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21세기 국제정치 화두 ‘테러리즘’

야만의 얼굴인가, 억압과 분노의 정치적 분출인가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4-04-29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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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러란 무엇인가. 평화시대의 전쟁범죄인가, 이유 있는 정치폭력인가. 테러의 궁극적 노림수는 무엇인가. 테러리스트는 무슨 근거로 스스로를 ‘혁명가’ 또는 ‘자유전사’라 고집하는가. 테러는 우리 시대의 필요악인가. ‘테러와의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21세기 국제정치 화두 ‘테러리즘’
    21세기 국제정치의 화두는 ‘테러와의 전쟁’이다. 국제정치의 주요부분이 ‘테러와의 전쟁’을 축으로 돌아간다. 9·11 테러사건 뒤 주요 시사용어가 된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이 알 카에다 조직과 그 동조세력들을 상대로 벌이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전쟁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지성 레몽 아롱은 일찍이 저서 ‘평화와 전쟁, 국제관계의 한 이론’(1966년판)의 서문에서 “어지러운 시절은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troubled times encourage meditation)”고 쓴 바 있다. 이 글의 초점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주장대로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 시대를 살고 있다면 도대체 테러리즘이란 무엇인지, 테러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올바른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에 있다.

    “문명과 테러의 싸움에서 중립지대(neutral ground)는 없다.” 지난 3월 이라크 침공 1주년을 맞아 부시 미 대통령이 한 연설의 일부다. 부시는 “테러리스트인 적과 별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모든 국가가 미국이 벌이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중립지대가 없다는 부시의 주장은 매우 도전적인 이분법적 논법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중립지대가 없다는 말은, 부시 편을 들지 않으면 무조건 테러리스트 편이란 말이냐”고 반문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스트의 뿌리를 뽑을 때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거듭 말해왔다. 미 국무부 웹사이트의 테러 관련자료(www.state.gov/ coalition/terr/)를 들여다보면, ‘테러와의 전쟁’은 금세 끝날 전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 미 국무부는 “전세계적으로 연결망을 지닌 테러조직을 모두 찾아내 없애버릴 때까지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 밝히고 있다.

    9·11 테러 전에도 미국은 ‘테러리스트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왔다. 미 중앙정보부(CIA)와 연방수사국(FBI)에는 각기 테러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다. 다만 9·11 테러라는 엄청난 사건 뒤 부시 행정부가 벌이는 일방주의 강공책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용어로 떠올랐을 뿐이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미 MIT대 교수)를 비롯, 부시 행정부의 대외 강공책을 못마땅히 여기는 비판자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21세기 미국의 패권을 확장하는 이데올로기적 명분 또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테러의 개념을 정의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미국 국가기관들조차 조금씩 달리 정의할 정도다.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깔려 있는 테러리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국제사회의 오랜 과제였다. 테러가 일어나선 안 된다는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구체적 개념규정에선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던 것. 테러리즘의 정의를 놓고 국제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1937년 국제연맹(국제연합의 전신)에서 처음 이뤄졌다. 그러나 논의만 무성했을 뿐 결론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정은 유엔에서도 마찬가지다. 1999년 유엔총회는 결의안 51/210을 통해 국제테러리즘(international terrorism)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결의한 바 있다. “유엔총회는 모든 테러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적 행위로 간주해 이를 맹렬히 비난한다. 어떠한 테러행위도 그 정치적·이데올로기적·종교적·민족적·인종적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의 원칙적 선언일 뿐, 각론으로 들어가면 ‘테러’를 어떻게 개념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심각한 견해 차이가 깔려 있다. 미국, 이스라엘과 이슬람권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시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A국가에선 테러리스트인 사람이 B국가에서는 자유전사(freedom fighter)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는 인도 쪽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이지만 파키스탄 쪽에서 보면 ‘자유전사’인 것. ‘테러’라는 극한수단을 써서라도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뜻을 지닌 무장 자유전사들이란 주장이다. 체첸 분리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크렘린 당국의 눈에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체첸인들에게는 ‘자유전사’다.

