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비사와 회장이 단지 사내에서만 절대 권력자로 군림한다면 이런 말이 등장했겠는가. 일본사회에서 어느 언론매체보다 광범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송매체, NHK 그룹의 총수로서 그만큼 사회 전반에 강력한 힘을 쥔 인물인 탓이다.
“나는 회장이 될 것이다.”
일본의 명문사학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나와 NHK에 기자로 입사한 1957년 당시부터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권력지향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그는 도쿄 동북부 이바라키(茨城)현 출신으로 결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 대대로 명문호족 집안도 아니고, 부친이 정·재계 거물도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부친이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맹주로 한 다나카파의 실력자로, 후일 관방장관과 운수상을 지낸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富三郞) 후원회에서 간부를 지낸 것이다.
‘만년 집권당’ 자민당으로 통하는 이 가느다란 끈을 정치부 기자 에비사와는 최대한 활용해 사내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취재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유력 정치가에 대한 정보를 회사 간부들에게 전달하는 정보꾼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해 ‘방송사의 꽃’이라는 보도국장을 지냈다. 1989년엔 이사에 올라 회장 후보군에 이르렀다. 곧바로 전무이사를 거쳐 1997년에 마침내 NHK 회장에 올랐다. 현재 이례적으로 3기째 임기를 보내고 있다.
흔들리는 ‘에비정일’ 왕국
하필이면 일본인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김정일’의 이름에서 딴 별명이 붙은 것만 봐도 그가 사내외를 막론하고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사에 임명된 그는 1993년 4월 계열사인 NHK엔터프라이즈 사장으로 부임했다. NHK로서는 비중이 큰 회사임에 틀림없지만 권력중추 대열에서 떨어져나간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반기에 전무이사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고 이듬해 부회장에 오른다. 1997년엔 신입사원 때부터 입에 달고 다닌 회장 자리에 올라섰다.
전무이사로 복귀하는 권력 재편과정에서 ‘에비정일’다운 술수가 작용했다는 의혹이 아직도 언론관계자들 사이에 남아 있다. 당시 임원진 개편은 회장 사임에서 비롯됐고 회장은 한 주간지에 폭로된 스캔들로 사임했다. 방송위성 발사 현장을 참관한다며 미국 LA로 출장 간 회장이 쾌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고급호텔 스위트룸에 NHK 관련 회사의 젊은 여직원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회장 퇴진을 겨냥한 것이 분명한 치명적 정보인 만큼 내부 조직원이 흘려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어 당시 외곽으로 밀려나 회장과 소원한 관계에 있던 에비사와를 ‘용의자’로 지목한 이가 많았다. 그들은 스캔들 폭로를 에비사와가 실지(失地) 회복을 꿈꾸며 그간 쌓아온 인맥을 총동원해 미국 지국의 기자들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활용, 회장 체제를 타도한 정변으로 해석했다.
그래서였을까. 신임 회장은 에비사와를 ‘차기 NHK 회장’에 한 발짝 근접하는 전무이사 자리에 앉혔다. 회장의 의지라기보다 다나카파 인맥을 중심으로 한 자민당의 에비사와 엄호세력의 뜻이었다는 해석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이런 설과 해석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본인밖에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임기 3년의 회장을 이례적으로 3기째 연임하며 올해 8년째에 이르고 있는 점을 보면 적어도 그의 탁월한 생존력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역대 NHK 회장 가운데 3기 연임, 9년 재임 기록을 가진 사람은 1945년 이후 14명의 회장 중 마에다 요시노리(前田義德) 한 사람뿐이다. ‘아사히신문’ 국제부장 출신인 그는 NHK 보도국장, 편성국장을 거쳐 1964년부터 73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최근 NHK에서 불상사가 잇따르자 이를 ‘에비정일’ 체제가 장기화하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사원들의 기율 해이, 도덕성 저하와 관련해 분석하는 시각이 많다. NHK 일각에서는 회장 중도 퇴임을 요구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본 방송 수신료 노조’가 10월5일 에비사와 회장에게 사임을 요구한 것이다. TV 시청세대와 계약을 맺고 시청료를 수금하는 이들 노조원은 NHK 직원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지역 스태프’로 부르는 개인 사업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