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3代 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충격 특강

“미국은 남북관계 호전될 때마다 북핵의혹 제기, 부시 정부는 협상 아닌 항복 얻으려 6자회담 열었다”

  •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5-02-22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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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시, “6자회담서 북한 5 대 1로 포위” “중국 이용 북한 압박” 실언…이러는데 북한이 나오겠나?
    • 美, 걸프전 및 아프간전 직후 북핵문제 거론…과연 오비이락일까?
    • 네오콘은 한반도 갈등 장기화가 美에 이익이라고 생각
    • 북핵문제, 미국의 ‘한반도 상황 관리용’인지, ‘첩보 조절용’인지 연구해봐야
    • 미국, 북한 붕괴 오판해 1994년 제네바합의
    • 美, 플루토늄·미사일엔 관심 없고 고농축 우라늄 문제만 고집해 6자회담 헛바퀴
    • 북한은 惡, 미국은 善으로 못박고 대북관계 정리해선 안 돼
    • “북핵? 미국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는 것이 한미 정보협력의 실체
    • 북한 불신받는 중국, 중재자 노릇 어렵다
    • 독수리와 참새 싸움, 북핵 해결 생각 있다면 미국이 먼저 양보해야
    • 북한은 지금 개방·개혁 부작용 치료중
    •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북한은 망하고 싶어도 못 망한다
    3代 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충격 특강

    ● 1945년 만주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정치학) ● 국토통일원 연구관·남북대화사무국 대화운영부장 ● 세종연구소 정치외교연구실장 ● 1993∼96년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 ● 1996∼98년 민족통일연구원장 ● 1998∼99년 통일부 차관 ● 2001∼02년 국가정보원 외교안보특별보좌역 ● 2002∼04년 제30대 통일부 장관 ● 現 이화여대 북한학과 석좌교수

    “우리는불가피하게 6자회담 참가를 무기한 중단할 것이다.…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 무기고를 늘리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다.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고,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인 2월10일, 북한은 난데없는 6자회담 중단과 핵 보유 선언을 해 한반도와 주변국을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6자회담 당사국들은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6자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의지를 떠보려는 노림수” “회담결과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벼랑 끝 전술” “핵 보유 모호성 전략 포기한 것은 체제수호 위한 절박한 의지의 표명” 등 대북 전문가들의 그럴듯한 분석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여러 정황을 바탕으로 한 추측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북한의 핵 보유 주장을 믿을 만한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까지 확실한 건 북한이 성명을 발표했다는 사실뿐.

    이런 상황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이화여대 북한학과 석좌교수)이 북한의 성명발표 보름 전인 1월24일, 북한대학원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강연한 내용은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강연주제는 ‘북핵협상 전망과 대북정책’.

    이날 정 전 장관은 지난해 3차 6자회담 이후 회담이 결렬된 데에는 북한보다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진단하고, “북한이 회담에 쉽게 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정 전 장관의 이날 강연내용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 북핵문제를 단시일에 해결하기보다는 한반도 상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장기간 끌 가능성이 높다는 암울한 전망이다. 그 동안 일부 학자들이 비슷한 내용을 주장했지만 전직 통일부 장관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정 전 장관은 또 이날 1990년대 초반 북핵문제가 처음 불거진 시점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간 알려지지 않은 여러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정 전 장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으로 시작,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까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세 정권에 걸쳐 북핵문제를 다룬 이 분야의 최고 실력자다. 그가 곧 ‘북핵 협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 전 장관의 육성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기 위해 일부 매끄럽지 않은 문장에도 손대지 않았다.

    절묘한 타이밍, 오비이락인지…

    북핵문제는 1990년대 초반 미국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알려졌다. 하지만 처음엔 일반 국민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1993년 3월12일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미국이 북한 폭격계획을 세웠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북핵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졌다. 북-미간 제네바합의로 한때 북핵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으나 2002년 다시 불거졌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1993년과 2002년 두 차례 모두 핵문제가 제기된 과정과 배경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1993년 북핵문제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걸프전 이후 이라크만큼 밉보인 나라들을 압박하는 과정에 꼬이기 시작한다. 남북간 총리급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핵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을 묶어둬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끌어내라”는 미국의 주문이 있었다.

