보고 문서의 끄트머리에는 모두 글라이스틴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전문을 글라이스틴 대사가 직접 작성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대부분은 정치 담당 직원이 작성하고 대사의 이름으로 보고되는 것이 전문 작성의 관례다. 그러나 대사의 의견과 상치되는 내용이 대사의 이름으로 보고될 수는 없으며, 대사에게 보도하지 않은 채 타전되는 전문은 있을 수 없는 것 또한 전문 작성의 관례다.

    5월21일에 타전된 전문 가운데 ‘광주 위기’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는 지역주의에 근거한 원인 분석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제목 : 광주 위기

    광주의 대규모 반란이 여전히 통제 불능이며, 최소한 지난 20년 사이에 국내에서 이와 유사한 사태에 직면해본 적이 없는 한국 군부에게 비상 상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음.

    직접적인 원인(immediate cause)은 김대중 및 전라도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 탄압인 것이 분명하지만, 현재로서는 모든 전라도민이 폭력에 가담하고 있으며, 뿌리 깊은 역사적 지역 적대주의를 반영하고 있음. 최소 15만명이 가담하고 있으며, 대규모 파괴가 이루어졌음. 최신 정보에 의하면,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와 탄약, 폭탄을 탈취했음. 한국군은 오늘 밤 군 병력을 시 외곽으로 철수시킬 계획임.

    위컴 장군은 (폭도들의 : 옮긴 이) 침투에 대비해 내부 비상 수준을 강화하기로 동의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데프콘 3에 해당하는 비상 대책을 강구하고 있음.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논의했음. 사태 진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만약 그가 그렇게 할 의지가 있다면, 김대중뿐인데 그는 구금 상태이고 아마도 큰 양보를 받아내지 않는 한 도움을 주려 하지 않을 것임. 다른 어떤 인물(hero)도 나서려 할 것 같지 않음.」

    시위 강경진압에서 시민군의 무장 대항이 전반부라면, 5월21일을 기점으로 광주사태는 후반부로 접어든다. 사태 전반부 내내 글라이스틴은 광주 문제를 심각하게 대하지 않았다. 제한된 현지 관찰 정보 때문이었다는 것이 글라이스틴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데이비드 밀러 광주 미 문화원장이 대사관과 전화로 처음 접촉한 시간은 글라이스틴의 말대로 5월18일 밤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점이었다. 심각할 만큼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으며 진압군의 난폭한 진압에 시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는 현지 상황도 전달되었다.

    “이 사태는 당신네 정부가 막아줘야 한다”

    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사태를 심각하게 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나 지난 5월21일이었다. 당시 미 대사관 무관이었던 제임스 영(James V. Young)은 2003년에 발간된 ‘한국 관찰(Eye on Korea)’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월20일 낮, 나는 약속도 없이 한 한국 육군 중령의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광주 출신이며 전두환의 참모를 지낸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차장으로 가더니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광주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해 현지 사정을 전해 들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 말에 따르면 상황은 끔찍할 정도이며 특전사 군인들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태를 당신네 정부가 막아줘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서둘러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5월20일 늦게까지도 우리는 광주의 비극이 어느 정도인지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돈 블로티(Don Blottie) 대령(제임스 영의 상관 : 옮긴이)과 봅 브루스터(Bob Brewster)에게 바로 보고를 했지만 광주가 그 정도로 악화되어 있으리라고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임스 영의 이 증언은 위에서 살펴본 글라이스틴의 국무부 보고 문서에 나타난 바와 일치한다. 제임스 영은 5월20일 오후라는 시점은 이미 미국이 광주 상황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글라이스틴은 광주사태 초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대응하는 속도도 늦었고, 워싱턴에 사태의 진실을 보고하는 것도 늦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무엇보다도 신군부가 주도하는 한국 정부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워싱턴의 대한국 정책을 충실히 따랐다. 5월18일과 19일 이틀 동안 광주의 참극보다는 서울의 정치 지형 변화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글라이스틴도 ‘서울 상황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한 미 대사관만 광주에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은 미 대통령선거의 해였고, 이란 인질 구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탓에 워싱턴의 봄은 이란 문제로 시끌시끌한 상태였다.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이 이란 사태에 대한 책임 등을 이유로 4월28일 사임했고 에드먼드 머스키가 새 국무장관이 됐다.

