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여의도 말아톤’ 다운증후군 딸 키우는 나경원 의원

“유나야 고마워, 난 네 미소만으로도 행복해…”

  •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5-02-22 18: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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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장부터 화제였다. ‘30대 후반 미모의 여성판사,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 법률자문 여성특보 전격 발탁’. 선거기간 내내 그녀는 이 후보를 뒤따랐다. 마치 배경처럼. 이 후보의 대선패배와 동시에 사라진 그녀는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등장한다.
    • 다운증후군 장애아를 가진 한 엄마로서.
    • 그녀는 그렇게 정치인이 됐다. 그리고 1년 후.
    ‘여의도 말아톤’  다운증후군 딸 키우는 나경원  의원
    한 자폐아의 인생 극복기를 그린 영화 ‘말아톤’이 인기다. 요즘 보기 드물게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감동과 여운이 남는 영화다.

    나경원 의원(羅卿瑗·42·한나라당)은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박근혜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 함께 한번, 며칠 후 ‘장애아이 위캔(We can)’ 모임 회원들과 또 한번 봤다. ‘장애아이 위캔’은 지난해 나 의원이 직접 만든 모임이다.

    나 의원은 영화를 보면서 남들처럼 웃지 못했다. 아니 남들이 웃으면 웃을수록 목이 멨다. 그녀에겐 다운증후군 장애를 갖고 있는 딸이 있다. 올해 만 12살로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는 유나다. 나 의원은 영화 속 주인공 초원이의 모습에서 유나를 봤다. 초원이의 영화 속 행동이 바로 현실 속의 유나의 행동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을래야 웃을 수가 없었다.

    나 의원은 일주일에 두 번 변신을 한다. 월요일 오전 6시30분 눈을 뜨는 순간부터 그녀는 정치인이 된다. 미리 약속된 조찬모임부터 시작해 끊임없는 회의와 약속이 그녀를 기다린다. 하루하루가 예약된 전쟁이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 일주일이 순식간이다.

    토요일 낮 12시, 나 의원은 다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변신한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대 법학과 동기인 김재호 서울고법 판사. 그리고 딸 유나 밑에 아들 현조가 있다. 주말은 온전히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 그녀는 토요일 12시 이후에는 웬만해선 약속을 잡지 않는다.



    그런데 그 원칙을 기자가 깼다. 2월12일 토요일 오후 1시30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그녀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한 것. 어떤 원칙이든 예외는 있는 것 아닌가.

    약속시간 10분 전쯤 아파트 현관을 막 들어설 무렵, 어디서 많이 본 미인이 서둘러 앞서 들어간다. 나 의원이다. 조그맣고 서구적인 얼굴에 잘 관리된 몸매와 단정한 옷차림. 누가 봐도 40대 초반의 아줌마 모습이 아니다. 한데 몇 달 전보다 야위어 보인다. 내내 시달렸으니 피곤하기도 할 법하다.

    나 의원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두 아이와 남편 모두 있었다. 딸 유나는 언뜻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건 장애정도가 그리 심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남편 김 판사는 인터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 의원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사진촬영을 위한 세심한 배려이자 센스.

    -영화 ‘말아톤’을 두 번이나 보셨는데 어떻든가요, 평을 한다면.

    “글쎄, 제가 영화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만든 것 같아요. 세세한 부분까지 구성이 탄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 가족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꼼꼼하게 다뤘다고 생각해요.”

    -일부 장면은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너무 과장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던데요.

    “장애아동을 비하했다면 문제가 될 텐데 그런 게 아니잖아요. 흥행을 목적으로 조금 과장했다고 해도 지금 영화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칭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본다면 그만큼 장애인이나 장애아동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지지 않겠어요.”

    출산 순간 불길한 느낌이…

    사실 나 의원은 유나를 낳기 전까지는 다운증후군에 대해 전혀 몰랐고, 일부러 알 필요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딸 부잣집 4자매 중 첫째인 나 의원은 어렸을 때부터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다. 집안에 경제력도 있고 공부도 잘해 서울의 유명 사립초등학교에 이어 서울여고, 서울대 법대 및 대학원을 거쳐 1992년 사시에 합격하는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나 의원은 유나가 태어난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이를 낳는 순간, 간호사와 의사의 호흡이 일순간 멈춰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상하다 싶었죠. 간호사가 ‘딸이에요’ 하면서 보여주는데 아이가 못 생겼더라고요. 갓 태어난 아이는 못 생겼다고 하기에 그런가보다 했죠. 다운증후군은 생김새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의사와 간호사는 이미 정상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피검사와 염색체 검사를 하고 정확한 걸 이야기해야 하니까 말을 못했던 거죠. 그러고 나서 하루 정도 있는데 남편 얼굴이 밝지 않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 데도 대답을 안 해요. 친구가 그 병원 의사였는데 꼬치꼬치 물어보니까 이틀인가 있다가 말을 해주더군요. 그래서 알게 됐죠. 다운증후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최악의 경우 아이가 아예 우유를 못 빨 수도 있다더군요. 그리고 워낙 증세도 다양하고, 진행도 다양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처음에는 정말 암담했죠.”

