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겨울남자’ 김추련 “배우 같지 않은 배우, 끼 없는 배우였죠 사실은”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4-08-26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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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남자’ 김추련 “배우 같지 않은 배우, 끼 없는 배우였죠 사실은”
    그것은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선 굵은 마스크와 탄탄한 육체미를 과시하는 남성성을 최고로 쳤던 1970년대 영화판 한복판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가녀린 섬세함을 지녔던 이 남자배우의 분열은. 겉으로 보기에는 끊임없이 사업을 일으키며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거친 삶을 살아왔지만, 안에는 이마에 주름살이 하나둘씩 생긴 지금까지도 남을 지극히 배려하는 소년 같은 다정다감함을 숨기고 있는 이 사내의 분열은.

    혹 자료용 사진이 없을까 염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겨울여자’의 스틸을 빠른우편으로 보내주겠다는 마음 씀씀이는 이제까지 다른 어떤 남자배우로부터도 발견할 수 없던 남다른 면이었다(그런데 이 자상한 남자가 혼자 산다니). 비슷한 남성적 매력을 풍기며 많은 여배우와 공연했던 이대근이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면, 김추련에게 연기라는 것은 언제나 강한 남성의 갑옷으로 재무장하는 ‘가면 놀이’나 다름없었으리라.

    그럼에도 우리의 뇌리에서 김추련은 늘 늠름하고 씩씩하고 건강하고 강인하다. 말론 브랜도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한 영화 ‘야시’에서 난폭한 방식으로 여자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나 권투선수로 분한 ‘밤의 찬가’에서 운동실력을 마음껏 뽐낼 때 그는 항상 여자들을 리드하고 세상을 리드하는 듯 보였다. 흡사 2004년의 권상우가 그러하듯 1970년대의 그는 운동으로 단련된 육체 그 자체로 여성들의 눈길을 끌어 잡아당기는 배우였다.

    뭐니뭐니 해도 배우 김추련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세상에 각인시킨 배역은 ‘겨울여자’의 우석기였다. 아직도 배우 김추련을 ‘겨울남자’로 회상하게 하는 이 작품에서 우석기는 터프한 외모와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닌, 70년대 여성들의 판타지를 모아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다.

    또 다른 70년대 배우인 ‘바보들의 행진’의 하재영이 꿈도 희망도 없이 세상을 부유하는 청춘의 그늘 쪽에 선 일종의 꿈꾸는 식물이라면, ‘겨울여자’의 김추련은 소박하지만 낙관적이며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선택하고 현실을 개조하려는 동물적인 남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강렬한 눈빛으로 버스에 달려와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대학생의 이미지는, 아마도 요즈음의 신데렐라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여성을 리드하는 멋있는 남자’의 원형과도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후 김추련의 행적은 바로 1970~80년대 한국영화의 비틀리는 궤도와 매우 닮아있다. 멜로, 액션, 코미디, 토속 에로물 등 ‘겨울남자’의 틀을 벗고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지만 결국은 작품의 선택과 배우로서의 변신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성적으로 능동적인 남자’라는 그의 이미지는 여성을 유린하거나 출세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악역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그런 악역을 소화하기에 김추련은 왠지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곤 했다(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자신이 세상에 악인으로 비치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하명중과 함께 한국영화의 암흑기인 1970년대를 관통한 대표적인 남자 배우라는 사실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지금 봐도 그 시절 김추련의 사진에서는 70년대 남자 배우들 중 가장 질박한, 그러면서도 한 마리의 늑대 같은 외로움이 뚝뚝 묻어난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텁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에는 한마디로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날것’이라는 이미지, 한국 영화배우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체취가 배어나온다.

    길들여진 야생?

    이제 그는 부산에서 노래를 하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것이 정말 편하다는 이 남자는 젊은 시절 그렇게 좋아했다는 음악을 이제야 하면서 한 마리 양같이 순한 중년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누가 야생의 김추련을 길들인 것일까. 한국영화의 굴곡인가, 세월인가, 혹은 그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여성성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앞으로도, 사랑을 얻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를 들이밀며 버스로 달려들던 그 남자 김추련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단지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이던 시대에 대한 향수, 요즈음 말로 하면 ‘시대적 퇴행증상’일지라도, 김추련이라는 배우는 그런 퇴행을 부추기기에 충분할 만큼 추억을 가득 안고 있는 남자다.