    사실 그 이전인 1991년 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미국은 “북한에 핵문제가 있다” “뭔가 좀 수상하다. 핵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일이다.

    2002년 북핵문제도 2001년 아프간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소위 테러지원 국가들에 대한 단속을 시작하는 연장선상에서 제기됐다. 미 정부가 먼저 문제를 제기하면, 그때마다 북한은 역(逆) 카드를 들고 미국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면서 국제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두 번 다 그랬다.

    또 문제가 일어나고, 문제를 제기하는 시점에 있어서 오비이락인지는 모르지만 절묘하다. 오비이락이기를 바란다. 남북관계가 호전될 만하면 이 문제가 나온다.

    먼저 1993년 북핵문제가 터진 과정을 보면 이렇다. 당시 남북한 양측은 1989년부터 통일부(당시 통일원) 차관을 수석대표로 한 남북 총리급 회담 예비접촉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반 만인 1990년 9월, 서울에서 제2차 총리급 회담이 열렸다. 1991년 12월에는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1992년부터는 군사공동위원회, 화해협력공동위원회 등 각종 공동위원회와 산하 분과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구체적인 운영을 위한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가 10개 이상 나왔다.

    3代 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충격 특강

    2002년 10월 제8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정세현 장관(왼쪽)이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영남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고 있다. 이날 면담은 예정에 없던 일이다.

    이렇게 잘 돌아가는데 갑자기 미국이 “북한에 핵개발 의혹이 있다” “북한이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걸 풀어야 한다”면서 북핵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고는 북한에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 압력을 넣는 동시에 남북간에 ‘비핵화선언합의서’가 나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노태우 정부는 남북간 기본합의서를 만드는 동시에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이라는 합의서를 만드는 작업을 병행했고, 급기야 합의서에 가서명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IAEA가 “사찰 결과 북한이 신고한 것과 차이가 많이 난다. 특별사찰이 필요하다. (1993년) 3월25일까지 받지 않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며 북한에 계속 압력을 넣었다. 결국 3월12일 북한은 “NPT 자체를 탈퇴하겠다”는 강수를 둔다.

    2002년 북핵문제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남북간에 장관급 회담이 6차까지 진행됐고, 그해 9월에는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이 제주도까지 와서 남북간 국방장관회담을 할 정도로 남북이 가까워진 상태에서 터졌다.

    요컨대, 북한이 남한의 대북지원이나 체제인정만으로는 모자라서 더욱 강력한 미국으로부터 체제안전과 경제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미국의 문제제기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문제를 확대한 것인지, 아니면 미국이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기 위한 지렛대나 첩보 조절용으로 북핵문제를 제기한 것인지는 우리가 앞으로 실증 연구를 해봐야 할 것이다. 또 북한과 미국의 정치적 수요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그야말로 ‘카드’인지도 모른다.

    오비이락처럼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 관점과 방침이 정리돼야 우리의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결론은 내리지 않고 문제제기만 하겠다.

    한국 정부도 북한 붕괴 준비했다

    1993년 북핵문제가 처음 제기된 이후 2002년 다시 북핵문제가 불거질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 상황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1993년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북미고위급회담을 수용했다.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결국 북한이 하자는 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1994년 10월21일 소위 제네바합의가 이뤄진다. 합의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북한이 현재 또는 미래의 플루토늄(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면 미국은 플루토늄 추출이 불가능한 100만kW급(경수로) 원자력 발전소 2개를 지어주기로 했다. 다만 발전소가 다 지어지면 북한은 과거의 핵까지 소급해서 사찰을 받기로 했다.

    미국은 또 북한이 5000kW를 생산할 수 있는 5MW급 흑연감속로를 폐기하는 조건으로 매년 50만t의 중유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사실 5MW급은 전력생산을 위한 발전소로서는 별 의미가 없는데 당시 북한은 전기가 모자라서 그것을 재가동하겠다고 협박했다.

