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거함 ‘GM號’ 탑승 2년, 대우차가 아직도 고전하는 이유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입력2004-04-29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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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투성이 대우차가 GM에 매각된 지 꼭 2년이 지났다. ‘GM대우차’는 한국시장에서의 입지 확대, 경쟁력 있는 신차 개발능력 강화, GM 네트워크를 이용한 마케팅 활성화를 다짐하며 돛을 올렸다. 하지만 열매를 맺기에 2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까. 부분적 성과는 있었으나 아직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거함 ‘GM號’ 탑승 2년, 대우차가 아직도 고전하는 이유
    2002년 4월30일, 마침내 대우자동차가 팔렸다. 1982년 ‘대우자동차’ 이름을 내건 지 20년 만에, 1992년 합작회사이던 GM과 결별한 지 10년 만에, 1999년 8월 워크아웃에 들어간 지 2년8개월 만에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 GM에 매각되는 본계약이 체결된 것이다. 6개월 뒤인 2002년 10월17일에는 GM대우차(정식 명칭은 ‘GM대우 오토앤테크놀로지’)가 공식 출범했다.

    GM의 글로벌 네트워크에 편입된 지 2년. 대우차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면모를 일신하며 재도약의 발판을 다져가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당장은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운 형편이다.

    출범 당시 GM대우는 대략 세 가지 지향점을 제시했다. ▲한국 내수시장 점유율을 부도사태 이전 대우차 수준으로 끌어올려 입지를 넓힌다 ▲국내외 시장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춘 다양한 신차 개발능력을 강화한다 ▲GM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해외 판매 레버리지를 높인다는 게 그것. 그러나 세 번째 목표에서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준 것말고는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GM대우는 매각협상과 인수작업으로 어수선하던 2002년 내수와 수출을 합쳐 37만대를 파는 데 그쳤지만, 지난해에는 57만대로 늘어났고 올해는 80만대를 넘어설 전망이다. 연 80만대는 대우차 전성기 생산능력에 육박하는 규모다.

    판매실적이 증가한 것은 극심한 불황에 빠진 국내시장과는 달리 수출시장이 빠른 회복세를 보였기 때문. GM대우차 전체 판매실적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이른다. GM의 브랜드 파워를 업고 전세계에 걸친 GM의 유통망을 활용해 수출물량을 늘려온 덕분이다. 한동안 기능이 마비됐던 대우차 해외 네트워크도 조금씩 되살아나 수출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내수시장의 입지는 여전히 좁다. GM대우의 시장점유율은 10%에 불과하다. 부도사태 이전 30%대 점유율을 기록하던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현대·기아차는 GM의 대우차 인수가 결정되자 아연 긴장했다. ‘만년 3위’ 대우차를 멀찌감치 떼놓고 사실상 독점해온 시장 구도가 거함(巨艦) GM의 상륙으로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GM대우가 10%의 벽 앞에서 옴쭉달싹 못하는 사이에 현대·기아는 시장의 70%를 주무르며 독점력을 키우고 있다. GM대우는 선두 현대·기아를 위협하기는커녕 쌍용차와 업계 3, 4위를 다투며 탈(脫)꼴찌 경쟁을 벌이는 신세가 됐다.

    수출 회복, 내수 부진

    GM대우가 생산하는 차종으로만 좁혀 보면 점유율이 24%로 올라간다고 하지만, 이는 국내 경차 시장의 60% 이상을 석권하고 있는 마티즈의 고군분투에 힘입은 바 크다.

    대우차 시절에도 그랬지만 현재 GM대우가 생산하는 차종 중에도 마티즈말고는 ‘넘버 원’이 없다. 준중형차 라세티는 판매량에서 동급 1위인 현대 아반떼XD의 40%에도 못 미치고, 중형차 매그너스 판매량은 현대 EF쏘나타의 20% 수준이다.

