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과 테러의 싸움에서 중립지대(neutral ground)는 없다.” 지난 3월 이라크 침공 1주년을 맞아 부시 미 대통령이 한 연설의 일부다. 부시는 “테러리스트인 적과 별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모든 국가가 미국이 벌이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중립지대가 없다는 부시의 주장은 매우 도전적인 이분법적 논법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중립지대가 없다는 말은, 부시 편을 들지 않으면 무조건 테러리스트 편이란 말이냐”고 반문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스트의 뿌리를 뽑을 때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거듭 말해왔다. 미 국무부 웹사이트의 테러 관련자료(www.state.gov/ coalition/terr/)를 들여다보면, ‘테러와의 전쟁’은 금세 끝날 전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 미 국무부는 “전세계적으로 연결망을 지닌 테러조직을 모두 찾아내 없애버릴 때까지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 밝히고 있다.
9·11 테러 전에도 미국은 ‘테러리스트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왔다. 미 중앙정보부(CIA)와 연방수사국(FBI)에는 각기 테러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다. 다만 9·11 테러라는 엄청난 사건 뒤 부시 행정부가 벌이는 일방주의 강공책에서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용어로 떠올랐을 뿐이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미 MIT대 교수)를 비롯, 부시 행정부의 대외 강공책을 못마땅히 여기는 비판자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21세기 미국의 패권을 확장하는 이데올로기적 명분 또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테러의 개념을 정의하기는 간단하지 않다. 미국 국가기관들조차 조금씩 달리 정의할 정도다.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깔려 있는 테러리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국제사회의 오랜 과제였다. 테러가 일어나선 안 된다는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구체적 개념규정에선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던 것. 테러리즘의 정의를 놓고 국제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1937년 국제연맹(국제연합의 전신)에서 처음 이뤄졌다. 그러나 논의만 무성했을 뿐 결론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정은 유엔에서도 마찬가지다. 1999년 유엔총회는 결의안 51/210을 통해 국제테러리즘(international terrorism)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결의한 바 있다. “유엔총회는 모든 테러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적 행위로 간주해 이를 맹렬히 비난한다. 어떠한 테러행위도 그 정치적·이데올로기적·종교적·민족적·인종적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의 원칙적 선언일 뿐, 각론으로 들어가면 ‘테러’를 어떻게 개념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심각한 견해 차이가 깔려 있다. 미국, 이스라엘과 이슬람권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시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A국가에선 테러리스트인 사람이 B국가에서는 자유전사(freedom fighter)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는 인도 쪽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이지만 파키스탄 쪽에서 보면 ‘자유전사’인 것. ‘테러’라는 극한수단을 써서라도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겠다는 결연한 뜻을 지닌 무장 자유전사들이란 주장이다. 체첸 분리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크렘린 당국의 눈에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체첸인들에게는 ‘자유전사’다.
이 같은 논쟁은 비전투원을 공격하는 것만 ‘테러’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비정규 무장세력이 한 국가의 군사시설과 정규군을 공격하는 것은 ‘테러’로 여기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와 맞물린다.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하마스 게릴라가 서안지구나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을 공격하는 것을 테러로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