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北 ‘핵 보유 선언’ 결정 메커니즘

‘강석주 팀’ 8개월 사전분석 ▶외무성·인민군 총참모부 난상토론 ▶ 서기실 집중검토▶ 국방위 최종 보고

  •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연구소장 yoohy@korea.com

    입력2005-02-22 16: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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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는 ‘핵 보유 선언’을 과연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결정했을까. 단순히 임기응변이나 즉흥적인 세력갈등을 통해 나온 결론일까. 1990년대 초반, 1차 북핵 위기 당시의 정권 내부 사정을 보여주는 북측 자료를 근거로, 이번 결정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진두지휘 아래 장기간의 사전준비와 토론, 합의를 거쳐 내린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라는 분석을 제시한다.
    北 ‘핵 보유 선언’ 결정 메커니즘
    북한외무성은 2월10일 성명을 통해 북한이 이미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6자회담에도 잠정적으로 불참하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이 같은 결정은 그 동안 공개적으로 천명해온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나 핵 능력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않는다는 기존의 정책을 정면으로 번복하는 것이다. 미국은 물론 가장 든든한 후원세력인 중국의 입장과도 배치되는 이번 성명발표는 북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한 매우 중대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핵개발을 빌미로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카드이자 최후의 승부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결정이 즉흥적이거나 어떠한 종류의 파벌간 다툼을 통해 도출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측면이 있다. 북한 내부에서 오랜 고심을 거쳐 나온, 합의된 결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살펴볼 것은 이른바 2차 핵 위기가 발생한 2002년 당시의 상황이다.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 이후 이 시기까지 북한은 표면적으로 핵 동결 약속을 준수해왔다. 미국에 경수로건설 지연에 따른 전력손실 보상을 미국에 요구할 정도로 당당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2002년 미국의 켈리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계획을 시인함으로써 상황은 전혀 다르게 바뀐 것이다.

    북한이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을 추진했다 하더라도 비밀리에 추진했을 것이고, 설사 비밀계획이 노출되었더라도 이를 부인하고 은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강석주 외무성 부부장을 통해 부시 행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방문한 미국의 공식대표에게 농축우라늄 핵개발 계획을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북한이 비록 핵무기를 ‘가지게 되어있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고, 이후에도 ‘핵 폭탄보다 더 위력한 무기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민들의 일심단결’이라는 식으로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문장을 구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북한식 주장은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북한 체제의 속성상 선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그러한 선전구호가 처음 제기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미국 대표단을 마주한 공식석상에서, 과거 북미협상에서 냉철한 협상가로 명성을 얻은 강 부부장이 단순히 구호차원에서 핵개발 계획을 즉흥적으로 시인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약하다. 따라서 당시 강석주 부부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클린턴 행정부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접근하는 부시 행정부 대표단을 처음 대좌하는 자리에서 보다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충분히 계산된 발언’이었으리라는 분석이다.

    1차 핵 위기 때 2개월간 사전준비

    북한의 정책, 특히 핵 문제와 같이 체제생존과 직결되는 고도의 전략적 사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결정 됐는지 파악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1990년대 1차 핵 위기 당시 북한 내부의 정책결정과정을 묘사하는 실명소설 등 평양에서 출간된 자료를 검토해보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1994년 북한 핵 문제가 위기국면으로 접어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지시를 받은 강석주 부부장은 중대결정에 앞서 관련사항에 관해 치밀한 사전조사와 면밀한 검토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물론 최소한의 체계를 갖춘 국가의 정부라면 당연한 과정이다. 대략 2개월 가량의 준비기간을 가진 강석주 부부장은 분석이 완료되자 이를 김일성 주석의 참석 하에 김정일 위원장이 주재하는 국방위원회에서 보고한 바 있다. 핵 문제와 관련한 정세분석 결과를 보고하고 최종지침을 하달 받은 것이다.

    1997년 평양의 문학예술종합출판사가 발행한 ‘영생’이라는 제목의 기록소설을 보면, 이 시기 강 부부장이 이끄는 북한 당국자들은 현안에 관한 분석자료를 심도 있게 검토한 것으로 되어있다. 정책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사건의 본질을 검토하는 작업은 물론, 주변 국가들의 판단자료를 참고하고 과거 협상결과까지 세심하게 분석했다. 또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자체역량을 광범위하게 점검하는 한편 이후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치밀함도 보여주었다.