    이 같은 논쟁은 비전투원을 공격하는 것만 ‘테러’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비정규 무장세력이 한 국가의 군사시설과 정규군을 공격하는 것은 ‘테러’로 여기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와 맞물린다.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하마스 게릴라가 서안지구나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을 공격하는 것을 테러로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테러의 정의를 규명한 자료들을 보면 테러가 뭔지 한마디로 정의하려는 것 자체가 섣부른 일임을 깨닫게 된다. 네덜란드 정치학자 알렉스 슈미트는 700쪽에 이르는 저서 ‘정치 테러리즘’(1999년판)에서 테러에 대해 무려 100가지가 넘는 정의를 내렸다. 슈미트는 1992년 유엔 범죄분과위 패널에 낸 한 보고서에서 테러에 대한 개념규정에 전쟁범죄에 적용되는 규정을 원용하자는 제안을 했다. 1949년에 만들어진 제네바협정을 기본으로 삼는 국제법의 ‘전쟁범죄’란 비전투원(민간인)에 대한 의도적 공격,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행위, 그리고 포로를 죽이는 행위 등이다. 슈미트는 이 같은 전쟁범죄 개념에 바탕을 두고 테러리즘을 ‘평화시의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규정도 모호한 구석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테러리스트’ 당사자는 전시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스스로를 전투원으로 여긴다.

    제네바협정을 비롯한 여러 국제법에 따라 전쟁 당사국들은 특정 종류의 무기(예를 들어 생화학무기)와 전술을 사용할 수 없고, 비전투원(민간인)을 공격하거나 포로를 죽이지 못하도록 돼 있다. 이를 어길 경우 ‘전쟁범죄’로 비난받게 된다. 그렇지만 테러리스트들은 흔히 비전투원과 인질을 죽이곤 했다. 그런 살상행위는 일반적으로 전투행위라기보다 테러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사자인 테러리스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민간인을 비롯한 테러대상자들의 죽음)보다는 정치적 동기를 강조한다. ‘테러’라 일컬어지는 데도 거부반응을 보인다. 또 당국에 붙잡혔을 경우 일반 범죄자와 달리 ‘정치범’ 또는 ‘양심수’로 대우해주길 바라며 더 나아가 ‘전쟁포로(POW)’로 다뤄주길 요구한다.

    그 한 사례가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지배세력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여온 아이레공화군(IRA) 소속 죄수들이다. 그들은 1981년 영국정부가 그 전까지 IRA 소속 죄수들에게 적용해온 ‘특수신분(정치범)’ 대우를 없애려 하자 “우리들은 일반 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라며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일로 보비 샌즈(당시 26세, 66일간 단식), 프란시스 휴즈(당시 25세, 59일 단식) 등 모두 10명이 끝내 숨을 거뒀다.

    테러는 ‘약자의 무기’인가

    2002년 1월부터 쿠바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안에 억류돼 있는 600여명의 ‘테러 용의자’들을 ‘전쟁포로’로 대우해야 하는가 또한 논란거리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간에서 붙잡힌 그들은 테러리스트 또는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서 1949년 국제사회가 맺은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쟁포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래서 지금껏 재판 없이 장기간 그들을 구금해왔다.

    관타나모 수용자 가운데는 오사마 빈 라덴의 경호원 출신도 있지만, 600여명 모두를 ‘테러리스트’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 당시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슬람권의 젊은이 다수가 ‘대미 지하드’(성전)를 벌이는 데 동참하겠다며 아프간으로 갔었다. 관타나모 수용자들 가운데는 그런 젊은이들도 끼여 있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수용자 가운데 다수는 단순 가담자일 것으로 본다. 2003년 12월 미 샌프란시스코 항소법원의 한 판사는 “국가 비상사태라도 미국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행정부의 기본권 유린을 막는 게 사법부의 의무”라며 관타나모 수감자들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혀, 수감자들에게 작은 희망의 빛을 비춰주었다.