    미 국무무가 한국 문제로 고위 정책검토 회의를 처음 소집한 것은 광주사태가 후반기로 접어든 5월22일이었다. 이날 머스키 국무장관이 주재한 검토회의가 끝난 후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이 광주사태에 대한 미 정부의 입장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미국의 첫 공식 입장이었다.

    5월22일 광주 상황만 후반부로 접어든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미국에게도 압력이 가해졌다. 5월22일 워싱턴에 타전한 글라이스틴의 전문에는 지금까지와는 천양지차로 긴박감이 배어난다. 다음은 신임 머스키 국무장관에게 발송한 전문 가운데 주요 부분이다.

    「제목 : 광주 위기 관련, 미 정부의 후속 성명 건

    호딩 카터의 5월21일(미국 시간 : 옮긴이) 성명은 도움이 되었으나 광주에는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았음. 상황은 극도로 심각함. 점점 더 많은 한국인이 미국의 입장을 알고 싶어하며, 한국 정부도 우리가 성명을 발표해주기를 원하고 있음. 보다 중요한 것은 위컴 장군과 본인이 한국 군부로부터 우리 정부의 입장을 밝힌 문안을 검열하지 않은 채로 배포할 것이며, 상황이 완전히 악화되지 않는 한 최소한 이틀 내에는 광주에서 강압적인 진압으로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았다는 것임.」

    사태 호전될 것으로 오판

    미국은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한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은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성명서에 포함시킬 4개항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성명서는 내일 기자회견 때 발표해 내일 이곳 신문에 보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로울 것임.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야 함.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은 미 정부 발표문에 위의 2가지 사항 외에도 북한을 의식해 ‘미 정부는 한국 상황을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 세력의 기도에 대해서도 조약 정신에 의거, 강력하게 대처할 것임을 재천명한다’는 내용도 포함시키면서 ‘비화 통화기로 워싱턴 시간 오전 8시에서 8시30분 사이에 전화할 것임’을 머스키 국무장관에게 알렸다.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22일(워싱턴 시간)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한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오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군부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이 일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된다.

    광주사태 초기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대응으로 일관하던 글라이스틴 대사는 5월21일을 기점으로 ‘극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을 하게는 됐으나 사태 수습 과정에서 또 한번의 오판을 하게 된다. 광주 질서 회복을 위해서는 계엄군 재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신군부의 주장에 ‘최소한의 무력 동원’을 용인한 것이다. 사실상 이 ‘최소한의 무력 동원’은 이미 5월22일 머스키 국무장관 주재 하에 열렸던 고위 정책검토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었다.

    신군부로부터 광주 질서 회복을 위한 진압군 재진입 계획을 통보받기 하루 전인 5월23일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에 발송한 전문은 무력 진압의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쪽으로 파악하고 있다.

    「제목 : 5월23일 오후 3시30분 현재 한국 상황

    광주 상황이 늦은 속도이긴 하지만 호전되는 것으로 보임. 유재현 합참의장은 군 병력이 하루나 이틀 후 광주에 재진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음.

    견해 : 광주의 무질서 상태에 대한 무장 진압을 피하는 방향으로 지난 24시간 사이에 상황이 호전되었음. 하지만 진압군이 광주시로 평화롭게 성공적으로 재진입하기 전까지는 확실하지 않음. 광주시 재진입은 며칠 후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임.」

    연합사 병력 ‘떼주기’ 합의

    5월2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와 만났다. 이들간의 대화내용을 요약한 4장짜리 문서는 2급 비밀로 분류되었고 비밀 해제된 문서에는 박 총리서리가 말한 부분이 거의 삭제되었다. 주로 신군부에 대해 언급한 대목들이다. ‘국무총리서리와의 첫 회동’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요약 :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와 첫 회동을 가짐. 본인 요청으로 이루어진 회동이며, 본인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미국의 대 한국 정책을 요약해 설명했음. 한국의 5월17일 계엄령 확대 정책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말했음. 시위를 확고하게 진압하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정치 탄압을 수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결국 광주에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는 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는 견해를 피력했음.