    더욱이 지난해 정부는 2005년부터 경유승용차 내수판매를 허용하고 경차 배기량 규격을 현행 800cc 미만에서 1000cc 미만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경유승용차 기술력은 현대·기아에 뒤지고 800cc급 경차 기술력은 현대·기아를 앞서는 GM대우로선 이래저래 시장점유율이 더 위축될 처지에 놓인 것. GM대우는 마티즈 후속 경차(프로젝트명 ‘M-200’)의 막바지 개발단계에 들어가 있었으나 이 조치로 인한 출시 지연과 규격 수정 등으로 투자 손실이 불가피해졌다.

    GM대우가 내수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데는 최근 빚어진 레조 LPG와 마티즈의 리콜 논란도 한몫했다. 운전자들은 이미 지난해 상반기부터 레조 LPG의 엔진 결함과 마티즈의 냉각수 변질 문제를 제기하며 리콜을 요구했고 건설교통부도 자발적 리콜을 권고했다. 하지만 GM대우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버텨오다 지난 3월에야 제한적인 리콜 실시 방침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원성을 사는 바람에 GM대우는 기술력, 기업윤리, 위기관리능력을 의심받으며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경쟁력 있는 다양한 신차 개발능력을 강화한다는 대목도 확신하긴 어렵다. 물론 신차를 개발해 출시하기까지 적어도 3년 이상이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출범한 지 2년이 채 못된 GM대우를 이 부문에서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라세티는 GM대우 출범 이후 출시됐지만 대우차가 GM에 인수되기 전에 개발이 거의 완료된 상태였다. 따라서 2006년 출시 예정인 SUV(Sports Utility Vehicle)를 기획단계에서부터 GM의 손길이 닿은 첫 신차로 봐야 하기에 정확한 평가는 그 이후라야 가능하다.

    하지만 GM대우의 일부 임직원들은 지난 2년간 GM이 엔진 등의 핵심기술을 전수하는 데 인색했고 GM대우에 파견된 GM 임원들 중 정통 엔지니어 출신이 드물다는 점 등을 들어 GM의 기술개발 의지에 의문을 품는다.

    GM대우의 성적표를 작성하려면 옛 대우차의 실패 원인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부분이 얼마나 개선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중간평가’의 근거가 나오기 때문이다.

    대우차 붕괴의 원인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주도한 외부 차입 위주의 성장 일변도 정책,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는 ‘세계경영’이다. 대우차는 연 200만대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메이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1990년대 초부터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확장경영에 나섰다. ‘국내 100만대·해외 100만대 생산체제’가 목표였다. 자동차 보급기이던 당시 차 수요의 급속한 증가 추세가 계속되리라는 믿음도 확장 드라이브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대규모 라인 증설로 풀 라인업 구축을 완료한 199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업계는 공급과잉 시기로 접어들었다. 당시 국내 승용차 시장은 연 120만대 규모. 1개 업체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만한 시장을 두고 현대, 기아, 대우 3사가 각축을 벌였으니 결과는 자명했다. 경쟁력이 뒤처지는 2개 업체는 결국 떨어져나갈 운명이었다.

    자동차산업은 초기 투자규모가 큰 장치산업이라 설비 가동률을 높여 자금 회전을 원활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국내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무작정 생산라인을 돌려댈 수는 없는 일. 파격적인 무이자 할부판매 공세에도 한계가 있다. 대우차는 해외시장, 특히 제3세계 신흥시장을 돌파구로 삼았다. 동유럽, 동남아, 중국, 남미 등지에 거대한 생산·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밀어내기’에 주력한 것.

    출혈수출도 감수했다. 한창 밀어낼 때는 국내 판매가보다 20% 가까이 싸게 팔았는데, 자동차 가격에서 공임(工賃)이 차지하는 비중이 20%쯤 되니 마진은커녕 재료비만 겨우 뽑고 판 셈이다. 재무구조의 부실화는 불 보듯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해외 채무의 만기 연장이 거부되고 환율 하락으로 손실폭은 더욱 커져 결국 2년을 더 못 버티고 워크아웃 기업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대우차의 보다 근본적인 실패 원인은 규모에 대한 맹신에 빠져 기술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빠른 시간 안에 시장 지배력을 높이려고 생산설비와 판매조직 구축에는 무리할 만큼 집중 투자했지만, 그 밑바탕을 이루는 기술 투자에는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 모델 개발능력도 경쟁사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대우차는 1978년 산업은행과 GM이 50%씩 지분을 갖고 있던 새한자동차의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해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고, 1982년 사명을 ‘대우자동차’로 바꿨다. 1980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합리화조처’로 기아는 중소형 상용차 전문으로 일원화하고,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으로 이원화했다. 새한에게는 현대와 함께 승용차 업계의 양대 산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였지만, 이때도 독자 모델 개발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바람에 실기(失機)하고 말았다. 현대가 독자 모델인 포니로 승부를 건 데 비해 대우는 1986년 GM이 월드카로 개발한 오펠 카데트를 들여와 이를 바탕으로 르망 생산에 들어간 것이다.