    대다수 테러 분석가들은 테러가 ‘정치적 폭력’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각자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린다.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 자체도 미국(대(對)이슬람 과격파), 영국(대IRA), 이스라엘(대팔레스타인), 러시아(대체첸 분리주의) 쪽의 용어다. 그 반대편에 선 세력의 시각에선 ‘민족독립투쟁’이자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흔히 테러는 ‘약자의 무기(weapon of the weak)’라 일컬어진다. 테러리스트는 ‘테러’말고는 마땅한 저항수단이 없다고 주장한다. “무장력에서 압도적인 국가조직(정규군과 경찰)에 맞서려면 테러는 불가피한 폭력”이라는 논리다. 결국 테러리즘이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담긴 상대적 용어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투쟁에 큰 동력이 되었던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당사자인 문귀동 경장과 전두환 정권에게 있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그저 ‘부천서 사건’ 또는 ‘부천서 권양 사건’이 적당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듯 같은 현상이라도 어떻게 이름 짓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테러를 둘러싼 명칭 논쟁도 마찬가지다. 공격을 받은 자의 눈에는 분명히 ‘테러’지만, 죽음을 마다 않고 자살폭탄 공격을 하는 무장세력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의 투쟁은 정치적 존립을 위한 ‘성전(聖戰)’이고, 그 와중에 죽은 사람은 ‘순교자’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을 겪은 프러시아의 전쟁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유명한 ‘전쟁론’에서 전쟁을 ‘다른 (물리적) 수단들을 동원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이라고 정의했다. 테러리즘도 마찬가지다. 폭탄 테러라는 폭력적 현상은 그 행위자의 열정과 분노라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됐다. 이 부분에 대해선 미국의 테러리즘 연구자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월터 라쿠어와 더불어 테러리즘 전문가로 이름난 브루스 호프만(미 RAND연구소장)도 저서 ‘테러리즘의 내부’(1998년판)에서 “테러리즘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원래부터 정치적”이라고 정의했다.

    CIA 부설 대(對)테러리즘센터(Counter -terrorism Center) 부소장 출신인 폴 필라도 저서 ‘테러리즘과 미 외교정책’(2001년판)에서 “범죄행위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건 사실이지만, 테러리즘의 기본요건은 정치적 요구 실현”이라고 말했다. 테러리즘에 대한 이런 개념규정이 미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테러 연구자들은 정치적 동기보다는 테러로 인한 피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방식엔 문제가 있다. 테러행위 자체가 곧 범죄라는 틀 속에서만 테러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테러 연구자들은 정치적 동기를 지닌 테러의 궁극적 목적이 “공포를 확산시켜 국가로부터 정치적 양보를 받아내려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따라서 테러 양상은 매우 잔인하다. “테러가 온건하게 벌어졌다”는 말은 어법상 모순이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 파급효과를 넓히려면, 시각효과와 아울러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테러는 결국 잔인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 9·11 동시다발 테러공격이 한 보기다.

    테러 연구자 브리안 젠킨스는 일찍이 ‘국제테러리즘과 국제안보’(1975년판)에서 “테러리즘은 극장(terrorism is theater)”이란 짧고도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테러리스트는 언론이란 공간을 거쳐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테러의 동기를 알리려 한다. 테러 공포를 확산시키는 데는 언론매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론보도가 뒤따르지 않으면 테러의 효과는 피해자 주변에 머물 뿐 일반에 퍼지지 못한다. 테러리스트는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폭력행위가 가능한 한 널리 보도되길 원한다. 언론은 테러사건이 났다 하면 득달같이 달려간다. 이처럼 테러리즘과 언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관계다. “테러리스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언론”이란 말도 있을 정도다. 빈 라덴과 그의 오른팔 알 자와히리가 잊을 만하면 아랍계 언론매체를 통해 대미 지하드를 부르짖는 녹화테이프를 내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언론과 테러의 관계를 꿰뚫어본 또 다른 테러리스트로 카를로스 자칼을 꼽을 수 있다. 전설적 테러리스트인 자칼은 1975년 빈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장을 기습 점령, 3명을 죽이고 11개국의 경제장관들을 인질로 납치할 때 일부러 시간을 끌다 TV카메라가 닿은 뒤에야 현장을 떠났다. 언론의 보도기능을 100% 활용했던 것이다. 미국의 테러 전문가들은 “빈 라덴 이전에 람지 유세프가 있고, 유세프 전에 자칼이 있다”고 말한다. 테러리스트로서의 경력을 말하자면 자칼은 빈 라덴이나 유세프보다 선배다. 유세프는 1993년에 발생한 뉴욕 세계무역센터 지하주차장 차량폭탄 테러(7명 사망)의 주범이다. 자칼은 1994년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수단 당국에 붙잡혀 프랑스로 넘겨져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테러’의 역사적 뿌리를 캐보면 처음부터 부정적 의미를 지닌 폭력을 뜻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긍정적 의미가 더 강했다. 18세기말 프랑스의 ‘테러의 체제’(regime de la terreur, 1793∼94년)는 프랑스혁명(1789년) 뒤 무정부주의적 사회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의 ‘테러’는 흔히 우리말로 ‘공포’라 번역되지만, 그것은 왕정이 무너진 뒤 혁명정부가 ‘인민의 적’인 반혁명세력과 불평분자들을 위협함으로써 권력을 다져나가려는 일종의 체계적인 통치수단이었다. 혁명정부의 지도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절대왕정의 잔재를 쓸어내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려면 ‘테러’라는 수단을 써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단언했다. “테러는 정의이자 덕(virtue)이다”(로버트 팔머, ‘민주혁명의 시대’, 2000년판에서 옮김)라고.