    그리고 우리(박 총리서리와 글라이스틴 : 옮긴 이)는 한미연합사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광주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국 당국에 ‘떼주기(chop)’로 합의를 보았음.’」

    글라이스틴 대사와 박충훈 총리서리의 병력 ‘떼주기(chop)’ 합의가 있었던 날, 광주에서는 시위대의 무기 회수를 둘러싸고 시민군 내부에서 강온파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광주시 전체로 봐서는 시민들이 거리 청소에 나서는 등 안정이 회복되어가고 있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강경파의 주장대로 진압군 재투입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흘 후인 5월27일 오전 2시,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이 개시되었고 광주사태는 또 한번의 피를 뿌리면서 마무리가 지어졌다. 새벽 5시23분이었다. 5월22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렸던 고위 정책검토 회의(PRC, Policy Review Committee)에서의 결정 사항대로 ‘최소한의 병력’이 동원된 ‘질서 회복’이었다. 다음은 2급 비밀로 분류되어 있는 1980년 5월22일의 고위 정책검토 회의록 전문(全文)이다.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

    1980년 5월22일

    장소 및 시간 : 백악관 상황실, 오후 4시~5시15분

    주제 : 한국



    국무부 : 에드먼드 러스키 장관 (의장), 워런 크리스토퍼 차관, 리처드 홀부르크 동아태 담당 차관보/ 중앙정보국(CIA) : 스탠스필드 터너 제독, 존 홀드리지 중국 및 동아시아 담당/ 합참 : 데이비드 존스 장군, 합참 부의장 존 퍼스테이 중장, 육군 부참모장 존 베시 장군/ 백악관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데이비드 아론/ 국가안보회의 : 도널드 그레그/ 국방부 : 헤럴드 브라운 장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 닉 플래트,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데이비드 맥기퍼트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한 충분한 논의 끝에, 최우선 순위는 향후 무질서 상태가 확산되지 않도록 필요한 무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해 한국 정부가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합의에 도달했음. 일단 질서를 회복시킨 후에는 정치 자유의 수준을 한층 높이도록 한국 정부, 특히 군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음.

    브레진스키 박사는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음. 즉, ‘단기적으로는 지원하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정치 발전의 압력을 가한다’는 것임.

    머스키 국무장관은 결정지을 사안들을 제시했고 그 의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음.

    1. 공개 성명 : 5월22일 성명으로 당분간은 충분하다는 데에 동의.

    2. 광주 상황에 대한 미국의 자세 :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한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

    3. 미국의 추가적인 군사조치 : 현재는 아무런 추가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데에 동의. 한국민은 우리가 해당지역에 조기경보기를 신속하게 배치한 것을 좋아하고 있음. 북한에 대한 미국의 비상경계 조치는 올바른 판단이었음.

    항공모함 코럴 씨(Coral Sea)의 위치를 재검토중임. 현재는 필리핀 북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이동중임. 항로를 동해상으로 재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음.

    머스키 국무장관은 국방부에 차후 발생할 수도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필요한 추가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함. 특히 머스키 장관은 폭력이 광주 외곽으로 확산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와, 만약 한국군 재배치가 북한군 방어 임무에 지속적으로 위협이 될 경우 국방부가 대안을 준비해줄 것을 요청.

    4. 미국인의 방한 : 수출입은행 존 무어 총재의 방한 문제가 토의됨. 글라이스틴 대사의 의견을 구하고, 무어 총재가 일본에 도착한 후 최종 결정을 하기로 동의함. 다른 방한 일정을 취소함으로써 한국인들에게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실수가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회의 참석자들 사이에 형성되었음(OPIC의 리월른 방한이 이미 취소된 바 있음).

    5. 광주에서의 질서 회복 후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나 : 우리가 할 일은 광주 상황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점에 동의했음. 만약 사망자가 적게 발생하고 잘 처리될 경우 조용히 정치 발전에 대한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임. 만약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경우 정책검토 회의를 재소집해 방법을 강구하기로 함.

    6. 광주 이후의 목표 : 머스키 장관은 한국에서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긴 하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 목적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도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음.

    현재는 글라이스틴 대사를 재소환해서는 안 되며, 당분간 워싱턴에서 특사를 파견할 필요도 없다는 데에 동의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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