    대우차의 독자 모델 개발이 부진했던 것은 합작사 GM의 입김 탓이기도 하다. 대우차를 단순한 생산 하청기지쯤으로 활용하려던 GM은 대우차의 신차 개발과 해외 수출을 가로막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마침내 대우차는 1992년 GM 지분을 사들여 GM과 결별했고 이후 뒤늦게 신차 개발에 열의를 쏟아 1996년 말 라노스·누비라·레간자 3개 차종을 동시에 내놓는 기염을 토했지만, 이듬해 불거진 외환위기로 오히려 부담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술은 사오면 된다”

    GM대우의 한 간부는 대우차가 경쟁사보다 기술개발에 소홀했던 배경을 CEO들의 철학 차이에서 찾는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산업자본으로 성장했기에 기술 도입이 여의치 않으면 돈과 사람을 쏟아부으며 직접 개발했다. 하지만 무역으로 기업을 일군 대우 김우중 회장은 ‘기술은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시장 선점을 최우선시한 그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가기보다는 일단 대규모 생산·판매 네트워크부터 깔고 시작했다. 기술은 나중에 용역을 주거나 사들이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연구인력이 800명에 달하는 영국 워딩연구소를 통째로 사들인 것도 김 회장의 그런 기술관(觀)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거함 ‘GM號’ 탑승 2년, 대우차가 아직도 고전하는 이유

    GM대우는 판매량 중 수출 비중이 80%에 이른다. 지난해 7월 인천항에서 열린 매그너스 북미 수출 기념 승선식.

    현대차는 1980년대 중반부터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를 크게 늘리며 기술개발에 매달린 결과 1991년 국내 최초의 독자 엔진(알파엔진)과 트랜스미션을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고, 이후 빠른 속도로 엔진 등 주요 부품 자립화와 독자 설계를 추진하게 된다. 현대는 이미 뉴EF쏘나타에 장착하는 준대형차급 델타엔진까지 자체 개발해놓고 있다.

    반면 대우차는 GM의 도면을 들여와 설계하고 엔진은 호주의 GM 자회사인 홀덴 등으로부터 수입했다. 이처럼 엔진을 바깥에서 가져다 쓰면 엔진 공급사에 이윤을 붙여줘야 하므로 자체 제작 엔진을 쓰는 현대차보다 자연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대우기술연구소 출신으로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라는 책을 펴낸 김대호씨는 “도면이나 시험·제조방법은 사올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는 아무리 엄밀한 시험과 검증을 거쳐 만들었어도 고객의 요구, 법규 변화, 소재·공법·설비 개선에 따른 원가 절감, 품질 향상 등을 위해 단종하는 순간까지 수백 건의 설계 변경이 이뤄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뇌 전체를 사올 수 없는 한 기술을 사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기술을 사오더라도 그 기술의 알고리즘뿐 아니라 그 알고리즘의 근거가 된 노하우를 흡수하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통해 독자적인 노하우를 쌓는 일을 소홀히 하면 기술의 개선, 개량이 어렵다는 것.