    -인상이 좀 변한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박력 있는 모습이었는데,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나이가 있으니까요. 힘도 많이 빠졌어요.”

    -기록에 따르면 1973년에 처음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뜨거운 영광’과 ‘악인의 계곡’이었죠.

    “개인적으로는 1974년 작품 ‘빵간에 산다’를 데뷔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 전에 했던 작품은 얼굴을 내밀기는 했어도 연습이나 마찬가지죠. 그렇게 따지면 1971년 무렵에 조문진 감독님이 만드신 ‘두 딸의 어머니’가 가장 먼저죠. 그때가 윤정희-문희-남정임씨 트로이카 시절이었는데, 제 역할이 윤정희씨 남자친구였어요. 잠깐 등장하죠. 그게 가장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옛날에 잘 못했던 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초년시절에 멋모르고 나갔던 영화니까요. 그래서 제 스스로는 ‘빵간에 산다’를 데뷔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조문진 감독님이 방송에 나오셔서 ‘내가 ‘두 딸의 어머니’에서 널 데뷔시켰는데 왜 데뷔작을 바꾸냐’고 꾸지람하시더군요.”

    -‘빵간에 산다’에서는 모범수를 연기했습니다. 작고한 여배우 우연정씨가 소매치기 역할이었고요.

    “모범수와 소매치기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죠. 남자주인공이 굉장히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한 지도반장이었는데,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교도소에서 일주일간 귀휴를 보내줍니다. 모범수에게 주는 특별휴가죠. 여자는 소매치기가 일종의 버릇이 되어서 몇 번씩이나 잡혀오는데 이 남자가 사랑으로 감싸준다는 줄거리의 러브스토리예요.

    주인공이 일주일의 휴가를 끝내고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 깊죠. ‘부베의 연인’을 연상시키는 영화라고 할까요. 제목이 ‘빵간에 산다’여서 언뜻 무슨 범죄영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랑 얘기죠.”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정말 보고 싶은데, 아쉽게도 이 영화는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더군요. 자료를 보니 경남 고성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중학교까지 고성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 부산에 유학 와서 동래고를 졸업했고, 이후 한양대 신문학과 재학중에 데뷔를 했습니다. 이것만 살펴보면 배우를 하기에는 참 안 맞는 배경이거든요. 경상도 출신에 장남에 신문학과에. 데뷔 무렵에 부모님이 영화 하는 것을 말리지 않으시던가요.

    “아버지는 제가 배우가 된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심하게 반대하시지는 않았어요. 시골에서 넉넉지 못하게 자랐지만 제겐 늘 언젠가는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어려운 살림에 아들을 부산으로 유학보내고 또 서울에 대학을 보내주시는데 차마 영화과를 가겠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어 신문학과를 간 것뿐이죠. 그렇지만 마음속에 묻어둔 영화계에 대한 미련은 끝내 버리지 못했던 거죠.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어요. 제가 어릴 때 고향인 고성 마을에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이 아예 없었어요. 읍내엔 극장이 있지만 저희 집은 면 소재지에 있었거든요. 가끔 장이 서면 천막 가설극장이 열리곤 했죠. 필름도 아주 낡아서 화면에서 비도 내리고 여기저기 잘리고 중간에 탁 끊기고…. 그래도 그런 영화가 그렇게 좋았어요. 황해 선생님 나오는 영화도 많이 봤고 액션물도 좋아했죠. ‘한많은 청춘’, 신영균 선생님의 영화들, 강대진 감독님의 ‘마부’ 같은 작품….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충무로를 자주 배회했어요. 사실 공부는 뒷전이었죠. 당시 충무로에 있던 ‘스타다방’ ‘맥심다방’은 배우나 스태프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찻집이었는데, 저는 학교 끝나면 집이 있는 왕십리로 가는 게 아니라 충무로로 출근을 했어요. 배우들의 얼굴이나 영화 촬영하는 것 구경하려고.”