    중유 50만t은 북한으로서 아주 큰 규모이다. 현재 남한이 1년에 1억8000만t 정도의 석유를 수입해 쓴다. 그런데 미국이 50만t을 주기로 할 당시 북한의 연간 석유 수입량은 100만t이 채 안 됐다. 우리의 100분의 1 수준이다. 북한의 석유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2003년 말부터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요즘 북한이 저렇게 춥고 어두운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석유만도 43만t이다. 북한은 그것부터 땐다. 나머지 가지고 모두가 살아야 하니까, 웬만큼 높은 사람도 걸어 다닐 수밖에 없다.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수령님께서 걸어다니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사무실과 집을 가깝게 배치하고 걸어다닌다. 차 없는 것도 수령님의 은덕”이라고 자랑삼아 말한 적 있는데, 나에겐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미국은 또 합의서 서명 3개월 이내에 경제제재를 완화하겠다고 북한에 약속했다. 통신과 금융을 포함한 무역 및 투자제한을 완화하기로 한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큰 것을 받아낸 셈이다. 이후 미국과 북한은 실무자급 협의를 통해서 영사문제와 양국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상호 관심사항에 대해 진전이 이뤄지면 대사급 수교를 맺는다는 것까지 약속했다.

    그런데 그때 미국의 기본전제에 문제가 있었다. 미국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은 곧 망한다. 붕괴한다. 따라서 후하게 약속하고 안 지켜도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우리 정부 내부에서도 북한 붕괴에 대해 상당히 준비를 했다. 동서독에 사람을 보내서 남북한 흡수통일에 대해 연구하고 통일비용까지 계산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통일비용을 누가 먼저 계산했는지 아는가. 일본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따져봐야 한다. 일본은 남북한 통일비용을 한껏 부풀려 놨다. 그리고 한국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돈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통일비용이 오늘날 10배, 20배로 엄청나게 늘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이것저것 막 얹은 것이다.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교수는 일본에서 10년 동안 3600억달러 정도로 계산해놓은 통일비용을 4조달러까지 늘려놨다. 이것도 해줘야 하고, 저것도 해줘야 하고….

    그 때문에 한때 우리 사회에는 통일회피 현상이 유행했다. “그렇게 많이 부담해야 한다면 통일은 겁나는 것이 아니냐, 골치 아픈 것 아니냐, 통일돼서는 안 되겠다”면서. 어른들은 고사하고, 부잣집 동네 어린아이들일수록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이 참 비극이다.

    미국의 예상과 달리 북한 정권이 오래가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우리는 항상 북은 악, 미국은 선이라고만 보고 대북관계를 정리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친북은 아니다. 국제정치를 선악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는 답이 안 나온다.

    내가 “북한의 주의·주장, 북한이 가지고 있다는 대량살상용 대한(對韓)공격용 무기는 기본적으로 협상용일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모 언론사는 사설에서 내 실명을 써가며 “북한을 대변해준다”고 비판해 아직도 친북좌파 비슷하게 돼 있지만 아니다. 실사구시 관점에서 북한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북한이 전략전술 차원에서 나오면 그것은 그것대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부시의 ‘클린턴 정책 거부원칙’

    미국과 북한, 누가 먼저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어쨌든 북한이 약속한 핵동결은 IAEA 사찰로 확인됐고, 미국도 중유를 제공했다. 하지만 경수로 공사가 계속 늦어졌다.

    공사는 당초 1995년에 시작해야 했지만, 그 전에 약속하거나 합의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의정서나 부지사용에 관한 합의 등이 그것이다. 북한은 자기 땅에 건설하는 것이지만 자기들도 여러 가지 손해를 보면서 허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용료를 내라고 했다. 우리가 개성공단 개발사용료를 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공사가 늦어졌다. 합의서를 만드는 과정에 북한이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상황을 꼬이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그 뒤 남북협정서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북한은 이쪽에서 제안하면 그걸 받아가지고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독이 묻어 있지는 않은지 찾아내기 위해 무지하게 고민한다. 그러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결국 서명 3개월 이내에 공사를 시작하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사는 1998년에 착공했다. 그런데 공사가 3~4년 늦어지면서 미국과 북한은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시간이 또 흘러서 공사는 기초공사 조금 하다가 만 정도에서 그친다. 북한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미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썼다.

    그러다 2001년 부시 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ABC 정책’을 쓰면서 북핵문제가 꼬이기 시작한다. ABC는 ‘Anything But Clinton’의 약자로 ‘클린턴 정부가 한 것은 무조건 안 된다(클린턴 정책 거부원칙)’ ‘클린턴을 부정하고 당선된 정부이기 때문에 그때 이야기 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남북관계도 정돈(停頓·나아가던 것이 막힌)상태로 들어간다.