    김씨는 대우차가 기술의 글로벌 소싱을 통해 기술력의 ‘압축성장’을 도모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자사 엔지니어 육성을 통한 기술학습의 조직화를 이뤄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실패 비용 지출을 감수하고 엔지니어를 직접 육성하기보다는 선진 회사에서 완성된 기술을 사오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대우는 엔진개발 프로젝트의 경우 100% 용역을 줬다. 리카르도, 로터스, 포르셰 등 세계적 엔진업체들 중 대우가 거치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그러면서도 직접 배우려는 노력은 등한시했다. 현대는 1980년대 중반 알파엔진 프로젝트 기술용역을 리카르도에 주면서 5명의 자사 엔지니어에게 엔진 관련 교육훈련을 시키기 위해 13억원을 주고 따로 계약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우는 로터스에 엔진 설계와 시제품 제작을 120억원에 맡기면서도 100만달러에 불과한 엔지니어 훈련계약은 맺지 않았다. 단지 한두 명의 엔지니어를 로터스에 파견해 대우연구소와 로터스의 커뮤니케이션 기능만 수행토록 했다. 그러다 보니 외국 기술용역회사는 완성된 도면과 시제품 엔진은 대우에 줬어도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설계했는지에 대한 노하우는 넘겨주지 않았다.”

    현대와 대우의 ‘My Way’

    1980년 현대 정주영 회장은 일본 미쓰비시와의 기술제휴 협상이 가격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보고를 받자 “기술도 없는 주제에 왜 기술료를 깎으려 하느냐, 돈은 다 줄테니 기술이나 잘 가르쳐달라고 해라”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현대차의 기술개발 분야는 고루 발전했다. 컴퓨터 설계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1980년대에는 자동차 연구개발 과정에서 나무를 깎거나 주물을 부어 직접 차체 모형을 만들어보곤 했는데, 이 때문에 현대차는 설계, 공작, 금형에서 시작(試作), 테스트에 이르기까지 기계공업의 전영역이 보조를 맞추며 함께 성장했다. 현대차는 이렇게 개발한 기술을 부품업체들에 이전, 일찌감치 현대 협력사로 계열화해 육성함으로써 안정된 품질의 부품을 독점적으로 납품받을 수 있었다.

    반면 대우차는 주로 해외에서 도면을 들여와 설계만 조금 바꿔 개발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설계파트에만 주도권이 쥐어져 있었을 뿐 다른 분야의 기초 기술투자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결과 대우차의 시험 제작 및 평가 설비는 생산 규모가 무색할 정도로 빈약하다. 주행시험장 하나 없어 외국으로 차를 싣고 나가서 시험, 평가를 하느라 시간과 비용을 날리는 일도 허다했다. 전사가 합심해 고객이 원하는 차를 만들어낸 경험이 없다 보니 연구개발·구매·생산·판매조직 간의 불협화음도 심했다고 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부품업체를 확보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 심지어는 ‘비 오면 물 새는 차’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품질, 성능, 기능에서 기술적 차별성을 기하기보다는 규모와 직판체제를 통해 가격우위에 서는 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대량 생산 및 판매가 가능한, 고만고만한 성능과 디자인의 평범한 세단형 승용차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다양한 틈새시장 제품과 변종 모델로 소비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지 못했다. 대우차의 차종과 엔진 라인업은 생산능력이 절반밖에 안 되는 기아차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1997년 기아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던 때와 1999년 대우차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던 때는 사정이 판이했다”고 말한다.

    “기아는 부채만 탕감해주면 ‘만사 OK’인 상황이었다. 7종의 신차를 개발해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차 하나 내놓는 데 4년 가까이 걸린다고 보면 상당한 준비를 해온 셈이다. 하지만 대우차는 부채를 줄여줘도 수조원의 신규 투자가 필요한 형편이었다. 시장에 내놓을 만한 차가 없는 데도 국내외에 깔아놓은 생산·판매 네트워크가 앉은 자리에서 계속 돈을 까먹고 있는 구조였다.”

    합리주의 실험

    GM대우가 출범한 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의 하나는 경영 전반의 합리화 경향이다. 전형적인 미국 기업식 합리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것. GM은 기본에 충실하고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 회사다. 단기적인 성과에 연연해하기보다는 길게 보고 오래 버티며 좀체 실수하지 않는다. 김우중 회장과는 대조적인 스타일이다.

