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신 궁궐이나 개인저택에 화원을 조성하여 꽃을 즐기는 기풍은 매우 강했다. 18세기 조선에선 개인저택마다 화원을 조성하는 일이 서울과 평양, 개성 등지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정원에 특이한 화훼와 수목을 구해 심고 친구들을 초청해 감상하는 모임이 곳곳에서 벌어지곤 했다. 복사꽃이 만발한 봄철에는 꽃놀이 열풍이 불기 일쑤였다. 정조 연간의 시인 목만중(睦萬中)은 그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화병 속의 꽃을 감상하며 이렇게 자위하기도 했다.
온 나라가 미쳐 날뛰는 이유는 모두 꽃 때문이니작은 화병 속 맑은 꽃을 마주하네.밤들어 비바람이 속절없이 지나가도주렴 안에 호젓이 있는 나를 어찌하겠나.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던 당시 호사가들의 취미는 결코 오늘날의 꽃 애호가들에 뒤지지 않는다. 갖가지 꽃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한 글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요, 꽃의 품종을 개량하는 등 화훼에 대해 광범위한 지식을 지닌 전문가들도 많았다. 화벽(花癖, 꽃에 대한 병)을 지닌 마니아가 부쩍 늘었고, 그들에 관한 소상한 정보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강이천의 ‘이화관총화(梨花館叢話)’에 등장하는, ‘국화품종을 개량한 김 노인’에 관한 다음 이야기도 그 한 사례다.
옛날 여항(閭巷)에 김 노인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국화를 잘 심어서 꽃을 일찍 피게도, 늦게 피게도 했다. 그의 꽃밭엔 몇 치 크기로 키워 손톱처럼 작은 꽃이 빛깔은 곱고 자태는 간드러진 것도 있고, 한 길 넘는 크기로 키워 꽃이 몹시 큰 것도 있다. 게다가 꽃의 색깔이 옻칠한 듯 검기도 하고, 또 가지 하나에 여러 빛깔의 꽃이 섞여 피기도 했다. 귀공자들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앞 다투어 꽃을 샀기 때문에 노인은 그 값으로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그 방법을 비밀에 부쳐 후에는 비방을 전하는 자가 없다.
꽃에 담긴 ‘하늘의 빛깔’
그런가 하면 피어난 꽃에서 천지의 조화를 읽어내는 이 시기 사람들의 정서도 흥미롭다. 다음은 18세기 중반의 시인 이봉환(李鳳煥)이 꽃을 감상하는 방법을 두고 한 말이다.
[화(花)라는 글자는 초(草)에서 나왔고 화(化)에서 나왔다. 천지의 조화를 볼 수 있는 사물이 하나가 아니지만, 그 기묘한 변환(變幻)의 극단을 달리는 것으로 초목의 조화에 비할 것이 없다. 비유하자면 지인(至人)이 때때로 기묘한 말을 찬란하게 하는 것과 같고, 꽃봉오리가 활짝 피는 사이에 몹시 오묘한 무늬가 보일락말락하는 것과 같아서, 비록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만약 천지간에 본래 꽃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꽃 한 송이가 피었다고 하자. 그 꽃을 본 사람들은 이상한 물건, 괴이한 일로 여길 테고, 들은 사람들은 거짓이라 여겨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화옹(造化翁)이 부린 장난기는 꽃에 대해 가장 심하다.]
이 글에서 볼 수 있듯, 이 시대 사람들은 꽃을 가장 빼어난 천지의 조화로 간주했다. 이봉환은 화(花)란 글자가 풀의 조화를 뜻하는 제작원리를 가졌다고 전제하고, 천지간에 최고의 변환(變幻)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가환(李家煥) 역시 극도의 찬탄을 토해냈다. 그는 기원(綺園)이란 이름의 화원에 써준 글에서 꽃을 가꾸어 구경하는 것이 천지 아래 최고의 유희(遊戱)라는 찬사를 보냈다. “하늘은 기이한 빛깔을 소유하고 인간은 그것을 빌려다 쓴다”고 표현한 그는, 하늘이 소유한 그 기이한 빛깔을 빌려 쓰는 인간 가운데 솜씨가 가장 모자란 자가 비단 짜는 여인이고, 약은 꾀를 발휘하는 자가 시인(詩人)이며, 가장 잘 빌려 쓰는 자가 꽃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기발한 생각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