    2001년 3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 요구와 주문을 한 것이 본격적으로 노정되면서 남북관계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2002년 1월13일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다. 한미군사훈련도 재개됐다. 잘나가던 남북관계에 미국이 노골적으로 제동을 거는 것이 분명해지고, 자신들을 악의 축으로까지 규정하자 북한도 시큰둥해졌다.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2002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은 임동원 외교안보특보를 특사자격으로 북한에 보내 김정일과 직접 대면하게 했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눈 끝에 김정일 위원장이 “좋다. 남북관계 원상회복하자”고 말하면서 그해에 33차례 남북대화가 이뤄지고, 그 과정에 남북간의 교역은 6억4000만달러로 크게 확대됐다. 인적 왕래도 전년도 8500명에서 1만4000명으로 늘었다.

    미국, HEU 문제제기 2개월 전 예고

    남북관계가 원상회복된 그해 10월에 또다시 핵문제가 불거진다. 이에 앞서 8월28일 서울에 온 네오콘 강경파 존 볼튼 차관이 최성홍 외무장관에게 “북한이 지금 핵과 관련해 뭔가 위반하고 있다. 문제가 있으니까 곧 터질 것이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에 가서 “고농축우라늄 계획(HEU)을 추진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폭로한다.

    북한은 처음에는 “없다”고 부인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있다, 어쩔래? 증거를 대라”고 반박했고 미국은 “증거는 네(북한)가 더 잘 알 테니까 네가 대라”고 했다.

    10월19일 8차 장관급회담을 위해 평양에 가기로 돼 있었는데 회담 이틀 전인 17일 ‘USA투데이’에 그 문제가 터졌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자고 그랬더니 “지방에 가고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박재규 전 장관처럼 기차라도 타고 가겠다”고 했다(박재규 전 장관은 2차 회담 때 북한에 가서 8~9시간 기차를 타고 가서 김정일을 만난 적이 있다).

    김 위원장을 만나서 ‘이 시점에 왜 핵문제를 일으키는가, 1993년처럼 풀려고 하지 말고 빨리 결단을 내려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북측에서는 나에게 김영남(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장을 대신 만나면 안 되겠느냐고 해서 “그렇다면 그(김영남)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에게 하는 이야기니까 정확하게 내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약속받고 만났다.

    김영남 위원장은 처음엔 ‘북-미간 문제니까 끼여들지 말라’는 투였다. 그런데 밑에 뭔가를 보고 읽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졌다. “그게 왜 우리 문제가 아닌가. 1992년 남북간 비핵화공동선언을 왜 만들었는가. 그걸 어긴 것 아닌가. 우리도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다. 우리는 당사자다”라고.

    그러니까 말을 못 했다. 나중에 “미국이 우리에 대해 적대정책을 쓰지 않으면 우리도 미국에 안보우려사항을 해소시켜줄 용의가 있다”면서 가까운 시기에 외교부 공식논평을 통해 이 이야기가 나갈 것이라고 했다.

    “무릎 꿇고 앉아 있어라”

    그런데 미국이 그해 12월부터 북한에 대한 중유 제공을 중단한다. 그러자 북한은 NPT를 완전 탈퇴하고 IAEA 사찰관을 추방해버렸다. 감시자가 없어지자 북한은 감시카메라를 돌려놔버렸다. 물론 완전히 없앤 건 아니다. 북한 사람들은 항상 퇴로를 열어놓고 협상한다.

    그러면서 핵 활동을 재개했다고 공표하는데, 사실 여부의 확인이 어렵다. 북한은 핵과 관련해 소위 ‘모호성’을 가지고 미국과 밀고 당긴다. ‘실제’보다는 모호성이 전략적으로 많이 쓰인다. 미국도 북한에 대해 ‘핵이 있다’고 한 적이 없다. 북한의 여러 가지 상황은 확인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다. 계속 추적하고 있다.