    -배우가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당시만 해도 미남미녀만 배우를 하는 시절이어서 선뜻 나설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스태프로 일했습니다. 처음 연출부로 따라나간 영화가 장일호 감독님이 만드신 ‘흙’이었어요. 안개 피운다고 깡통 돌리는 일 같은 걸 주로 맡아서 했죠. 당시 충무로에는 ‘오스틴’이라는 큰 병원차를 개조해서 기재도 싣고 스태프도 타고 다니곤 했는데, 지겹다 못해 정이 들 만큼 타고 다니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영화감독을 자주 만나게 되면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속마음을 내비쳤죠. 그 무렵 ‘두 딸의 어머니’를 만든 조문진 감독님 동생과 친해지게 됐어요. 그 친구 집에 놀러 다니다가 감독님을 만났고, 그래서 결국 ‘두 딸의 어머니’에 출연하게 됐던 거죠.”

    그 남자, 우석기

    -배우 되기 전에는 음악다방 DJ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던데요.

    “제가 워낙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 무렵에는 젊은 학생들이 놀러 갈 곳이 몇 군데 없었는데, 주로 팝 음악을 소개하는 음악다방이 그 가운데 하나였죠. 판을 골라 틀어주며 곡에 대한 해설도 하는 DJ가 꽤 인기가 있었어요. 이화여대 앞, 덕성여대 앞, 숙명여대 앞… 여학교 앞마다 꽤 많이 팔려 다녔어요.”

    -20여년 전 인터뷰 기사를 보니 혈혈단신 상경해서 꽤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던데요. ‘체육관 한구석에 침대를 깔고 잤다’는 식으로. 아무리 봐도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아요.

    “꼭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 시대 연예 주간지들이 과장이 심했거든요. 나름대로 괜찮게 살았죠,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부는 뭐… 잘했으면 지금쯤 기자가 됐겠죠.”

    -결국 1971년 ‘두 딸의 어머니’가 실제 데뷔작이고 1974년에 ‘빵간에 산다’로 자리를 굳힌 셈이네요.

    “네. ‘빵간에 산다’로 그 해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을 탔어요. 지금의 백상예술대상이죠.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상영됐는데 그때 사람들이 처음으로 김추련이라는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죠.”

    -이후 1970년대 작품 중에 가장 두드러진 건 역시 ‘겨울여자’였죠. 1978년에 개봉해서 사상최대의 흥행을 기록했고요. 김호선 감독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김 감독과는 후에도 ‘밤의 찬가’ ‘겨울여자 제2부’ ‘열애’를 하셨죠. ‘겨울여자’에서 김추련씨가 맡은 우석기라는 인물은 장미희씨가 맡은 여주인공 ‘이화’의 두 번째 남자인 정치학과 학생이었습니다.

    “암울한 시대였죠. 박정희 정권 말기로 검열이 심했어요. 영화가 정치를 선동한다고 해서 엄청나게 가위질을 해대던 때였죠. 원작자인 소설가 조해일씨가 석기라는 인물을 내세운 것에도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어요. 원래 중심인물은 ‘겨울여자’인 이화가 아니고 우석기였던 거죠.

    우석기는 그 시절 70년대의 젊은이, 암울했던 시절의 운동권 학생을 상징하는 캐릭터였어요. 정치학과 학생이자 학보사 기자인 인물이 학교에서 잘려 군대로 보내지고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사실은 시대가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명쾌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작가의 그런 숨은 의도를 간파하며 영화를 봤어요. 그때는 영화나 신문을 보는 게 흡사 암호를 해독하는 것 같을 때였으니까요.”

    ‘겨울여자’의 명과 암

    ‘겨울남자’ 김추련 “배우 같지 않은 배우, 끼 없는 배우였죠 사실은”

    1978년작 ‘겨울여자’

    -영화를 봤지만 그건 미처 몰랐네요. 그래서 여주인공이 편지를 쓸 때 “석기씨 덕분에 꼭 알아야 될 많은 사람을 알았다”는 말을 했던 거군요.

    “그 대사는 당시 대학에서 주류를 이루던 운동권 학생을 의미하죠. 영화에서는 아예 운동권이라는 말조차 쓸 수 없었거든요. 심지어는 영화에 석기가 이화에게 ‘나 무기정학 당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것조차 운동권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검열에서 삭제됐어요. 자세히 보면 그 부분에서 영상이 조금 튀어요.

