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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代 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충격 특강

“미국은 남북관계 호전될 때마다 북핵의혹 제기, 부시 정부는 협상 아닌 항복 얻으려 6자회담 열었다”

  •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3代 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충격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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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시, “6자회담서 북한 5 대 1로 포위” “중국 이용 북한 압박” 실언…이러는데 북한이 나오겠나?
  • ●美, 걸프전 및 아프간전 직후 북핵문제 거론…과연 오비이락일까?
  • ●네오콘은 한반도 갈등 장기화가 美에 이익이라고 생각
  • ●북핵문제, 미국의 ‘한반도 상황 관리용’인지, ‘첩보 조절용’인지 연구해봐야
  • ●미국, 북한 붕괴 오판해 1994년 제네바합의
  • ●美, 플루토늄·미사일엔 관심 없고 고농축 우라늄 문제만 고집해 6자회담 헛바퀴
  • ●북한은 惡, 미국은 善으로 못박고 대북관계 정리해선 안 돼
  • ●“북핵? 미국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는 것이 한미 정보협력의 실체
  • ●북한 불신받는 중국, 중재자 노릇 어렵다
  • ●독수리와 참새 싸움, 북핵 해결 생각 있다면 미국이 먼저 양보해야
  • ●북한은 지금 개방·개혁 부작용 치료중
  •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북한은 망하고 싶어도 못 망한다
3代 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충격 특강

● 1945년 만주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정치학) ● 국토통일원 연구관·남북대화사무국 대화운영부장 ● 세종연구소 정치외교연구실장 ● 1993∼96년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 ● 1996∼98년 민족통일연구원장 ● 1998∼99년 통일부 차관 ● 2001∼02년 국가정보원 외교안보특별보좌역 ● 2002∼04년 제30대 통일부 장관 ● 現 이화여대 북한학과 석좌교수

“우리는불가피하게 6자회담 참가를 무기한 중단할 것이다.…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 무기고를 늘리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다.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고,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인 2월10일, 북한은 난데없는 6자회담 중단과 핵 보유 선언을 해 한반도와 주변국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6자회담 당사국들은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6자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의지를 떠보려는 노림수” “회담결과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벼랑 끝 전술” “핵 보유 모호성 전략 포기한 것은 체제수호 위한 절박한 의지의 표명” 등 대북 전문가들의 그럴듯한 분석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여러 정황을 바탕으로 한 추측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북한의 핵 보유 주장을 믿을 만한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까지 확실한 건 북한이 성명을 발표했다는 사실뿐.

이런 상황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이화여대 북한학과 석좌교수)이 북한의 성명발표 보름 전인 1월24일, 북한대학원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강연한 내용은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강연주제는 ‘북핵협상 전망과 대북정책’.

이날 정 전 장관은 지난해 3차 6자회담 이후 회담이 결렬된 데에는 북한보다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진단하고, “북한이 회담에 쉽게 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정 전 장관의 이날 강연내용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 북핵문제를 단시일에 해결하기보다는 한반도 상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장기간 끌 가능성이 높다는 암울한 전망이다. 그 동안 일부 학자들이 비슷한 내용을 주장했지만 전직 통일부 장관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정 전 장관은 또 이날 1990년대 초반 북핵문제가 처음 불거진 시점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간 알려지지 않은 여러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정 전 장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으로 시작,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까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세 정권에 걸쳐 북핵문제를 다룬 이 분야의 최고 실력자다. 그가 곧 ‘북핵 협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 전 장관의 육성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기 위해 일부 매끄럽지 않은 문장에도 손대지 않았다.

절묘한 타이밍, 오비이락인지…

북핵문제는 1990년대 초반 미국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알려졌다. 하지만 처음엔 일반 국민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1993년 3월12일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미국이 북한 폭격계획을 세웠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북핵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졌다. 북-미간 제네바합의로 한때 북핵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으나 2002년 다시 불거졌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1993년과 2002년 두 차례 모두 핵문제가 제기된 과정과 배경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1993년 북핵문제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걸프전 이후 이라크만큼 밉보인 나라들을 압박하는 과정에 꼬이기 시작한다. 남북간 총리급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핵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을 묶어둬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끌어내라”는 미국의 주문이 있었다.

사실 그 이전인 1991년 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미국은 “북한에 핵문제가 있다” “뭔가 좀 수상하다. 핵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2002년 북핵문제도 2001년 아프간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소위 테러지원 국가들에 대한 단속을 시작하는 연장선상에서 제기됐다. 미 정부가 먼저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마다 북한은 역(逆) 카드를 들고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면서 국제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두 번 다 그랬다.

또 문제가 일어나고, 문제를 제기하는 시점에 있어서 오비이락인지는 모르지만 절묘하다. 오비이락이기를 바란다. 남북관계가 호전될 만하면 이 문제가 나온다.

먼저 1993년 북핵문제가 터진 과정을 보면 이렇다. 당시 남북한 양측은 1989년부터 통일부(당시 통일원) 차관을 수석대표로 한 남북 총리급 회담 예비접촉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반 만인 1990년 9월, 서울에서 제2차 총리급 회담이 열렸다. 1991년 12월에는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1992년부터는 군사공동위원회, 화해협력공동위원회 등 각종 공동위원회와 산하 분과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구체적인 운영을 위한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가 10개 이상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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