    북한은 이걸 역이용한다. 핵이 있는 것처럼 했다가, 없는 것처럼 했다가. 사이에 끼인 우리만 병신이 되고 있다. 국민은 정부에 “도대체 뭐냐? 실체를 밝혀라”고 하지만, 미국이 안 밝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국회 본회의에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에 “미국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 답한 적이 있다. 그게 한-미간 정보협력의 실체다. 그쪽에서 있다고 하면 있는 것처럼 해줘야 하고, 없다고 하면 없다고 해줘야 한다. 미국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가 있다고 하고, 미국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미국도 정부기관마다 분석이 다르다. CIA(중앙정보국) 분석이 다르고, DIA(국방정보국) 분석이 다르다. 민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상황에 따라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의 양도 달라진다. 처음에는 “6~8kg이 필요하니까 북한이 핵무기를 2개 내지 3개 밖에 못 만들 것”이라고 했다가 북한이 조금 미운 짓을 하면 “기술이 발달해 4kg만 가지고도 6개까지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겠는가.

    여기서 북핵문제의 현황을 좀 정리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부시 1기 정부는 6자회담을 열어놓고, 이를 통해 북한을 압박해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협상이나 타협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북한에 대해 “1994년 제네바합의부터 지키지 않은 나쁜 사람이니까 과거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은 일절 없다. 플루토늄을 포함해서 HEU까지 모든 핵계획을 무조건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공표하고 나서 무릎 꿇고 앉아 있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 그때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다.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입장에선 ‘북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essence of evil(사악함의 정수)이기 때문에 동시 이행은 안 된다. 도덕적으로 미국은 선하고, 북한은 악하다. 때문에 먼저 절대 나쁜 짓 안 하겠다고 회개하고 서약하고 모든 수단을 포기하면, 그때부터 인정하고 대화하겠다’는 방침인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만약 시키는 대로 벌거벗고 나가면 그때는 몽둥이로 때려죽여도 저항을 못한다. 협상을 하자는 이야기냐, 항복을 받자는 것이냐. 협상을 하자고 나와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게 북한측 이야기다.

    미국이 북한 붕괴를 전제로 제네바합의를 체결했다는 것도 북한이 나중에 알아버렸다. 누가 이야기해줬는지 모르지만. 북한은 “그러니까 우리만 약속을 안 지킨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볼 때 당신들도 약속을 안 지켰다. 핵 포기하겠다. 그러나 동시 행동하자”고 나왔다.

    지난해 미국 대선기간 중 부시는 케리와의 후보 토론에서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했다. 케리가 “(북한과) 양자회담 해줘라”고 하자 부시가 “그건 김정일이 원하기 때문에 절대로 안 한다. 그리고 6자회담에서 북한은 5 대 1로 고립돼 있다. 포위돼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이 나오겠는가. 게다가 “중국은 leverage(지렛대)다. 미국은 중국을 지렛대로 이용해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해버렸으니….

    어쨌건 미국은 당장 눈앞의 문제, 즉 6개를 만들었을지 4개를 만들었을지 모를 플루토늄 재처리문제는 거론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의심은 가는데 그 증거를 북한에 제시할 수도 없는 HEU만을 계속 문제 삼으면서 그걸 자백하라고 한다. 그러니 헛바퀴만 돌 수밖에. 발생학적으로 먼저 생긴 문제부터 처리하고, 뒤에 나온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지혜다.

    또 WMD(대량살상무기) 문제를 제기하려면 핵문제와 더불어 미사일 문제까지 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미사일 문제는 꺼내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회담만 하겠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우선 급한 것부터 하겠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급한 것부터 하려면 플루토늄 문제를 먼저 다뤘어야 한다. 한마디로 현재 북한은 핵카드를 통해서 체제 인정과 경제지원을 끌어내려고 하고, 미국은 그렇다면 북한이 먼저 완전히 항복하라는 것이다. 접점이 없다.

    최근 핵을 자진 폐기한 남아공이나 리비아식 해법이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남아공은 아무런 조건 없이 스스로 없애버렸고, 리비아는 영국의 중재하에 미국의 선의를 기대하고 스스로 먼저 폐기했다. 미국은 지금 북한에게 리비아식으로 핵을 폐기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중재자가 있어야 한다. 리비아와 미국의 중재자로 나선 영국은 리비아와 미국, 양측 모두에게 신뢰를 받았다. 쌍방의 신뢰가 있는 중재자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 일을 중국이 할 수 있을까? 지금 북한은 중국에 불신이 많다. 때문에 중국의 중재는 어려워 보인다.

