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65 한일협정 문서공개 후폭풍, ‘후생연금’

한인 징용자 24만명 미지급 연금 현시가 7조원대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5-02-22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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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무법인 삼일, 대규모 후생연금 반환소송 착수
    • ‘원금 반환 판결’ 난 바 있어 치열한 법적공방 예고
    • 日, 물가상승 고려해 대만 징용자엔 125배 반환… 한국은 7772배 요구
    ’65 한일협정 문서공개 후폭풍, ‘후생연금’
    장면1:1940년 여름 대구 시외버스정류장 근처를 걸어가던 16세 소녀 문옥주는 일본군에게 납치됐다. 일제 말기였던 당시 일본군에 의한 부녀자 납치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비공식 통계지만 태평양전쟁 희생자 단체들은 한국인 위안부가 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그들은 10대부터 40대까지, 또 빈민층에서 고학력자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징발되었다. 1944년 미얀마 전쟁터로 끌려간 문옥주도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1945년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온 문옥주는 부모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미얀마에서의 악몽을 잊지 못해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

    문옥주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2년이었다. 다른 위안부가 모두 그랬듯 문씨도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받은 돈을 ‘군사우편저금’ 형식으로 일본 우정성에 강제 예치해야 했다. 광복이 된 뒤에도 일본 정부는 이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1992년 문씨는 일본 정부에 자신의 군사우편저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인, 군속으로 일한 한국인들이 우정성 군사우편저금에 예치한 뒤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임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부인하면서도 유엔 인권위원회가 일본 정부의 범죄인정과 법적배상을 권고하자 피해자에게 1인당 200만엔의 보상금을 주는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정부 차원의 보상이 아닌, 민간기금으로 피해를 보상하는 것으로 책임회피라는 비판이 일었다. 문옥주씨는 이 기금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아시아 평화기금 안 받겠다”

    1996년 9월 기자는 문옥주씨를 만난 적이 있다.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던 문씨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생전에 부모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는데 추석에 차례도 지내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해 차례상을 차려줬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문씨는 숨졌다. 그의 미불(未拂) 임금은 지금도 일본 우정성에 그대로 남아 있다.



    엄연히 자기 명의의 계좌에 예치돼 있는 그 돈을 문씨는 돌려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가여운 여인의 손때 묻은 돈을 움켜쥔 채 끝내 내놓지 않았다.

    “일본을 ‘문화국가’로 인정못한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은 “일본을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자본주의국가’로, 보편적 양심을 가진 ‘문화국가’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장면 2 : 충남 논산 출신인 여운택은 20세 되던 해인 1943년 9월 ‘평양일보’에 난 광고를 봤다. (주)일본제철이 오사카 제철소에서 일할 근로자 100명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우도 좋고, 기술자 자격도 주는 데다 2년만 일하면 한국 황해도나 함경북도 청진의 제출소에서 지도원 자격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이었다.

    일자리를 찾던 여씨는 현해탄을 건넜다. 그러나 오사카 제철소에서의 생활은 광고와 딴판이었다. 임금은 공탁금으로 강제 예치됐다. 기숙사는 쇠창살이 설치된 감옥이었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강제노역이 이어졌다.

    여씨는 광복과 함께 귀국했으나 강제 예치된 공탁금은 받지 못했다. 여씨처럼 일본의 민간기업에서 노역을 한 사람은 후생연금에 자동 가입된다. 후생연금은 한국의 국민연금과 비슷한 개념으로 근로자의 임금에서 매월 일정액을 공제해 적립하는 돈이다. 퇴직시 일시불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후생연금 역시 받지 못했다. 여씨가 받아야 할 임금은 당시 돈으로 495엔52전, 후생연금은 316엔이었다.