    역사 기록에 따르면, 기요틴(단두대)으로 4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는 1794년 여름 막을 내렸다.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 ‘테러’라는 프랑스 단어는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영어(terror)로 옮겨져 대중화됐다. 버크는 ‘프랑스혁명론’이란 책에서 “테러리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수천 마리의 염병할(hell) 사냥개들이 인민을 물려고 나섰다”고 프랑스혁명의 혼란상을 비판했다. 테러에 부정적 이미지가 심어진 것은 이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임을 알 수 있다(버크는 프랑스혁명 자체를 반대했다기보다, 영국의 명예혁명과 같은 단계를 거치지 않은 프랑스혁명의 급진적 조류가 영국으로 흘러들어올 경우의 혼란을 염려했다).

    미 국무부는 1983년 이후 매해 봄에 ‘글로벌 테러리즘의 유형들(Patterns of Global Terrorism)’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해왔다. 2003년 4월 발표된 ‘2002년 연례보고서’는 모두 36개의 ‘테러조직’을 꼽았다. 중동지역의 이슬람계 조직이 대부분이다. 하마스를 비롯,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서온 팔레스타인계 조직은 대부분 ‘테러단체’로 낙인 찍혔다. 반면 미 국무부가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지목한 이스라엘 쪽 무장조직은 ‘카하네 하이’ 하나뿐이다. 이 조직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헤브론의 이스라엘 정착촌에 근거지를 두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 온건한 이스라엘 관리들을 위협해왔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 동조자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보고서는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북한 등 7개국을 이른바 ‘테러지원국가’로 꼽았다(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라크와 최근 급격한 친서방 화해노선을 걷는 리비아는 곧 명단에서 빠질 참이다). 그러나 이란을 비롯한 당사국들은 테러행위에 대한 미국책임론을 제기해왔다.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리즘’에 미국이 관련돼 있고 이슬람권 반미운동(테러)의 원인제공자가 바로 미국이라는 논리에서다. 이란 외무부는 미 국무부 보고서를 비판하는 한 성명에서 “이스라엘의 시오니스트(Zionist) 체제를 무조건 지지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미국은 다른 국가들을 테러와 관련해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유대인 테러조직, 유엔 중동특사 암살도

    하마스를 테러조직이라 낙인 찍어온 이스라엘도 지난날 건국과정에선 테러행위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바 있다. 단적인 예가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1977∼83년 재임)다. 1978년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돌려주며 맺은 평화협상은 베긴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줬다(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공동수상). 그러나 베긴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보면 그는 적어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직후까지 테러리스트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의 테러 명분은 “하느님의 선민(選民)인 유대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이스라엘 땅을 되찾기 위한 거룩한 투쟁”이었다.

    베긴은 지금도 이스라엘 리쿠드당 지지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이다.