    문제는 신뢰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선(先) 핵폐기, 후(後) 대화’ 원칙을 세운 것도 북한이 미국에 대해 벼랑 끝 전술을 쓰면서 같은 소리를 되풀이함으로써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는 한 북한 핵문제에 대한 완전 검증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오래 끌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이것이 2~3년 내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없다. 1994년 핵문제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여기에 농축우라늄 문제까지 생겼으니 더 장기화할 수 있다.

    큰 나라가 양보해야지…

    현재 양상은 독수리와 참새 싸움이다. 미국이 이 문제를 풀 생각이 있다면, 한반도 긴장 또는 불안정의 장기화가 미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바꿔 이야기해서 미국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진심으로 노력한다면, 미국이 먼저 양보해야 한다. 큰 나라가 양보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피해의식이 많다. 자존망대(自尊望臺)하는 것도 피해의식에서 나온다. 극도의 고립감도 갖고 있다. 북한은 자기가 먼저 양보할 경우 항복하는 것으로 생각한 상대방이 자기를 밟아 죽이려 들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남북대화를 하는 과정에 읽은 그들의 심리상태다. 우리가 먼저 퇴로를 열어주고, 북쪽에 양보를 보여주면서 큰 것을 받아야 한다.

    다행히 2기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외교안보 진영이 바뀌었다. 일단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 대사를 동아태차관보로 내정한 것은 한국의 생각을 존중하겠다는 태도로 해석된다. 또 존 볼튼 같은 네오콘도 뺐다. 라이스도 이제 럼스펠드의 지휘를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거기에 희망을 걸어본다. 북한을 달래기보다는 압박하는 미국 정부의 기본 정책이 크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협상을 조금은 유연하게 운영하지 않겠는가.

    라이스와 힐의 청문회가 끝나고 2기 진용이 완전히 갖춰지면 한국과 미국은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지난해 우리는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의 양보를 받아냈고, 그걸 가지고 북한을 조금 더 끌어냈다. 미국이 조금 어른스럽게 양보하고 그걸 가지고 또 북한을 더 나오게 해야 한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추진해온 방식대로 북한이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계속 조성해나가야 한다.

    지금 북한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요즘 북한이 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것은 변화와 개방 개혁에 따른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조문문제나 탈북자 문제는 구실에 불과하다. 북한으로서는 이제 남북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 동안 어떤 채널을 통해 무엇이 들어왔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점검하고, 체제의 위해요소를 사전에 발본색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베트남을 벤치마킹하면서 개방개혁을 시작한 결과 중국이나 베트남이 5년, 10년 걸려서 간신히 채택한 것을 바로바로 채택하고, 효과도 빨리 봤다. 하지만 효과는 반드시 부작용을 수반한다. 북한은 바로 그 부작용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재작년 가을부터 그 부작용이 심각해졌다.

    북한은 작년 4월에 형법을 대대적으로 고쳤다. 그 내용을 보면 전에는 없던 죄들이 잔뜩 생겼다. 사기죄와 불법거래죄, 외환, 심지어 성매매 규제 조항까지 나왔다. 모두 개방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다. 그 전 형법에서는 경제관련 범죄가 18개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개정하면서 74개로 늘었다. 소위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한 것도 특징이지만 법조문도 매우 구체화했다. 자본주의형 범죄 74개가 북한 사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개방·개혁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회질서와 관련해서도 16개에 불과하던 조항이 46개로 늘어났다. 거기에는 퇴폐문화를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선례를 보면 개방·개혁 과정에는 반드시 한번쯤은 재조정 내지 정리 정돈되는, 부작용을 치유하는 기간이 있다. 북한이 지금 그런 기간이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를 보면 그 기간이 지난 후 개방·개혁 속도가 더 빨라졌다.

    북한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 그 점을 놓고 미국과 우리가 긴밀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북한은 붕괴되지 않는다. 지금 진행중인 개혁·개방과 변화가 더 심화하도록 어떻게 지원하고 유도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그렇게 하면 북한은 질적으로 변한다.

    당분간 북한에겐 남쪽의 식량지원이 절실하다. 민간차원의 지원은 풀어주고 북한이 뛰쳐나가지 않고 계속 우리 울타리 안에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북한을 다독거리면서 체질적인 변화를 유도하고, 당면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근본적으로 남북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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