    ‘영생’에 의하면 강 부부장은 보고에 앞서 “미국의 동향을 포함한 유엔과 국제원자력기구의 립장을 타진”했으며 “‘적국’과 ‘친선국가’들의 견해도 연구”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관련 정세자료는 물론 1차 핵 위기가 발생하기에 앞서 2년 동안 개최된 북미회담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던 미국의 회담자세 등을 분석하고, 그에 기초해 관련 실무자들의 토론을 거쳤다는 것이다. 국방위원회에 대한 강 부부장의 최종보고는 이러한 복잡한 절차를 거친 것이었다. 당시 강석주 팀에서 상정한 ‘향후 최악의 사태’는 물론 전쟁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2002년 미국 대표단이 방북하기 보름 전에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을 통해 김 위원장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하고 해결을 약속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파격적인 사태진전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당시 북한의 대내외적 환경과 정책흐름을 볼 때 경제난 해소를 위한 고육지책이자 새로운 정책전환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어찌 보면 김정일 외교의 또 하나의 승리로 기록될 만한 사안이었다. 당시 김 위원장을 배석한 유일한 인물이 강석주 부부장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강 부부장이 2002년에도 이와 똑 같은 맥락에서 농축우라늄을 통한 핵개발계획을 고백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은 이후 우라늄 농축을 전면 부인했고 6자회담에서도 그 같은 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은 제네바합의 등 각종 합의의 위반으로 그에 따른 모든 책임과 부담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인 납치시인과 동일한 사안일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을 무시하고 적대시한다고 생각하는 미국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혹은 새로운 관심대상으로 부상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지만, 이후 농축우라늄계획 추진실적이 미미한 수준이어서 안팎으로 문제가 복잡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농축우라늄과는 별도로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공개적으로 플루토늄을 추출함으로써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조금 다르게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이는 추후 미국과의 협상에 대비하는 동시에 핵무기를 보유하는, 즉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한은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 계획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동시에, 플루토늄을 통한 핵개발은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억제력 차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해왔다. 즉 협상을 통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핵 억제력 확보를 위한 행보를 지속해온 것이다.

    이미 존재가 노출되어 있는 8017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핵개발은 제네바합의가 사실상 파기된 상황에서 추진되었다. 따라서 이를 동결하고 폐기하는 것은 그에 따르는 보상을 전제로 협상할 수 있는 문제이고, 반대로 추출된 플루토늄을 통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다면 이는 핵 억제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카드였다.

    ‘침묵의 8개월’은 선언 준비기간?

    북한의 이번 핵 보유 선언은 앞서 살펴본 북한의 그간 입장이 극적으로 반전된 것이나 다름없다. 평양의 최고 정책결정 메커니즘을 통해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반전은 외무성이 그동안 열린 세 차례의 6자회담의 득실을 분석한 결과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재선됨으로써 북한의 기존전략이 더 이상 먹혀 들지 않을 것이라는 절박한 상황인식 또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상황분석에 따라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핵 보유 선언에 앞서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자체역량에 대해 치밀하게 사전검토하는 작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한이 3차 6자회담이 종료된 후 8개월 가까이 회담에 응하지 않은 반면 사태를 악화시키는 행동도 거의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면밀한 준비단계였던 것이다.

    이 준비단계 동안 북한은 줄기차게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주장해왔다. 미국의 북한인권법 발효와 대북제재에 관련된 각종 조치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내부적으로는 탈북자 단속 등 체제결속을 강화하는 새로운 방어벽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들 역시 사전검토 및 준비단계에서 파생한 것이었다.

    사전검토 과정에서 이라크 사태의 진전과 리비아의 극적인 정책전환은 북한이 이번 핵 보유 선언을 결정하는 데 주요변수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라크 사태는, 국제사회에 제한적으로 협력해왔던 사담 후세인 정권이 결국 무력으로 붕괴되고 독재자 후세인과 측근 추종세력이 궤멸되는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북한이 선택할 여지를 더욱 좁혔다. 반면 리비아처럼 체제는 보존하면서 정책을 완전 변경하는 방안은, 리비아와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이 많은 북한 처지에서 선택하기 어렵다는 결정이 내려진 듯 하다.

    결국 미국의 주장대로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폐기하고 주변국의 경제지원을 통해 경제회생을 도모하는 것은 트로이 목마와 같이 체제붕괴를 가속화하는 독약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미국이 당장 이라크에서처럼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할 수 없는 현 시점을 택해 극단적으로 핵 보유 선언을 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를 통해 핵 국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다면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핵을 체제연장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북한의 극단적인 결정은 부시 행정부 2기를 맞아 미국의 대북정책이 다소 유화적인 분위기에서 재검토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뜻밖의 결정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 동안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하는 듯한 조짐 역시 나타낸 바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결정의 배경에 북한 내부의 세력구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은 그간 북한이 보여준 ‘선군(先軍)’ 움직임을 논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 2005년 들어 선군정치의 강화를 통해 체제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제반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내비친 바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경제난은 지속되고 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와 중국 및 남한의 대규모 경제협력·지원이 불가피한 실정이지만, 이 같은 외부와의 교류협력 확대 및 활성화는 외부의 사조와 영향력이 북한 내부로 침투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북한 내 보수집단의 반발과 경계심이 갑자기 촉발됐을 수 있고, 이번 성명 또한 그 결과물이 아니냐는 관측이 이른바 ‘군부 반발론’이다.