    필자가 뉴욕에 사는 유대인 친구에게 베긴의 테러행위 전력을 지적하자 그는 발끈했다. “베긴은 하마스와는 다르다. 그는 적어도 민간인들을 살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공격목표는 영국군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틀린 얘기다. 베긴이 이끈 이르군이 영국 군인만 테러의 제물로 삼은 건 아니었다. 절대 다수의 희생자는 팔레스타인의 현지 아랍인들이었다. 이를테면 1948년 4월 이르군은 ‘데이르 야신’이란 아랍인 마을 주민 2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는 철저히 베긴의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다름 아닌 테러전술이었던 것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이른바 독립전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대로 살던 집과 논밭을 버리고 피란 보따리를 싼 것은 이스라엘의 테러전술 탓이 컸다.

    필자도 중동분쟁 현지 취재과정에서 전설적인 이르군의 악명을 들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남부도시 헤브론에서 만난 한 노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이스라엘 무장조직들은 마을사람들을 쫓아내려고 빈집에다 수류탄을 던졌다. 피란을 가지 않고 집 안에 버티고 있다간 죽임을 당한다는 소문이 마을마다 퍼졌고, 그래서 우리도 피란길에 올랐다. 그 길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지역에 두고 온 땅과 집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빛바랜 문서와 열쇠꾸러미를 보여주며 눈물을 흘렸다.

    베긴말고도 유대인 테러리스트를 꼽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하나만 들면, ‘스턴 갱(Stern Gang)’으로 알려진 극우 유대인 테러리스트 아브라함 스턴이다. 그는 1948년 유엔이 팔레스타인 사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현지에 특사로 파견한 스웨덴 외교관 폴케 버나도트를 암살, 국제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말하자면, 판을 깨고 힘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테러전술이었다. 스스로를 ‘이스라엘을 위한 전사들’이라 일컬었던 스턴과 그의 부하들은 1940∼49년 에 여러 폭탄테러를 저지르면서 “우리는 자유,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저항과 해방을 목표로 투쟁한다”고 주장했다.

    아라파트·만델라에 끼친 알제리 충격

    일반적으로 국가가 현상유지(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테러리스트는 정치사회적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 테러를 통해 공포를 확산시켜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테러리스트의 목표인 것이다.

    메나헴 베긴을 비롯한 극단주의자들이 테러전술로 이스라엘 건국에 이바지한 것처럼, 알제리 민족주의자들도 테러전술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 역사적 사례로 꼽힌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62년)은 프란츠 파농이 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1961년 초판)을 통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식민지 종주국 프랑스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알제리 게릴라 저항조직 해방국민전선(FLN)은 처음에는 프랑스인을 겨냥한 테러를 가능하면 피하려 했다. 프랑스 식민통치의 상징적 존재들, 즉 식민통치기관 건물, 프랑스 주군둔 시설물과 경찰서, 프랑스 관리들과 친프랑스 알제리 협력자(부역자)들을 처단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그러나 전쟁 2년째인 1956년 6월 프랑스 점령당국이 FLN 죄수 2명을 기요틴(18세기 말 프랑스혁명 당시 쓰였던, 대형 작두로 머리를 베는 처형기구)으로 죽이자, FLN은 프랑스인들을 겨냥해 무자비한 테러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72시간 사이에 49명의 프랑스인이 죽었다. 대부분은 알제리에 머물던 프랑스 정착민들이었다.

    알제리 독립전쟁을 제대로 분석한 책으로 정평이 난 앨리스테어 혼의 ‘평화를 위한 야만적 전쟁 : 알제리 1954∼62’(1977년판)에 따르면, FLN은 테러전술을 폄으로써 ‘알제리 사태의 국제화’를 노렸다. 당시 FLN 지도자였던 람다네 아바네는 “우리 알제리인의 투쟁이 세계로부터 ‘잊혀진 전쟁’이 돼서는 안 된다. 테러전술이야말로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끌 수 있고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적을 10명 죽였지만 언론에 알려지지 않는 것보다는 적을 1명 죽이더라도 다음날 미국 신문에 알려지는 게 훨씬 낫다.”

    알제리 정착 프랑스인을 비롯한 숱한 민간인이 피를 흘렸지만, 결과적으로 그 테러전술은 옳았음이 증명됐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장군이 끝내 알제리 독립을 인정했던 것이다.

    ‘알지에의 전투’는 8년에 걸친 알제리 독립투쟁을 그린 흑백영화다(1966년작, 감독 길베르토 폰테코르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이 영화는 부녀자들까지 나선 알제리인들의 줄기찬 폭탄테러가 독립의 원동력임을 잘 보여준다.