    그렇게 대사가 검열에 걸리니까 감독이 영상으로 표현한 부분도 많았죠. 예를 들면 석기가 군대 갈 때 머리를 빡빡 깎는데 헌병이 석기 앞에만 딱 서 있어요. 석기만 지키고 서 있는 거죠. 영화를 만들 때는 석기가 4·19 기념탑 앞에서 고민하는 장면도 찍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다 잘랐어요. 석기가 곤봉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은 좀 짧긴 해도 살아남았어요. 잘리느냐 마느냐가 영화 만드는 사람의 최대 고민이던 시절 얘기죠.”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 삽입된 음악이 모두 클래식이라는 점입니다. ‘환상의 푸른 옷소매’ ‘토카타와 푸가’ 오페라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앞의 두 곡은 이화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석기를 상징하는 테마 뮤직으로 쓰였더군요.

    “저는 그 노래를 석기의 테마로 사용한 것에도 감독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두운 시절에 대한 상징의 의미였을 거예요. 반면 장미희씨가 맡은 이화는 그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자기를 정말 원하면 잠도 자줄 수 있는 여성. 워낙 순결을 중시하던 시절이어서 대학가에서도 창녀다 성녀다 논란이 일 정도였으니까요.”

    여러모로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는 당대최고의 화제작이었다. 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이 46만명이라는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후, 그 기록을 깨고 58만5775명이라는 새로운 숫자를 남긴 것이 바로 ‘겨울여자’였다. 이러한 성공은 유신 말기 갈수록 피폐해지고 침체되는 한국영화에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지닌다.

    조해일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겨울여자’는 이화라는 한 여대생이 여러 남성과의 애정편력을 거치면서 삶에 대한 진실을 발견해나간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다. 이 영화는 당시 한 수 위로 쳐주던 문예영화나 막 퇴조하기 시작한 고교생 소재 학원물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여대생이 과감한 애정행각을 벌인다’는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한 주제를 선택해서, 여성의 성(性)을 소재로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그래도 그녀의 마음만은 순수했다’는 식의 퇴행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양날을 벼려낸 영화였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보면 ‘겨울여자’의 영화화법은 흥행성적에 비해 만족스럽다고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석기의 죽음을 음화로 처리하면서 그 충격의 강도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려 한다던가, 첫사랑의 아픔과 죄의식이 그 후 남성 편력의 면죄부가 된다고 강변하는 등의 설정은 특히 요즘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영화 속의 김추련, 실제의 김추련

    -‘겨울여자’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원래는 이덕화씨가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김추련씨가 새벽마다 감독을 찾아가서 악착같이 배역을 따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겨울여자’가 모 일간지에 연재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터에 영화화된다는 소문이 도니까 이화 역할이나 우석기 역할을 두고 배우들 사이에 경쟁이 심했어요. 김호선 감독이 신인 발굴을 잘하거든요. 이화 역은 썩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TV에 몇 번 출연한 적 있는 장미희씨로 결정됐죠. 이덕화씨는 그 무렵 임예진씨와 함께 ‘진짜진짜 잊지 마’ 같은 고교영화에 많이 출연했거든요. 그래서 ‘겨울여자’로 성인영화 데뷔의 계기를 삼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매니저가 감독을 쫓아다닌 모양이에요.

    그런데 감독은 나름대로 특이한 신인을 찾고 있었던 거죠. 김호선 감독의 전작 영화가 ‘영자의 전성시대’였는데, ‘빵간에 산다’가 바로 그 다음 프로로 국도극장에 걸렸어요. 김 감독님이 그 영화를 보고 저를 발견한 거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제가 우석기를 맡게 됐죠.”

    -공연할 당시 장미희씨로부터는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굉장히 똑똑한 여자였죠. 지금도 총명하잖아요. 배우가 갖고 있는 센스는 신인이라도 다 나타나는 법이거든요. ‘겨울여자’는 장미희씨에게 두 번째 영화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센스가 탁월한 연기자였어요.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연기력도 대단했고요.”

    ‘겨울남자’ 김추련 “배우 같지 않은 배우, 끼 없는 배우였죠 사실은”

    1987년작 ‘소금장수’(左). 1986년작 ‘젊은 밤 후회없다’(右).