    여씨는 미지급 임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일본 재판소에 냈으나 패소했다. 그러자 여씨는 이번엔 후생연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다시 제기했다. 2004년 11월17일 일본 재판소는 “일본 정부는 여씨에게 후생연금 316엔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위의 두 사례는 한일협정 문서 공개로 불붙기 시작한 ‘개인 재산 청구권’ 문제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태평양전쟁 때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군인, 군속, 노무자로 끌려가 복무했다. 한일협정 문서엔 이들 강제 징병·징용자들의 수가 103만2684명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일부 시민단체나 학자들은 150만에서 800만명(당시 한국 인구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한일협정에 기록된 징병·징용자들의 수는 일본 정부가 관련 자료를 내놓지 않은 가운데 정확한 실태조사 없이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 징병·징용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임금 및 후생연금을 공탁금으로 일본 정부에 예치했으나 해방 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단, 후생연금은 노무자에게만 해당된다. 징병·징용자들은 지금까지 주로 임금 공탁금에 대해 반환을 요구했다. 한 명 또는 수 명 단위로 일본 지방 재판소에 소송을 내는 방식이었다.

    ’65 한일협정 문서공개 후폭풍, ‘후생연금’

    1965년 한일회담 회의록.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한국 국민의 개인 청구권은 모두 소멸됐다’는 이유를 들어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일본이 근거로 내세우는 한일협정 관련 조항은 2조1항이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을 확인한다.”

    임금과 후생연금 중 먼저 임금 부분을 살펴보자. 한일협정으로 한국 정부가 일본의 경제협력자금을 받는 대신, 한국 국민 전체의 대일 청구권을 포기했으므로 비록 미지급 임금이 개인 재산이긴 하지만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게 일본 정부의 논리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인 징병·징용자들이 자신들 명의의 미지급 임금에 대한 재산권을 상실했다면 일본 정부는 당연히 이 돈을 국고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들의 미지급 임금이 예치된 계좌들을 그대로 존치시키고 있다. 이 돈을 한국인에게 지급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국고로 환수하는 것도 국제법상 무리가 있음을 일본 정부가 인정한 셈이다.

    이에 대해 장유식 변호사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실로 어정쩡하고 이중적”이라고 꼬집었다. 장 변호사는 “한일협정 2조1항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근로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신의 재산을 반환받을 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반박했다.

    “미지급 임금 문제는 근본적으로 근로자와 사용자(일본 정부 또는 일본 기업) 간의 계약이다. 미지급 임금이 근로자 명의의 계좌에 남아 있는 등 권리의 실체도 존재한다. 일본 정부는 제3자인 한국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채권자인 한국인 근로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채권자의 권리(임금 청구권)를 말소시킨 셈이므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 정부가 아닌 일본 기업이 한국인 근로자에게 지는 채무관계까지 한일협정으로 말소됐다는 것은 관습법적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임금 미지급금 반환소송을 준비중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최근 의미 있는 집계를 내놓았다. 이 단체가 ‘신동아’에 처음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정부로부터 미지급 임금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태평양전쟁 희생자는 모두 1475명이며, 미지급금은 일제시대 기준으로 306만2774엔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인 징병·징용자 본인이나 가족이 요청을 해야 미지급금 증명원을 개별 송부해주기 때문에 실제로 통보를 받은 수는 이정도 수준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인적사항을 통보한 한국인 징병·징용자는 모두 48만명으로, 군인·군속이 24만명, 노무자가 24만명으로 추정된다.

    이어 2004년 10월6일 일본 후생성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인사와 일본 시민단체인 ‘일본의 전후책임을 확실히 하는 회’ 우스키 게이코 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미지급 임금 공탁금의 존재가 확인된 한국인 군인, 군속의 수는 11만1269명이며 공탁금 액수는 9186만4001엔이라고 밝혔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공탁금 존재사실이 확인된 1475명이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이 돈을 반환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모색중이다.

