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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발굴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을사늑약 직전 옛 제용감 관아 4개월간 사용

  •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ihoh@yonsei.ac.kr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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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이 옛 제용감 건물에서 신문을 발행한 것은 1904년 4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 4개월간이다. 이때 황성신문의 사장 겸 편집인은 장지연(張志淵)이었다. 당시는 러·일전쟁 초기로서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요로 1904년 2월23일 제1차 의정서를 체결한 직후부터 1904년 8월22일 한·일협정서를 체결해 이른바 ‘고문(顧問)정치’라는 명목하에 한국을 일본의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들기 직전까지다.

황성신문이 옛 제용감 건물을 떠나 네 번째 사옥으로 이전하고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905년 11월17일에 일본의 강압으로 불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이에 분격한 황성신문은 11월20일자 신문에 사장 겸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실어 국민봉기의 불길을 지피게 된다. 황성신문의 항일·구국 언론활동과 이 과정에 황성신문이 겪었던 어려움에 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이뤄져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발굴 사진의 사료적 가치

옛 제용감 관아 건물의 사진이 필자의 눈에 띈 것은 2003년 12월호 ‘신동아’에 황성신문 사옥들의 위치에 관한 글을 실은 직후였다. 당시 필자는 대한매일신보 사옥의 위치와 사진을 찾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 탐색과정에서 옛날 그 신문사 주변에 있던 학교들의 문건에서 결정적인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기에 황성신문의 경우도 그럴 개연성이 높다는 기대감에 관련 학교들을 찾아 나섰다.

필자는 우선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서울공고를 찾았다. 먼저 동창회 사무실에 연락했더니 학교 역사자료관이 있다고 했다. 동창회 사무실이 들어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복도 벽면에 옛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인 옛 한옥 사진에 눈길이 갔다. 사진설명에 첫 교사(校舍) ‘제용감’이라 적혀 있었다. 그 순간 황성신문의 4개 사옥 가운데 하나의 사진을 찾았다는 기쁨이 온몸을 감싸왔다.



두 번째로 용산구 청파동의 선린정보산업고(전 선린상업고)를 찾았다. 학교 행정실 관계자에게 농상공학교가 시작된 제용감이 황성신문 사옥이었다고 이야기하니 새로 알게 된 이 사실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학교 역사자료관으로 안내해 주어 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서울대 농과대학의 교사(校史)는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3개교의 역사인 ‘서울공고백년사’ ‘선린백년사’ ‘수원농업칠십년’ ‘수원농업팔십년’에는 모두 제용감 사진이 들어 있다.

필자는 구한말 민족지를 펴낸 사옥 터 연구를 일단 마무리지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던 제용감 관아 건물의 사진은 있었다. 다만 그 사진을 다루거나 본 사람들 중에는 제용감이 황성신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언론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도 제용감 사진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성신문의 경우처럼, 우리의 근대언론 초기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는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진들은 언론사적 의미를 누군가가 확인해주길 고대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언론사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미발굴 사진들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커지고, 이 분야의 연구에 동참하는 연구자가 늘어나 연구 성과가 하나둘씩 쌓여 가칭 ‘사진을 통해 본 한국초기 언론사(史) 연구’ 분야가 성립될 날을 기대해본다.

신동아 200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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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iho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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