    -‘겨울여자’가 크게 성공하면서 사람들이 김추련 하면 바로 ‘겨울여자’를 떠올릴 정도로 이미지가 굳어졌습니다. 그래선지 이후에는 그와 유사한 작품들, 그러니까 호스티스 멜로 계열의 영화를 많이 했어요.

    “그때 워낙 그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어요. 한 여자가 세 남자를 거치는 게 유행이라고 할 정도로. 당시는 지방에 의존해서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에요. 흔히 ‘지방장사’라고들 했죠. 여섯 군데 지방도시 극장에 판권을 미리 팔아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거죠. 1960년대 영화에 왜 신성일, 엄앵란만 잔뜩 나왔느냐 하면, 두 사람이 안 나오면 지방에서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영세한 업자들이 시나리오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었죠, 돈 한푼 없이. 사무실도 필요없었어요. 충무로 다방에 앉아서 스태프를 불러모은 다음 영화를 만들곤 했거든요. ‘겨울여자’가 히트한 뒤에 비슷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이어지고 제가 그런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지방에서 그런 작품을 선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영화를 하고 싶어도 받아주지를 않았어요. 다른 건 안 되고 호스티스물만 된다고 하니 별수가 없었죠.”

    -그래도 덕분에 유지인씨나 정윤희씨와도 공연을 했습니다. 8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와 모두 작업하는 진기록을 남겼는데요. 세 여배우를 비교하자면 어떻습니까.

    “정윤희씨와는 ‘꽃순이를 아시나요’를 함께 촬영했습니다. 원래는 라디오 드라마로 크게 히트한 작품이었어요. 정윤희씨의 첫인상은 엄청나게 예쁜 배우라는 거였어요. 한 원로 카메라맨이 ‘여배우는 완벽한 얼굴이 없는데 정윤희는 아무데나 갖다 놓아도 완벽하게 나온다’고 칭찬하던 게 생각나네요. 기억에 남는 것은 정윤희씨가 장미희씨에 대해 라이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장미희씨와는 ‘야시’와 ‘겨울여자’ 두 작품을 했는데 영화를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배우였습니다. ‘겨울여자’에 교수네 아파트를 쳐들어갔다 문이 잠겨 있으니까 옆집을 통해 창문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있어요. 꽤 높은 층이었는데 그 장면을 직접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충분히 할 수 있는 여자죠. ‘야시’에서는 감독이 눈 위에서 오토바이를 타라는, 좀 위험한 주문을 했어요. 평범한 스쿠터가 아니라 경기용 야마하 오토바이여서 꽤 위험한 장면이었는 데도 대역을 안 쓰고 직접 올라타는 거예요. 그런 당당함이 장미희씨가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이 된 거라고 봐야겠지요.”

    -내친김에 영화 ‘야시’ 얘기를 해볼까요. 굉장히 터프하게 여자를 리드하고 심지어 자기 소유로 만드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 인터뷰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고아 출신의 강한 사내 역할이 자신과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했더군요. 본인은 굉장히 섬세한 면도 있고 내향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그런 강한 연기를 하기가 힘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겨울남자’ 김추련 “배우 같지 않은 배우, 끼 없는 배우였죠 사실은”

    1982년작 ‘열애’

    “맞아요. 정말 그랬어요. 저는 아주 여리고 내성적인 편이거든요. 나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은 영화 속의 터프하고 와일드한 연기를 보고 ‘이건 아니다’ 그러죠. 영화와 실제행동 사이에 꽤 거리가 있는 편이었어요. 그런 부분에서 어려움도 많이 느꼈고요.”

    -의외인데요. 김추련 하면 얼굴부터 남성다운 이미지로 유명한, 영화마다 상반신을 노출하며 육체미를 과시하던 배우아닌가요. ‘밤의 찬가’만 해도 원미경씨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아예 수영장이고요. 본인의 심볼은 굉장히 남성적인 것, 육체적인 것인 데 반해 본인이 지향하는 것은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연기였단 말이잖아요. 이미지와 실제 삶이 충돌하면서 고통이 적지 않았겠어요.