    이런 사정은 GM이 특히 파이낸스에 강한 회사라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GM은 자동차를 만들어 팔아서도 돈을 벌지만 세계 최대 자동차 할부금융사 GMAC 등 계열사를 통한 금융업으로도 그에 못지않은 수익을 올린다. GM에는 ‘CFO를 거치지 않으면 CEO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릭 웨고너 회장, 잭 스미스 전 회장 등도 모두 CFO 출신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재무파트의 입김이 강해 생산부문도 재무파트에서 짠 기획 아래 움직이며, 어느 파트에나 재무 인력이 투입되어 조율 기능을 담당한다.

    이런 회사다 보니 예산 관리에 매우 철저하다. 불필요하거나 불합리한 비용 지출은 엄격하게 제한된다. GM대우도 대관(對官)업무, 기업 이미지 광고, 홍보활동 등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판단한 부문은 조직을 축소했다. 예를 들어 공무원에게 2만원 이상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금지사항이다.

    판매부문에서도 현대차와 르노삼성차가 직영 세일즈 시스템으로 운영하는데 비해 GM대우는 딜러 체제로 전환했다. “자동차 회사가 차 잘 만들고 금융 잘하면 되지, 파는 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GM대우는 내수용 차의 경우 생산하는 대로 딜러인 대우자동차판매가 전량 인수케 해 재고관리 부담을 없앴다.

    출혈성 밀어내기 수출도 허용되지 않는다. GM대우 해외영업담당 간부는 “과거엔 차를 내다팔고도 현지 네트워크에 문제가 있어 대금을 못 받아내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요즘은 2~3개월 후면 정확하게 입금된다”고 했다.

    업무 프로세스가 명확해지고 있는 것도 경영 합리화의 산물로 볼 수 있다. GM대우 관계자는 “아직 임직원 개개인에 대한 직무분석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상당히 세분화, 전문화됐다”며 “그로 인해 업무 강도는 타이트해졌어도 비슷한 업무가 중복되면서 허비되는 시간이 많이 줄었고, 문제가 발생하거나 결과가 미진할 때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누구의 책임인지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변화상을 전했다.

    이에 따라 대개 수직 형태로나 이뤄지던 업무 커뮤니케이션에도 수평성이 보완되는 추세라고 한다. 가령 구매, 재무, 생산 등 여러 파트가 횡적으로 문제를 공유하며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통로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세분화·전문화의 함정

    그러나 GM의 기업문화가 반드시 순기능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업무를 잘게 쪼개 전문화하는 게 GM의 특징인데, 그렇게 세분화된 영역을 필요할 때 어떻게 통합(integration)해 내느냐가 과제로 남는다.

    자동차회사에서는 산업의 특성상 여러 부서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면서 그 접촉면 주변에 수많은 ‘빈틈’이 생겨날 수 있다. 고도로 세분화, 전문화된 조직은 높은 도덕성과 책임의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런 빈틈을 메우지 못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GM대우의 한 중간간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옛 대우차는 반경 30m를 커버하는 리베로형 수비수를 두는 데 비해 GM대우는 반경 5m를 전담하는 수비수들을 촘촘하게 배치하는 식이다. 따라서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합해 팀워크를 발휘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있다. 가령 문제가 발생해도 나한테만 요인이 없으면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한다. 자동차회사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개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책임소재를 규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업무의 벽을 허물고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는데, 자기 영역에 틀어박혀 ‘면피’하는 데만 급급해하는 사례를 자주 본다.

    대우차 워크아웃 시절만 해도 판매가 부진해 대책회의를 열면 너나 할 것 없이 활발하게 브레인스토밍을 벌여 하다못해 임직원에게 강매하자는 아이디어라도 내놓았다. 그런데 요즘은 내 일처럼 고민하기보다는 ‘판매 부진은 마케팅과 세일즈의 문제 아니냐’며 책임을 떠넘기는 분위기다.”