    ‘군부 반발론’은, 정권 수뇌부 및 체제의 안정을 담보로 군부의 세력약화를 초래할 수 있는 외무성의 입장과 체제수호와 기관의 이익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군부의 입장이 충돌하는 그림을 상정하고 있다. 군부의 반발을 무마해야만 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입장에서는 이번 성명 같은 극단적인 결정이 불가피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남한과의 교류협력을 통해 금강산지구와 개성지구가 개방되었음에도 북한의 전반적인 경제사정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군부의 반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동시에 리비아식 정책전환이 대안으로 자꾸 제기되는 상황에서 리비아식 해법의 가장 큰 피해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군부가 조직적으로 반발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1차 핵 위기 당시의 결정과정을 포함해 다른 요소들을 살펴보면, 이번 성명이 단순한 세력충돌에 따른 우발결정이 아니라 국방위원회와 김정일 위원장의 최종결심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결론이 훨씬 설득력 있다. 외무성과 군부의 기관간 갈등의 산물로 이번 결정이 도출되었으리라는 분석은 북한의 실정상 아직 시기상조인 것이다. 오히려 당면 정세분석과 정책선택 옵션을 놓고 각자의 역할분담에 따라 최종결정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국방위원들은 무력을 담당하는 군사일꾼으로, 외무성 고위 관료들은 외교전략을 담당하는 대외부문 책임일꾼으로 규정하곤 했다. 무력과 외교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것을 최고의 전략으로 상정했던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 주석의 이러한 유훈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결정과정에도 무력과 외교의 균형을 중시했을 것이다.

    이러한 역할분담이 아직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는 이번 성명이 국방위원회나 최고사령부가 아닌 외무성 발표였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평소 “외교부는 나의 외교부”라고 칭하며 신뢰를 표시해온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핵 문제와 같은 중요 이슈를 두고 외무성과 군부 같은 기관 사이의 갈등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양에서 출판된 자료들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체제안전과 관련된 일급 군사정보나 첩보를 입수한 경우 이에 대한 결정을 군부에만 위임하지는 않는다. 대신 외교부문의 고위 관료들에게 검토케 하고 자신의 서기실(우리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을 통해 적절히 조절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여전히 건재한 김정일의 통제

    북한을 붕괴시키기 위한 미국의 전략이 담겨있다는 문서를 러시아 장성을 통해 입수했을 때 김위원장은 이 문서를 북한군 총참모부에 전달하는 동시에 서기실에서도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선군정치의 시발인 1995년 정초의 다박솔 초소 방문 당시 서기실을 통해 전국의 모든 단위에 이 사실을 전달하도록 한 것 역시 이 같은 메커니즘 속에서 가능했다.

    또한 1998년 페리 프로세스가 정립될 무렵의 대미업무도 김 위원장의 서기실에서 북한군 총참모부와 외무성간의 유기적 연결 및 역할분담·조정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의 업적을 기록하는 총서에 따르면 그는 ‘5027 작전계획’ 문서 입수에 따른 대책수립과 대외성명 발표과정에서도 군의 총참모부와 외교부 관련 일꾼들을 직접 지휘하며 일을 추진했다.

    북한의 핵 보유 선언과 6자회담 불참결정은 북한이 또다시 벼랑끝 협상을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그 결정과정에 북한의 수뇌부는 전쟁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각종 조치를 강구했을 것이다. 당장 드러나는 모습으로 볼 때 군사행동 같은 극단적인 조치보다는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함으로써 위협을 가중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듯 하다. 북한이 당장 남한과의 교류에 직접적인 장애가 될 수 있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 또한 1차 핵위기에서 시행했던 준 전시상태 선포 같은 군사적 조치는 취하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이 이러한 관측을 뒷받침한다.

    만약 군부가 외교 관료들과의 마찰과 갈등 속에서 이러한 결정을 이뤄냈다면 북한 내부의 긴장은 삽시간에 고조되었을 것이다. 남북관계 또한 즉각 단절하는 조치가 뒤따랐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조치가 없었다는 사실은 국방위원회를 통한 김 위원장의 통제가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사불란 체계’의 위험성

    김 위원장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몇 가지 보조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우선은 체제 내부 단속이다. 비록 핵 보유 선언과 6자회담 불참 결정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나 UN의 개입 등으로 이어지며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가능성은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미국의 북한 침공 같은 즉각적인 무력개입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외적인 강경 제스처는 내부 인민들의 동요조짐을 단속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동시에 강경책으로 조성된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남한 및 국제사회에 대한 새로운 압박요인으로 작용해 더욱 큰 규모의 지원과 협력을 도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최근 북한은 어느 때보다 많은 50만톤의 비료지원을 요청한 바 있다. 개성공단에 대한 활발한 지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요구해 왔고, 6·15 정상회담 5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유난히 민간차원의 협력과 지원확대를 강조하기도 했다. 모두 앞서 언급한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요소들이다.

    북한의 의도와 목적이 아직 불분명하고 핵 능력의 실체도 불명확하지만, 북한의 핵 보유 선언으로 한반도에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 내린 선택은 현재로서는 오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심각성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번 선언이 김 위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북한 최고수뇌부의 결의를 거친 고도의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에 있다.



    더구나 북한처럼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갖춘 수령독재 통치구조에서,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한 극단적인 벼랑끝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기에는 체제나 정권의 붕괴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참화(慘禍)로 몰아갈 위험도 포함된다. 국제사회의 신중하고도 단호한 접근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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