    “충돌하는 부분이 많았죠. 물론 영화니까 시나리오에 따라서 연기를 하지만 늘 무언가 나하고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어요. 실제로는 섬세하고 내성적인 연기를 하고 싶지만 그런 역할은 아예 들어오지를 않았고요. 당시에는 카리스마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미지가 강한 역만 맡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성격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죠. 지금 제가 연기를 하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그런 부분이 작용할 거예요. 배우로서 더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롱런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충무로의 의리

    -어쨌든 이들 영화로 1970년대의 스타로 굳건히 자리를 잡은 뒤에는 몇 가지 사업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에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면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사회성 있는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연기는 아니었고요. 그 다음 영화들에서 맡은 역할도 대부분 힘이 없다고 할까, 개성이 부족했다고 할까 그런 느낌입니다.

    “그 작품에서 제가 맡은 역할은 부동산 사업을 하는, 별로 질이 안 좋은 사업가였어요. 악역이었죠. 난장이네 딸인 금보라씨를 탐내다가 결국은 돈으로 금보라씨를 유혹해 같이 자는 인물이요. 이후 영화들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던 건, ‘겨울여자’가 너무 강한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에 그에 버금가는 후속타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열애’ 같은 멜로 작품에서는 암으로 죽는 DJ를 연기했는데 그런 캐릭터가 사람들 뇌리에 뚜렷이 새겨지지 않았던 것 같고요.

    ‘열애’는 김호선 감독이 감독 겸 제작을 했고 부산을 소재로 한 영화예요. 부산MBC 라디오 DJ를 하던 백영모씨가 암으로 죽으면서 남긴 글이 나중에 발견됐는데 그 내용이 절절해 노래로 만들어졌어요. 바로 윤시내씨가 부른 ‘열애’죠. 노래가 워낙 히트하니까 영화로도 만들어진 거죠. 그러나 여러모로 여건이 썩 좋지 않았어요. 멜로물이지만 감동이 약했다고 할까요. 아내를 남겨두고 가야 하는 시한부 인생의 슬픔을 그린 영화였죠.

    흥행엔 실패했지만 대신 좋은 점도 있었어요.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오는 동안 멜로물을 굉장히 하고 싶었거든요. 해보니까 촬영하는 내내 감정의 흐름이나 시한부 인생의 정서 같은 게 가슴에 와 닿았어요.”

    -1980년대에 출연한 작품을 죽 훑어보면 ‘깜동’ ‘소금장수’ ‘옹기골 뽕녀’ ‘고추밭에 양배추’ ‘바람난 도시’ ‘매일 죽는 남자’ ‘젊은 밤 후회 없다’ 등이 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토속 에로물에도 출연했고요.

    그중 재미있는 것은 ‘소금장수’입니다. 김추련씨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사자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모습으로 나오거든요. 소박하고 인정 많고 나이 많은 사내 역할. 저는 오히려 그렇게 부드러운 역할에서 김추련씨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소금장수라는 직업 자체에 토속적이고 에로틱한 분위기가 담겨 있죠. 소금을 팔러 이곳저곳 다니면 과부들이 힘 좋은 소금장수에게 반하는. 어쩌면 그런 영화는 찍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꼭 돈 때문에 출연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옛날 충무로에서 빈대떡 한 접시 놓고 소주 먹던 시절에, 내가 어려울 때 함께 영화 했던 사람들과의 우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들이 감독으로 데뷔할 때 출연을 제안해오면 인간적으로 뿌리치지 못했던 거죠. 그들에게는 ‘겨울여자’의 김추련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던 거고. 이미지 관리를 잘 못했다고 봐야겠죠, 사실은. 연기자로서 나에게 마이너스가 된다면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끝내 마다하지 못한 건 성격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하재영씨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그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충무로의 인정이라는 게 있었어요, 어느 배우든.”

    콤플렉스였던 경상도 사투리

    -당시 인터뷰 기사를 보니 ‘소금장수’에서 데뷔 13년 만에 처음으로 목소리 녹음을 했다고 돼 있더군요. 그렇지만 비디오로 보면 김추련씨 본인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잘못된 기사죠. 1990년대 들어서 ‘301·302’를 찍을 때 처음 동시녹음을 했습니다. 사투리 억양이 있기 때문에 동시녹음이 아니면 제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후시녹음 시대에 배우를 한 게 행운이었죠. 사투리 억양은 적잖은 콤플렉스였어요. 지금도 선뜻 영화 하겠다고 나서기가 쉽지 않아요. 이상할 것 같지 않아요? 옛날 ‘겨울여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관객들한테 갑자기 사투리를 쓰는 김추련을 보여주면(웃음).

