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시 행정부 핵심실세들에 밀려 2003년 3월 백악관을 떠났던 클라크는 최근 ‘모든 적에 맞서서(Against all Enemies)’란 책을 펴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책은 클라크의 직속상관이었던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비롯해 체니 부통령, 펜타곤의 양두마차인 럼스펠드와 월포위츠의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폭발성을 지녔다. 서점에서 책이 동나는 바람에 독자들이 헛걸음을 할 정도로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클라크는 이 책에서 “부시 행정부의 테러대책이 미온적이어서 9·11을 당했다”며 그와 관련된 비화들을 털어놓았다.
클라크 폭로의 요지는 ▲자신이 거듭 알 카에다 테러위험을 경고했지만 부시 행정부 실세들이 무시했고 ▲오사마 빈 라덴보다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 더 큰 관심을 보였으며 ▲9·11 테러가 터진 다음에도 빈 라덴을 비호하는 아프간 탈레반 정권에 대한 공격보다는 후세인 정권 전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특히 클라크는 “부시의 핵심측근들이 9·11 전 빈 라덴과 알 카에다 문제를 다루자는 자신의 건의를 별것 아닌 양 깔아뭉개 비극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폭로는 ‘전시 대통령(war time president)’임을 자처하며 전쟁내각을 꾸려가면서 재선고지를 노리는 부시에게 큰 타격이 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뒤 럼스펠드 국방, 파월 국무, 라이스 안보보좌관 등이 잇달아 미 언론매체에 등장해 클라크를 매도하고 부시를 옹호하고 나선 것도 그런 까닭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9·11 관련 청문회가 진행될수록 “클라크의 폭로가 편파적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간 전례가 없다”며 버티던 라이스가 지난 4월8일 증언대에 서서 3시간 동안 주고받은 문답도 사실상 클라크의 폭로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라이스는 정보기관들 사이에 정보교환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점이 있었음을 핑계삼아, “9·11을 막을 은빛 탄환(silver bullet)은 없었다”는 주장을 펴며 9·11을 막지 못한 책임이 주군(主君)인 부시에게 쏟아지는 것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클라크는 “9·11에 책임을 져야 할 부시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이라크전쟁을 일으켜 테러전쟁의 초점을 흐렸다. 그런 부시가 재선에 나서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부시를 향해 칼날을 겨누고 있다. 책의 주요내용을 살펴본다.-역자》

“알 카에다는 우리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그는 매우 능력이 뛰어난 자로, 미국 안에 세포조직을 두고 미 본토를 겨냥한 큰 테러 사건을 계획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는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같은 경고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체니는 언제나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 뒤로는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겠지만. 아무튼 체니는 “내가 직접 CIA로 가서 알 카에다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도 바라는 일이었다.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알 카에다 위협을 심각하게 여기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빈 라덴에 대해 토론하는지 모르겠어”
체니 부통령은 그 뒤 CIA 본부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그의 방문 초점은 대개 알 카에다가 아니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체제였다. CIA의 중간 간부들과 분석가들은 “체니 부통령이 제기하는 이라크 위협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분석 방향이 알 카에다가 아니라 이라크 쪽으로 조정돼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였다.
분명한 사실은 부시의 공화당 인맥이 백악관을 접수했을 무렵, 체니가 알 카에다 위협을 둘러싼 나의 경고를 똑똑히 들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라이스 안보보좌관이 주재하는 국가안보위(NSC) 회의에서 알 카에다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비책을 세우도록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매번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