    그는 최근의 레조·마티즈 리콜사태도 결국은 이런 문화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애프터서비스센터 등을 통해 품질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되면 계통을 거쳐 상층부까지 전달한 후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신경 마디마디가 분절돼 있다 보니 커뮤니케이션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유관부서들의 협조를 구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부서가 함께 참여하는 회의에서는 좀처럼 결론에 이르기 힘들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개발중인 신차의 가격대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린다면 연구팀은 향후 3~4년간 들어갈 R&D 비용을 감안해 가격을 제안하고, 판매팀은 3~4년 후의 판매량을 예측해 적정가를 제시하며, 생산팀은 3~4년 후의 부품·소재 비용 등을 고려해 값을 책정한다. 그렇게 제안한 가격이 일치할 리 만무하다. 우리 기업 관행에선 논의를 거쳐 어느 선까지 차이를 줄여놓으면 CEO, 혹은 경험 많은 실무자가 결정을 내리고 끝내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각자의 전문영역을 중시하는 GM에서는 누군가에게 이니셔티브가 쥐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이견을 가진 부서끼리 회의를 갖도록 해서 수정안을 만들게 한 뒤 또 전체회의를 연다. 이러다 보면 의사결정이 한없이 더뎌지는 경우도 생겨난다. 하도 회의를 많이 해서 GM(General Motors Corporation)은 ‘General Meeting Corporation’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사무실에 뱀이 들어오면 이 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다음에 또 뱀이 들어오지 않도록 어떤 대책을 세울 것인가를 놓고 회의부터 연다는 회사가 GM이다.

    이에 대해 GM대우 홍보실 김종도 상무는 “컨센서스에 이르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친 연후에 일을 추진하면 그 속도가 훨씬 빨라진다”고 말한다.

    “받을 기술이 없다”

    라인업과 기술경쟁력에서 아쉬움이 컸던 대우차는 GM에 흡수된 후 무엇보다 이 부분에 대한 GM의 지원을 크게 기대했다. 특히 중형 승용차급 이상의 파워트레인(엔진, 트랜스미션 등 자동차의 구동부분)과 SUV, MPV(Multi Purpose Vehicle) 등 대우차가 취약한 기술 및 차종에서의 선진 기술 이전이 최대 관심사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듯하다.

    GM대우에서 신차 개발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간부는 “GM대우에 파견된 GM 임원 중에 탄탄한 엔지니어 경력을 지닌 인물은 한 명도 없다”며 “자동차회사의 근간은 기술개발인데 이에 대한 의지가 안 보여 GM이 도대체 어떤 전략을 갖고 들어온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GM의 생산관리 시스템이나 구매 시스템 등은 이미 도입됐지만, 이런 것은 사람과 물건만 있으면 언제라도 적용할 수 있거니와 GM 방식과 대우차 방식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 그렇지만 기술개발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 아니냐”며 답답해했다.

    GM대우 기술파트의 한 임원도 “엔진 등 주요 부품의 기술 전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지난 2년 동안 GM 기술자가 대우차에 들어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비아냥도 들린다.

    이런 사정은 당초 우려했던 대로 GM이 GM대우의 역할을 결국 아시아, 남미 등 신흥시장을 겨냥한 중·소형차 생산기지로 국한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짙게 한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김학주 자동차팀장은 “GM은 4%에 불과한 아시아시장 점유율을 10%대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하는 등 신흥시장과 유럽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GM이 생산하는 주력 차종은 북미시장에서 많이 팔리는 SUV, 밴, 픽업 등 덩치가 큰 차들이다. 신흥시장과 유럽시장이 선호하는 소형 승용차는 주종목이 아니기에 대우를 활용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들 지역은 르망의 원형인 GM 오펠이 커버해왔는데, 오펠은 차값도 비쌀 뿐더러 생산기지를 현지화할 경우 부품·기술지원 비용도 만만치 않다. 바로 이 대목에서 GM대우의 효용성이 돋보인다. 라세티, 칼로스처럼 신흥시장에 먹혀들 만한 수준의 소형차를 그만한 가격, 그만한 품질로 만들어낼 수 있는 회사가 GM 네트워크에는 달리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GM이 대우차를 인수한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GM대우 관계자는 “이런 정도의 중·소형차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대우차가 GM으로부터 지원받을 만한 기술도 없다. 파워트레인, 차체, 전장품 어느 분야에서나 대우차가 최고 수준의 가격·품질경쟁력을 갖췄다”고 잘라 말한다.