    2003년 8월 미 펜타곤 특수작전국 고급장교들은 이 영화를 함께 보았다. 당시 이라크 주둔 미군은 반미 게릴라들의 기습과 폭탄테러 공격으로 날마다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영화를 본 고급장교들은 알제리 상황을 거울삼아 이라크 저항세력을 분쇄하기 위한 전술·전략을 다시 검토했다. 그 영화에서 펜타곤이 얻은 교훈은 “적의 내부 정보를 캐내 적을 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2003년 12월의 후세인 체포는 이런 교훈을 실천한 덕으로 보인다.

    알제리 독립투쟁에서 보듯, 테러는 제2차 세계대전 뒤 서구 식민지 착취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제3세계의 투쟁 수단으로 떠올랐다. 알제리 독립투쟁이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1950년대부터 알제리 저항운동가들과 꾸준히 만났다. 그들은 알제리가 독립되면 우리 팔레스타인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알제리인들이 승리할 것이란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들의 승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 여겼다”(알란 하트, ‘아라파트 : 정치적 자서전’ 1994년판).

    알제리 FLN 운동은 남아프리카의 백인 소수정권 퇴진과 흑백차별 폐지를 목표로 한 아프리카민족의회(ANC)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남아프리카의 ‘국부’로 추앙받는 넬슨 만델라도 회고록 ‘자유를 향한 긴 걸음’(1994년판)에서 “당시 알제리 상황은 백인 정착민들이 다수 흑인을 지배하는 남아프리카의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우리 저항운동가들의 모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식민지 자원 착취라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서구 열강의 시각에서는 테러가 부정적 의미겠지만, 민족해방과 자결을 쟁취하려는 피억압민족의 시각에선 ‘테러’가 자유를 위한 정당한 투쟁수단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의 차이

    ‘자유전사’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이 야세르 아라파트(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다. 그는 1960년대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이끌며 이스라엘에 맞서 게릴라 활동을 벌여왔다. 1972년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검은 9월단’이 뮌헨올림픽 선수촌을 습격해 11명의 이스라엘 선수가 숨진 2년 뒤(1974년 11월) 그는 유엔총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가 다른 점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에 있다. 올바른 투쟁동기를 지녔고, 침략자와 정착민 그리고 식민주의자들로부터 땅(land)과 자유를 지키려고 투쟁하는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일컬어선 안 된다.”

    아라파트가 유엔에서 연설한 때는 동서냉전의 시대였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제3세계의 테러리즘이 지닌 민족해방의 대의(大義)를 긍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적대세력인 소련의 크렘린 당국과 그 첩보기관인 KGB의 조종을 받는 것으로 보았다. 서구사회의 안정을 해치려는 공산권의 음모가 뒤에 깔려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테면 미 언론인 클레어 스털링은 저서 ‘테러 네트워크 : 국제테러리즘의 비밀전쟁’(1981년판)에서 아랍권을 비롯한 제3세계 테러를 ‘자유세계를 파괴하려는 음모의 결과’로 못박았다. 이는 1980년대 레이건에서 시니어 부시로 이어지는 미 공화당 행정부의 일반적 시각이기도 했다.

    좌익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를 마약으로 무너뜨리려 한다는 이른바 ‘마약 테러리즘(narco-terrorism)’도 논란거리다. 콜롬비아와 페루를 비롯한 남미 좌익 반군들은 마약 카르텔로부터 걷어들이는 ‘세금’을 주요 활동자금원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마약밀매조직으로부터 보호비 명목의 세금을 걷는 것은 혁명무장군(FARC)을 비롯한 콜롬비아 좌익 반군뿐만이 아니다. 우익 민병대 조직인 콜롬비아연합자위군(AUC)도 마약밀매조직으로부터 세금을 받고 있으며, 일부는 직접 마약거래에 개입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테러는 어떠한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1인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한다. 1995년 오클라호마 미 연방정부건물에 폭탄을 장치,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티모시 멕베이가 그랬다. 그는 미 연방정부에 대해 불만을 지닌 한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1991년 걸프전 참전용사였다. 미국 언론들은 멕베이를 ‘외로운 늑대’라 불렀다. 어떤 단체나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테러는 대부분 정치적 결사 형태를 띤 조직원에 의해 저질러진다. 콜롬비아의 좌익 반군 FARC처럼 조직규모가 크고 중무장을 한 게릴라 조직의 경우는 어떨까. FARC는 콜롬비아 국토의 4분의 1 이상을 지배하면서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등 준(準)국가기관 행세를 한다. 그러나 콜롬비아정부의 시각에선 어디까지나 ‘테러집단’이다.