    그 시절에는 성우도 주연배우만 맡는 성우가 따로 있었어요. ‘겨울여자’에서 제 목소리는 유광진씨가 맡았죠. 이광식씨라고 신성일 선배님 목소리만 하는 분도 계셨고요. 보통 주연을 맡는 성우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편이었죠.”

    -정진우씨가 제작한 느와르 ‘비녀’에서는 암흑가 청부살인자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김추련씨는 소박한 인물을 많이 연기했습니다. 밑바닥 인생인 소금장수, ‘빗속의 여인들’에서의 고층빌딩 구두닦이 문호, 소매치기나 모범수 등등.

    “제 얼굴이 깔끔한 미남자 스타일은 아니니까 그렇겠죠. ‘빗속의 여인들’에선 빌딩 유리창 닦는 연기를 하려고 직접 로프를 탔죠. 감독이나 스태프들은 걱정을 많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젊을 때여서 영화 하다가 죽는다는 것에 겁이 없었어요. 그렇게 참 열심히 했죠. 한겨울에 물에 들어가거나 동굴에 들어가서 NG를 열 번쯤 내면 입이 얼어서 말도 안 나오거든요. 그래도 몸을 아끼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영화도 있었고 마땅찮은 영화도 있었지만 어쨌든 참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이미례 감독의 ‘고추밭에 양배추’에서는 코미디 연기를 통해서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원미경씨와 공연한 이 작품에서는 특히 아이들이 교가를 부르는 가운데 싸움을 하는 장면이 재미있어요. 그렇지만 코미디에서 김추련씨의 연기 임팩트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느낌도 들고요. 이 작품 외에도 원미경씨와 함께한 영화가 꽤 있었죠?

    “원미경씨와는 ‘밤의 찬가’ ‘야생의 처녀’ 등등 네댓 편을 찍었어요. 이미례 감독과는 ‘열애’를 찍을 때 연출부로 처음 만났어요. 서로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죠. 이 감독도 박철수 감독도 저에게 코미디를 하면 어떻겠냐고 권하더라고요. 당시 제 이미지에 그런 색깔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지금 보면 전혀 그렇지 않죠?”

    운명적인 어긋남

    -그런가 하면 액션물에도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철면객’에서 각시탈을 쓰고 다니는 연기를 했는데, 액션을 해보니 어떻던가요. 다른 액션영화에는 거의 출연한 적이 없던데요.

    “참 재미있게 찍었고 본 사람도 많았어요. 그 영화 때문에 제가 무술에 조예가 깊은 줄 아는 이들도 있고. ‘철면객’을 인상 깊게 보고는 저더러 무도인이 됐냐는 분도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사실 저는 기본적인 것만 하고 나머지는 대역을 많이 썼죠. 체격이 브루스 리를 닮았다면서 주변에서 자꾸 부추기니까 하기는 했는데, 나 자신은 그런 데 별 흥미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배우는 역시 액션보다는 감정의 선, 내면의 심리를 표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제게는 멜로 배우가 더 매력 있고 배우스럽다는 생각이 있었죠. 제 자신이 그런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고요.”

    필자는 이 부분에서 배우 김추련에게 ‘굉장한 어긋남’ ‘운명적인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나 무술 분야에 매혹을 느꼈다면 배우로서의 위상이나 입지에 지금과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의 마스크나 이미지는 분명 그런 분야에 정확하게 어울린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음에는 여성적인 면이 꽤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남성성도 있고 여성성도 있다. 김추련은 그 가운데 여성적인 부분이 더 많은 유형인 듯하다. 흔히 얼굴도 나이가 들수록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닮게 마련이라고 하지 않는가. 젊은 시절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중년의 외모도 그러한 김추련의 색깔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액션이 싫다면 차라리 섬세한 연기에 몰입하는 게 나았을 텐데, 갑자기 연기를 그만뒀단 말입니다.

