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일주일의 휴가를 끝내고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무척 인상 깊죠. ‘부베의 연인’을 연상시키는 영화라고 할까요. 제목이 ‘빵간에 산다’여서 언뜻 무슨 범죄영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랑 얘기죠.”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정말 보고 싶은데, 아쉽게도 이 영화는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더군요. 자료를 보니 경남 고성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중학교까지 고성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 부산에 유학 와서 동래고를 졸업했고, 이후 한양대 신문학과 재학중에 데뷔를 했습니다. 이것만 살펴보면 배우를 하기에는 참 안 맞는 배경이거든요. 경상도 출신에 장남에 신문학과에. 데뷔 무렵에 부모님이 영화 하는 것을 말리지 않으시던가요.
“아버지는 제가 배우가 된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심하게 반대하시지는 않았어요. 시골에서 넉넉지 못하게 자랐지만 제겐 늘 언젠가는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어려운 살림에 아들을 부산으로 유학보내고 또 서울에 대학을 보내주시는데 차마 영화과를 가겠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어 신문학과를 간 것뿐이죠. 그렇지만 마음속에 묻어둔 영화계에 대한 미련은 끝내 버리지 못했던 거죠.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어요. 제가 어릴 때 고향인 고성 마을에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이 아예 없었어요. 읍내엔 극장이 있지만 저희 집은 면 소재지에 있었거든요. 가끔 장이 서면 천막 가설극장이 열리곤 했죠. 필름도 아주 낡아서 화면에서 비도 내리고 여기저기 잘리고 중간에 탁 끊기고…. 그래도 그런 영화가 그렇게 좋았어요. 황해 선생님 나오는 영화도 많이 봤고 액션물도 좋아했죠. ‘한많은 청춘’, 신영균 선생님의 영화들, 강대진 감독님의 ‘마부’ 같은 작품….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충무로를 자주 배회했어요. 사실 공부는 뒷전이었죠. 당시 충무로에 있던 ‘스타다방’ ‘맥심다방’은 배우나 스태프들이 모이기로 유명한 찻집이었는데, 저는 학교 끝나면 집이 있는 왕십리로 가는 게 아니라 충무로로 출근을 했어요. 배우들의 얼굴이나 영화 촬영하는 것 구경하려고.”
-배우가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당시만 해도 미남미녀만 배우를 하는 시절이어서 선뜻 나설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스태프로 일했습니다. 처음 연출부로 따라나간 영화가 장일호 감독님이 만드신 ‘흙’이었어요. 안개 피운다고 깡통 돌리는 일 같은 걸 주로 맡아서 했죠. 당시 충무로에는 ‘오스틴’이라는 큰 병원차를 개조해서 기재도 싣고 스태프도 타고 다니곤 했는데, 지겹다 못해 정이 들 만큼 타고 다니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영화감독을 자주 만나게 되면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속마음을 내비쳤죠. 그 무렵 ‘두 딸의 어머니’를 만든 조문진 감독님 동생과 친해지게 됐어요. 그 친구 집에 놀러 다니다가 감독님을 만났고, 그래서 결국 ‘두 딸의 어머니’에 출연하게 됐던 거죠.”
그 남자, 우석기
-배우 되기 전에는 음악다방 DJ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던데요.
“제가 워낙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 무렵에는 젊은 학생들이 놀러 갈 곳이 몇 군데 없었는데, 주로 팝 음악을 소개하는 음악다방이 그 가운데 하나였죠. 판을 골라 틀어주며 곡에 대한 해설도 하는 DJ가 꽤 인기가 있었어요. 이화여대 앞, 덕성여대 앞, 숙명여대 앞… 여학교 앞마다 꽤 많이 팔려 다녔어요.”
-20여년 전 인터뷰 기사를 보니 혈혈단신 상경해서 꽤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던데요. ‘체육관 한구석에 침대를 깔고 잤다’는 식으로. 아무리 봐도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아요.
“꼭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 시대 연예 주간지들이 과장이 심했거든요. 나름대로 괜찮게 살았죠,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부는 뭐… 잘했으면 지금쯤 기자가 됐겠죠.”
-결국 1971년 ‘두 딸의 어머니’가 실제 데뷔작이고 1974년에 ‘빵간에 산다’로 자리를 굳힌 셈이네요.
“네. ‘빵간에 산다’로 그 해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을 탔어요. 지금의 백상예술대상이죠.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상영됐는데 그때 사람들이 처음으로 김추련이라는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죠.”
-이후 1970년대 작품 중에 가장 두드러진 건 역시 ‘겨울여자’였죠. 1978년에 개봉해서 사상최대의 흥행을 기록했고요. 김호선 감독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김 감독과는 후에도 ‘밤의 찬가’ ‘겨울여자 제2부’ ‘열애’를 하셨죠. ‘겨울여자’에서 김추련씨가 맡은 우석기라는 인물은 장미희씨가 맡은 여주인공 ‘이화’의 두 번째 남자인 정치학과 학생이었습니다.
“암울한 시대였죠. 박정희 정권 말기로 검열이 심했어요. 영화가 정치를 선동한다고 해서 엄청나게 가위질을 해대던 때였죠. 원작자인 소설가 조해일씨가 석기라는 인물을 내세운 것에도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어요. 원래 중심인물은 ‘겨울여자’인 이화가 아니고 우석기였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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