    다음으로 후생연금 부분을 살펴보자. 후생연금 문제는 공탁금 문제보다 일본정부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장면 2’의 여운택씨가 지난해 말 일본 재판소 판결을 통해 일제시대 때 지급받지 못한 후생연금 원금 316엔을 되돌려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판결을 통해 ‘후생연금은 한일협정에 의한 개인청구권 소멸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는 미지급 임금의 반환 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법률가들은 “미지급 임금이나 미지급 후생연금 모두 한국인 징병·징용자들의 재산권이 행사되는 것인데, 왜 미지급 임금의 청구권은 한일협정에 의해 소멸됐고 미지급 후생연금의 청구권은 지금도 유효한지에 대해 일본 정부는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의 결과는 여운택씨 한 사람뿐 아니라 일제시대 징용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앞서 설명했듯 후생연금은 군인, 군속이 아니라 일본 기업에서 노무자로 근무했던 한국인들이 받아야 할 돈이다. 한국인 노무자의 숫자와 이들이 받아야 할 후생연금의 규모는 아직 정확히 산출되지 않고 있다.

    ’65 한일협정 문서공개 후폭풍, ‘후생연금’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서 강제 징병·징용 피해 접수를 받고 있다.

    이복렬 호원대 공과대학장이 확인한 1950년 미군정 발행 문서에 따르면 일본 기업이 한국인 징용노동자에게 지불해야 할 임금은 2억3000만엔이다. 이 학장은 이 액수를 현시가 12조4000억원으로 추산했다. 일본의 후쿠시마 의원도 “23만명의 한국인, 중국인 노무자의 미지불 공탁금 2억1514만7000엔이 일본은행에 보관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3만명 중 대부분은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여운택씨의 후생연금 반환을 이끌어낸 대구의 삼일법무법인은 “미군정 문서의 미지급 임금과 후쿠시마 의원이 밝힌 자료 등을 근거로 추산하면 문서로 확인되는 한국인 노무자의 미지급 후생연금 총액은 1억엔 정도”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인 노무자의 미지급 임금 및 후생연금의 총계와 개인 기록을 모두 공개하라는 한국측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삼일법무법인은 “일본 정부로부터 미지급 후생연금 액수 확인증을 송부받은 강제징용자 400명을 확보했다”며 “이들을 원고로 세워 일본 법정에서 후생연금 반환소송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소송의 핵심은 반환액 결정에 물가상승률 등이 고려되는가 여부다.

    여운택씨는 “일본 재판부가 일제시대 원금 316엔만 돌려주라고 한 판결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일본은 상식을 가진 나라가 되기 바란다.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1945년 소 한 마리 50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일본은 대만인 강제징용자들에게 미지급금의 125배를 반환했다. 유족회 관계자의 말이다.

    “단순히 계산해보자. 일제시대 소 한 마리 가격이 50엔이었다. 여운택씨가 받지 못한 후생연금 316엔은 소 6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요즘 소 한 마리가 500만원 정도니 여씨의 미지급 후생연금은 최소한 3000만원의 가치가 있다.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계산한 결과 일제시대 때 받은 금액에 7772배를 곱한 액수가 적정한 반환금액인 것으로 나왔다.”

    이 계산법에 따를 경우 한국인 노무자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후생연금 액수는 7조원대에 이른다.

    삼일법무법인 관계자는 “일본 정부는 일제시대 노무자로 일한 일본 거주 한국인(재일동포)에 대해선 물가상승률과 이자를 고려해 미지급 후생연금을 돌려준 것으로 안다. 일본 거주 한국인에겐 그런 방식으로 돌려주고, 한국에 있는 한국인에겐 원금만 주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기관인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최봉태 사무국장(변호사)은 “일본측이 일제시대 당시의 화폐가치로 미지급 후생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삼일법무법인 한 관계자는 “현재로선 소송 비용의 상당부분을 법무법인이 맡을 계획이다. 소송이 대규모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해 치열한 법적 공방이 벌어질 것을 예고했다.