    “GM대우는 라세티를 중국에 CKD(Completely Knockdown·현지조립형 반제품) 방식으로 수출하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좋다. 라세티를 조립 생산하는 GM중국에선 다른 차종도 달라고 조르고 있어 내년부터는 매그너스를 조립 생산케 할 예정이다. GM으로선 헐값으로 인수한 대우차에 회사 이름 하나 빌려주고 얻는 혜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굳이 라인업을 늘리고 기술지원을 해주지 않아도 빼먹을 것이 많다. 무엇보다 자신의 약점 하나가 제대로 보완되지 않았는가.”

    더욱이 GM대우가 수출하는 차들은 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우 브랜드가 아니라 시보레, 뷰익, 스즈키 등 GM 브랜드를 달고 나간다. 이 때문에 GM대우가 GM의 하청공장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GM은 내년 초 2800·3600cc급 대형 승용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하지만 이 차들은 호주의 GM 계열사 홀덴으로부터 수입해 앞뒤 디자인만 약간 바꾼 것이다. 자체 개발은 2년 후에나 착수할 계획.

    따라서 GM대우의 진정한 신차로 가시권에 들어온 것은 2006년 초 출시 예정인 1500·2000cc급 SUV가 유일하다. 그나마 우여곡절 끝에 개발 일정이 잡혔다. 당초 이 차는 GM이 지분 참여를 하고 있는 이탈리아 피아트 계열의 디젤엔진 전문업체 FGP의 엔진을 장착하는 것을 전제로 개발됐다. 하지만 피아트가 계속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통에 협상이 결렬됐다. 유럽 경차시장의 강자인 피아트는 대우 마티즈의 유럽 진출로 시장을 많이 빼앗긴 바 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잠재적 경쟁자인 GM대우에 디젤엔진 원천기술을 쉽게 내주려 하지 않았던 것. 그렇다고 GM 본사에서 3500cc급 디젤엔진을 들여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GM대우는 새 파트너를 물색한 끝에 또 다른 이탈리아 업체인 VM모토리와 디젤엔진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했다. 이 바람에 원래 내년 6월에 나올 예정이던 SUV의 출시 일정이 반년 가량 연기됐다. GM대우는 오는 6월 전북 군산에 디젤엔진 공장을 착공해 내년 6월경 완공하고 2006년 초부터 생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디젤엔진의 핵심 부분인 커먼레일은 실린더에 강한 압력으로 연료를 분사하기 때문에 폭발을 일으킬 위험도 있다. 따라서 신차 개발 단계에서는 커먼레일을 실린더 등 엔진 주변 부품들과 최적의 조화를 이뤄내도록 세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악조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시험주행을 해보는 등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SUV를 처음 개발하는 GM대우로선 일정을 맞추기 위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수출이 잘 되고 있는 마당에 수출에만 신경쓰면 됐지, 현대·기아차가 70%를 장악한 내수시장을 파고들어 피를 흘릴 필요가 있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GM대우는 대우차 시절엔 국내에서 만든 차 그대로 수출했지만, 요즘은 수출 비중이 워낙 높아 수입사가 요구하는 대로 디자인 등을 수정해주고 있다. 또한 현재 개발을 검토중인 차들은 중국 공장의 생산 여건과 중국 소비자들의 기호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령 중국 소비자들은 과거에 한국 소비자들이 그랬듯 배기량에 비해 차체가 큰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차의 앞과 뒤를 조금씩 키우는 형태로 디자인한다는 것. 유럽형의 컴팩트한 스타일로 바뀌고 있는 한국시장의 선호 추세와는 거리가 있다.

    GM대우 개발파트의 한 관계자는 “GM이 한국시장에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아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수출시장 여건은 언제라도 악화될 수 있다. 내수시장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어야 그런 상황에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그러려면 기술개발과 다채로운 라인업이 관건이다. 지금 수출이 잘 되는 것은 대우차 시절 닦아놓은 네트워크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흐름을 계속 타기 위해서도 기술개발은 필수다. GM은 현재 GM중국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지금은 GM대우가 만든 차를 들여와 조립 생산하는 수준이지만, 몇 년 후면 자체 개발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GM대우와 GM중국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될 것인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GM대우는 자신만의 ‘쓸모’를 키워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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