    “연기를 그만둔 것은 사업 때문이었어요. 영화법이 바뀌면서 제가 ‘김추련 영화제작소’를 만들게 됐거든요. 주로 홍콩 느와르나 유럽영화를 수입했죠. 사업 시작할 때는 제작자와 배우를 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연기와는 점점 멀어지게 됐죠.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제작자가 영화에 출연하겠냐면서 배역제의도 안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세대가 변했죠. 너무 오랫동안 스크린과 멀어진 것 같아요.”

    고향으로 돌아가다

    -수입만 하고 직접 제작은 안 했어요?

    “인가는 받았는데 선뜻 할 수가 없었어요. 명색이 배우 출신이니까 제 이름을 걸고 하려면 좀 괜찮은 걸 제작해야잖아요. 대신 인허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억지로 남의 영화를 빌려온 적은 있었죠. 기록에 ‘제작 김추련’으로 돼 있는 것은 다 그런 영화들입니다. 이름만 빌려준 거죠. 영화사를 하려면 의무적으로 몇 편 이상 직접 제작해야 한다는 규정이 영화법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제작은 못 하고 외화만 서너 편 수입하다 실패했죠. 그 무렵 배우 출신이 영화사를 만드는 경우가 꽤 있었어요. 김지미 선배, 하명중씨, 저, 후에 신성일 선배 등등. 그 가운데 성공한 사람은 김지미 선배하고 하명중씨뿐일 거예요. 배우가 제작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은 일이거든요.

    이후에도 박철수 감독의 ‘301·302’ 등 몇 편 영화에 출연했는데, 역할이 좀 약했는지 빛이 안 나더군요. 물론 다시 하니까 재미는 있죠. 지금도 욕심 같아서는 큰 역을 맡아 해보고 싶지만 영화판에 기웃거리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에요. 가끔 ‘특별출연’이라고 잠깐 나와달라는 제의도 있지만 별로 나가고 싶지 않더군요. 배우가 나이가 좀 들면 주연은 못하고 특별출연 해야 하는 분위기가 안타깝죠.”

    -대신 요즘은 음악에 심취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음반을 내고 콘서트를 열었다는 소식도 있고요. 뒤늦게 가수를 하게 된 사연이 궁금한데요.

    “음반은 작년 초에 발표했고 작년 11월25일에 콘서트를 가졌죠. 8월21일에는 부산에서 디너쇼를 하려고 준비중이에요. 음악을 워낙 좋아해요, 직업가수라고 하기는 좀 그렇고. 작년 콘서트 때 어느 잡지에서 제목을 ‘가수 김추련’이라고 달았던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냥 영화 하던 사람이 음악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라고 할까. 그건 아마 보수적인 제 생각과도 관계가 있을 거예요.

    1970년대에 한창 영화를 할 때도 여러 차례 레코딩 제의가 들어왔지만 다 사양했어요. 우리 시절에는 영화판이 대단히 보수적이었거든요. 영화배우가 노래하고 춤추면 자기 관리가 부족하다고 여겼으니까. 요즘에야 두 분야를 넘나드는 이가 많지만 그때는 병행이 불가능했거든요. 그때 생각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가수로 데뷔한 것은 아니고 그냥 나 하고 싶은 것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의식하지 않으면서.

    요즘은 주로 부산에 있어요. 벌써 십년이 넘었죠. 어디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지 지금이 편하고 좋습니다.”

    결혼 안한 것 지금은 후회

    -그런 면에서 하재영씨와 느낌이 참 비슷하군요. 소박하고, 손익계산 잘 안 하고, 묻혀 있는 것을 즐기는 느낌. 아직 결혼도 안 했다고 들었습니다. 참 뜻밖이거든요,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사실은 꽤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 때문에 적적하지도 않고 힘을 많이 얻었죠. 지금은 왜 젊은 시절에 결혼을 안 했을까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는 참 겁이 많았어요. 따라다닌 여배우도 있었는데, 제가 너무 스캔들을 겁내니까 ‘평생 배우나 하라’고 쏘아붙이고는 가버리더군요. 술도 못하다 보니 촬영 끝나면 바로 집에 들어가는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었죠.

    그 흔한 쫑파티 한번 어울리지 못했어요. 촬영 끝나면 곧바로 집에 가버리곤 했으니까. 재미가 없죠. 배우같지 않은 배우, 끼 없는 배우였죠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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