    일제시대 한국인 강제 징병·징용자는 100만명이 훨씬 넘지만,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은 3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정부가 오는 6월까지 한국 정부 차원의 피해보상을 전제로 한 희생자 실태파악(1차)을 벌이고 있지만, 2월12일 현재 당사자나 유족들의 피해신고는 1만건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미 피해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탓도 있지만 관심이 없거나 정보를 취득하지 못해 자신의 재산권을 되찾지 못하는 피해자도 상당수 있다는 것.

    일제시대 일본 회사에서 일한 한국인 노무자들은 거의 모두 후생연금을 받지 못했다고 봐야 하는데, 자신의 이름, 근무한 기간, 장소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02-795-3316)나 삼일법무법인(053-743-0031) 등에 알려주면 이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미지급 후생연금 액수가 적힌 확인증을 받아주며 이를 근거로 소송에 참여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로부터 피해보상을 받기 위한 서류를 접수시키려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02-2100-8431)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문의하면 된다.

    “나를 살리려면 일본에 오라”

    그러나 징용자 본인이나 그 유족이 일본 정부에 미지급 임금이나 후생연금 기록을 요청해도 “기록이 없다”는 답변을 듣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남 순천 출신 임종만씨의 경우가 그랬다. 피해자 조사를 대행하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이 접수되고 있는데 임씨도 그중 하나다.

    부인, 딸과 함께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단란하게 살던 임종만씨는 1942년 일본군에게 연행돼 일본에 노무자로 끌려갔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임종만씨는 어느날 부인에게 “나를 살리려면 무조건 일본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영문을 모르는 부인은 딸을 데리고 일본으로 향했다. 딸은 도중에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다.

    임종만씨는 작업장으로 찾아온 부인을 만났다. 임종만씨는 군속 신분이 되어 다음날 태평양전쟁 격전지인 남양군도로 끌려가게 돼 있었는데, 일본 정부는 임종만씨와 그의 부인에게 하룻밤의 재회를 허락했다. 오는 길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임씨는 눈물을 흘렸다.

    임씨가 부인을 일본으로 부른 것은 “가족을 일본으로 불러들이면 2년 뒤 가족에게 돌려보내주겠다”고 일본측이 약속했기 때문.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 본토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본 정부는 이런 방식으로 한국인들을 유인했다.

    임씨의 부인은 일본에서 노역에 종사하며 남편을 기다렸으나 2년 뒤 남편을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임씨는 2년이 휠씬 지난 1944년 12월31일 남양군도에서 전사했다. 부대 전체가 전멸했기 때문에 전사사실만 통지됐을 뿐 다른 기록은 일절 가족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광복이 되자 임씨의 부인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안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 일본 정부는 임씨의 부인에게 임씨의 공탁금이나 후생연금 기록이 없다고 통보했다. 수많은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서 임씨처럼 죽어갔지만, 이들 대다수는 임금 기록이 없으며 인적사항 자체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은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희생된 한국인 징병·징용자에 대한 기록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공개하라는 요구가 빗발치면 그때서야 찔끔찔끔 내놓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양 회장은 “한일협정에 이미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돼 있는데, 2005년 현재 일본 정부는 한국인 희생자 48만명의 인적사항만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그나마 이들이 받지 못한 임금이나 연금 기록은 개별적으로 요청했을 때만 마지못해 내놓는다. 이런 도덕성으론 일본이 국제사회의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100만명을 납치한 나라’

    여운택씨는 일본 재판소에서 “316엔을 지급받으라”는 판결을 접한 뒤 치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고 한다.

    “지금 일본에선 북한이 10여명의 일본인들을 납치한 것을 갖고도 크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50여년 전 그들은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을 납치했습니다. 총알받이로, 성적 노리개로, 쇠창살 감옥에 가둔 채 일만 시키는 노예로 학대했습니다. 임금도 다 떼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연금에 대해선 청구권이 살아 있다고 하자 50년 전 화폐단위 그대로 지급하겠답니다. 도대체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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