    흔히 테러리즘을 ‘정치적 폭력(poli tical violence)’이라 규정하지만, 정치폭력이 모두 테러에 속하는 건 아니다. 전쟁도 따지고 보면 정치적 폭력의 형식을 띤다. 흔히 전쟁과 테러의 차이점으로 전쟁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무엇이냐를 꼽는다. 즉 전쟁의 주체는 국가인데 ‘테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비국가 조직(non-state actor)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국가도 테러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치 히틀러의 국가폭력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암살정책은 ‘국가 테러리즘’이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앞글에 나온 브루스 호프만, 월터 라쿠어 같은 미국 테러 연구자들은 테러의 개념을 국가가 아닌 정치적 무장집단이 저지르는 폭력으로 좁혀 본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테러가 일어나는가 하는 테러의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서구민주주의 국가엔 정치적 변혁을 추구하는 합법적 장치들이 마련돼 있다. 이를테면 선거혁명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국가를 상대로 한 정치폭력은 당연히 ‘테러’다.

    그러나 이런 접근방식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뿌리내리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분석이다. 정치적 욕구불만을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풀기 어려운 제3세계에 그런 테러 개념이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미국 연구자의 시각에서 이스라엘 국가테러리즘이란 개념이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약하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들은 국가가 테러를 폭력도구로 흔히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스탈린 치하의 옛소련, 그리고 중남미의 1970∼80년대 군사독재국가들은 테러를 통치수단으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1960년대까지 아프리카지역을 식민지로 거느리던 서구 열강들은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민족해방운동을 ‘테러리즘’으로 몰아붙여 탄압했다. 민족해방운동가의 눈으로 보면, 그런 압제는 다름아닌 기독교 문명국가들의 ‘국가테러’였다.

    하마스 야신의 테러균형론

    이런 배경에서 국가테러에 맞서는 테러균형론이 설 자리가 마련된다.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지난 3월20일 이스라엘군 헬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사망한 셰이크 아메드 야신은 2002년 5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자택에서 필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하마스의 저항을 ‘테러’라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테러’에 맞선 ‘테러의 균형’이다”라고 주장했다. 하마스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의 테러행위는 팔레스타인을 강제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국가테러에 저항하는 약자(팔레스타인)의 최소한의 대응이다.

    끝으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일제 침략세력에 권총 저격과 폭탄 투척으로 맞섰던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을 우리는 ‘테러리스트’라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민족자존과 독립이란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의사(義士)다. 같은 논리로, 미국이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은 무장집단 요원들은 자신들을 일컫는 그 이름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긴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야신은 “우리 하마스는 테러리스트 조직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저항운동가들을 당신네 한국인이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느냐”고 되물었다. 돌이켜보면, 일본제국주의 세력은 우리 독립투사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불렀다. 영어로 옮기면 바로 ‘테러리스트’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선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도 현재진행형이다. 글 맨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금세 끝날 전쟁이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영구(永久) 평화는 무덤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부시가 말하는 ‘테러와의 전쟁’은 영구 전쟁이나 다름없다.

    정치적 폭력은 왜 일어나는가, 무엇이 테러리스트에게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고, 끝내는 자살폭탄을 터뜨리게 하는가를 헤아리지 않으면 테러는 끝이 없을 것이다.

    지금 미 의회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에선 9·11 테러가 왜 일어났는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한창이다. 문제는 그 논의의 초점이 순전히 기술적인 부분들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로 요약되는 대중동정책을 비롯, 대외정책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9·11 테러를 당했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말하는 “What went wrong”은 “CIA나 FBI가 테러를 미리 기술적으로 막아야 했는데, 왜 못 막았느냐”는 것이다. 이래선 근본적으로 테러를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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