    -충격이 컸을 텐데 주변에서 누가 가장 큰 버팀목이 됐나요.

    “남편이죠.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을 텐데, 저보다는 남편이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 같더라고요. 묵묵하게. 서로 이야기 안하고 그냥 같이 지냈어요. 이야기 한다고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 같아요. 열심히 키우자고.”

    -출산 전에 태아 장애감별을 안했나요.

    “그때 혈액검사를 했는데, 정상범위에 든다고 했어요. 근데 혈액검사에서 장애여부가 다 안 잡힌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였어요. 양수검사를 하면 100%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건 산모 나이가 보통 35살 이상일 경우에 한다더군요. 유나를 낳을 때 전 그 나이가 되지 않았던 거죠.”

    -만약 출산 전 검사결과 장애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습니까.

    “솔직히…그렇다면 병원에서 (낙태를) 권유하지 않았겠어요. 산모의 의식도 비슷할 것이고. 그냥 막연히 생각해보면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초등학교 입학시킬 때 느낀 좌절

    -맞벌이 부부였는데, 유나는 어떻게 키웠나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는 직접 키워주시진 못하고, 근처에 사시기 때문에 조금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있을 때 부산에서 한 4년 살았는데, 사실상 제가 끼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유나를 키웠죠. 사실 저 때문에 또 어머니가 희생하시는 것은 정말 원치 않았어요. 어떻게든 저 혼자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항상 문제인데, 여자가 일을 하면 항상 또 다른 여자가 희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아이들 생각만하면 할머니들이 와서 좀 도와줬으면 할 때도 있는데, 할머니들도 다 본인들의 인생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죠.”

    -많이 힘들었겠어요.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그게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직장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는데, 자기의 개발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없잖아요. 또 정치인과 법조인을 비교하자면, 법조인일 때는 제 시간을 관리할 수 있어서 그나마 좋았어요. 판사 일은 자기 혼자 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하고 꼭 만날 필요도 없고, 자기 혼자 판결문을 쓰면 되거든요. 또 1주일에 한번 정도 재판하기 때문에 시간을 충분히 관리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어요. 그런데 정치는 남하고 같이하는 일이 많고, 어떤 중요한 사건이 터지거나 갑자기 농성에 들어간다든지 하면 시간 관리하는 게 참 어려워요.”

    나 의원은 유나를 키우면서 초등학교 입학을 시키는 과정에 가장 큰 좌절을 맛봤다. 나 의원은 딸을 사립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장애아라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만다. 아무리 사정해도 돌아오는 건 상처뿐이었다. 법적으로 한번 따져보려고도 했다.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 아닌가. 그러나 딸이 받을 상처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이 사건이 결국 나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가 된다. 현재 유나는 집 인근의 일반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유나가 학교 다니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나요.

    “많죠. 학교에 갔다 온 유나한테 ‘누가 때렸어’ ‘누가 놀렸어’라는 말을 들으면 맘이 얼마나 아픈지. 같은 반이나 같은 학년 아이는 별로 안 그래요. 그런데 다른 학년 아이는 잘 모르니까 자기와 다른 부분, 유나가 잘 못하는 부분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거죠.”

    -유나가 운동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축구를 특히 좋아해요. 아침에 신문이 오면 스포츠 면을 꼭 보고, 무슨 스포츠 중계를 하는지 봐요. 만약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중계가 있는 날에는 외식하러 나가자고 해도 안나가요. 그런데 작년에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좀 다쳤는데, 그 후론 잠깐 등산만 해도 아프다고 해요. 아무래도 다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속상해 죽겠어요.”

    딸에게 친구 만들어주고파

    -남동생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유나는 현조를 잘 챙겨줘요, 누나라고. 현조는 작년까지는 잘 모르다가 요즘에 들어서야 누나가 다른 사람과 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가끔은 투정하죠. ‘누나는 장애 가졌다고 공부 안하고 TV를 봐도 가만히 놔두느냐, 왜 자기만 숙제하라고 하느냐’면서. 사실 그때 제일 곤란한 것 같아요. 그래도 현조한테는 비교적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누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네가 이해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조에게는 그게 스트레스인 거죠. 사실 유나에게는 책을 통해 지식을 전해주기 어렵기 때문에 TV라도 취미를 붙이고 꾸준히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도움이 돼요. 유나가 좋아하는 축구선수 이름이나 세세한 경기장면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거든요.”

