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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⑮|미시령에서 향로봉까지

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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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눈보라에 바랜 향로봉 나무기둥 14글자 ‘국토종주삼천리오차년도 종착점’
산에서는 너무 페이스가 좋아도 탈이 날 수 있다. 이날 필자가 그랬다. 마산에서 왼편으로 꺾어지는 길이 분명치 않다는 지인의 충고를 잊고 그냥 내치다 보니 대간이 지나지 않는 고성군 죽왕면까지 가버린 것이다. 그제야 나침반을 펴들고 간 길을 되돌아오려니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다. 할 수 없이 7부 능선을 타고 마산 아래쪽 대간 길로 파고들었다. 눈과 얼음이 발목을 붙들고 칡덩굴과 잡목이 몸을 밀어냈다. 비지땀을 쏟으며 겨우 능선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대간 길은 선명하지 않았다. 지도를 손에 쥐고 30여분쯤 걸었을까. 산기슭 아래쪽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제대로 찾아왔다”며 진부령 가는 길을 일러줬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 알프스스키장 너머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행정구역상 주소지다. 여기서부터 진부령까지는 낮은 산들을 휘돌아 가는데 주변에 목장과 고랭지 배추밭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유난히도 작황이 좋았다는 김장배추가 밭에서 그대로 얼어 죽어가고 있었다. 수만 포기의 배추가 세찬 바람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주머니에게 아깝지 않느냐고 물으니 “3년에 한 번 정도만 뽑으면 된다”고 말했다. 3년에 한 번씩만 돈벼락을 맞아도 이문이 남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여러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전제로 한 계산일 듯하다.

진부령이 가까워오자 왼편에 알프스 스키장 전경이 드러났다. 예년보다 따뜻한 초겨울 날씨 탓에 한 개의 슬로프에만 인공눈을 뿌려놓았다. 흥겨운 랩뮤직에 맞춰 수많은 사람이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고 있었다. 길가의 스키용품 대여점과 식당들은 곧 닥쳐올 대목을 앞두고 분주한 모습이다. 갈증을 달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올 겨울 경기가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주인은 “날씨가 너무 따뜻하면 스키장 수지가 안 맞고, 너무 추우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침내 진부령이다. 이곳은 남녘 백두대간의 공식적인 종착점으로 강원도 고성과 인제를 연결하는 46번 도로가 지난다. 백두대간을 북진하면 이곳에서 쫑파티를 열고, 남진하면 여기서 발대식을 갖는다. 옛 문헌에 따르면 진부령은 보부상들의 이동통로였다가 1631년 간성현감 이식이 우마차 길을 내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필자보다 먼저 진부령에 도착한 박 선생은 식당에서 막걸리를 시켜놓고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치찌개가 막 끓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박 선생은 필자의 도착시간까지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탄절 오후에 길을 나서다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지 1년3개월이 됐다. 지리산 중산리를 출발해 어느덧 더 갈 수 없는 곳까지 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3000리나 남아 있고, 넘어야 할 봉우리가 수백 개에 이르지만 말이다. 남녘 백두대간의 최북단 향로봉(1293m)에서 반나절만 가면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다시 하루를 내치면 민족의 명산 금강산에 도달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두류산 마대산 북포태산 소백산 백두산…. 그러나 그곳은 머리와 가슴으로만 가볼 수 있는 땅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끊어진 허리를 보듬어야 하고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야 한다.

이향지 시인은 2001년 ‘북한쪽 백두대간, 지도 위에서 걷는다(도서출판 창해)’라는 긴 제목의 책을 펴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향지 시인은 북녘의 백두대간을 지도와 문헌으로 분석하고, 시인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휴전선을 지나 백두산까지 도달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남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아마도 이향지 시인의 역작은 산꾼들의 필독서가 될 것이다.

12월25일 성탄절 오후. 필자는 육군본부의 향로봉 출입허가 결정을 최종 확인하고 진부령으로 떠났다. 진부령부터는 육군 제12사단이 관할하는 군사지역이어서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26일 아침 진부령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도중 제12사단 정훈장교 이건일 소위가 도착했다. 동안인 데다가 목소리까지 부드러워서 동생처럼 느껴지는 신참 군인이었다. 필자는 위병소에서 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향로봉을 향해 출발했다. 이 소위는 지프를 타고 앞쪽에서 길을 안내했고 필자와 박 선생을 포함한 5명의 등반대는 시계차를 따르는 마라토너처럼 10m쯤 떨어져서 따라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필자 일행이 올라간 길은 백두대간 주능선이 아니다. 지도상 백두대간은 진부령에서 칠절봉(1172.2m)과 1166.2m봉을 지나 향로봉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꺾어져 고성재를 거쳐 남한땅의 마지막 지점인 삼재령에 이른다. 하지만 이 구간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군사보급로를 따라 향로봉에 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진부령-향로봉 구간은 산이라기보다 그 옛날 소달구지가 다니던 신작로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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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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