    ‘여의도 말아톤’  다운증후군 딸 키우는 나경원  의원

    공부방에서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한 나경원 의원. 왼쪽부터 딸 유나, 아들 현조.

    사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바로 아이의 미래에 대한 준비다.

    “저에게 소원이 있다면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거예요.” 영화 ‘말아톤’에서 어머니역을 맡은 배우 김미숙씨가 힘없이 내뱉은 이 한마디엔 진한 페이소스와 아픔이 절절히 묻어난다. 사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마음이 다 그렇다. 나 의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결국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는 아이한테 직업이나 취미를 만들어주는 일인데, 둘 다 되면 더 좋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친구를 만들어주는 일이에요. 만약에 내가 없을 경우 유나를 누가 돌봐줄 수 있느냐, 유나가 과연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죠. 우리나라가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문제가 개인 또는 한 가정의 걱정이나 부담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장애아를 둔 부모로서 또 정치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요.

    “국회에 들어와서 첫 번째 한 일이 국회에 장애인특위를 설치하자는 것이었어요. 보건복지위에서 장애인 문제를 주로 다루지만, 거기서만 담당할 일이 아니거든요. 다행히 지난 연말에 장애인특위를 설치하기로 여야간 합의를 했어요. 그리고 ‘장애아이 위캔’은 의원들이 장애인이나 장애아동에 대해 많이 알고 이해하면 모든 정책을 정할 때 자연스럽게 배려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 그리고 인식의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든 겁니다. 그 모임에서 공청회를 열고 조기교육이나 조기치료의 문제, 학령기 장애아 교사나 체육활동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도 했고요.

    우리나라 특수교육법에 보면 아이들 개별화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때 학부모에게는 진술할 수 있는 기회밖에 주지 않아요. 반면 미국의 경우에는 학부모도 운영위원으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수 있도록 돼 있죠. 그래서 요즘 우리의 특수교육도 좀더 내실화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어요.”

    -나 의원은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인가요.

    “지금은 별로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아요. 아이들과 같이 있는 시간을 많이 갖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하죠. 그래서 항상 미안해요. 오히려 아이들이 엄마가 사회활동 하는 것을 이해해주는 것 같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해 12월24일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아직 자기 방에서 못 자기 때문에 요즘도 온 가족이 같이 자거든요. 다 누웠을 때 유나한테 ‘유나야, 너 엄마에게 바라는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해’ 그랬더니 ‘엄마 아주 가끔 일찍 와’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미안했어요.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정치판에 이용당한 것 알고 후회막급

    나 의원은 1995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4년을 근무하다 1999년 인천지방법원을 거쳐 2002년 2월 서울행정법원 판사로 옮겼다. 당시 남편은 서울남부지원 판사로 재직중이었다. 평범한 일상의 연속.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어느 순간 정치권에 뛰어든다. 갑작스런 변신. 도대체 이유가 뭘까.

    “딸이 입학할 때 받았던 상처도 한 이유죠. 하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판사로 일하면서 나름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무엇보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권유를 받은 게 가장 컸죠. 학교와 법조계 대 선배셨는데.”

    -이 후보와 직접 만나서 권유받은 거죠? 뭐라고 하시던가요.

    “판사도 보람 있는 직업이지만 이쪽도 보람 있는 일이 많다고 하셨어요.”

    -나 의원의 마음을 가장 흔들었던 말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사실은 이 후보 말고, 당시 현직에 있던 대 선배님이 적극 권유했어요. 굉장히 오랜 기간 법조계에 몸담았고 성공한 법조인이었는데, 그 분이 말씀하시니까 더욱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분 말씀이 ‘이렇게 오랫동안 법조인으로 생활해도 남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가 혐오하기까지 하는 정치인은 그 중요성이나 영향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사명의식을 갖고 일하면 정치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문 정치면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로 무관심했다고 하던데, 혹시 내심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닙니까.

    “좋아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어요. 솔직히 법조인으로서 정치인 알기를 우습게 알았죠. 다만 잠재적으로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주변에서 다른 분야에서 일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던 터라 고민 끝에 결정한 겁니다.”

    -사표내고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한참 후회했죠. 사표내고 나서 한 일주일 정도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 아닌가’ 싶어 잠도 오지 않더군요. 한 5kg쯤 살이 빠졌던 것 같아요.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을 입어도 안 맞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회창 후보를 수행하면서 상황판단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 일이 그다지 보람되지는 않았어요. 이 후보 주변에는 이미 각 분야 정책전문가가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별로 할 일이 없었던 거죠. 특히 의원이 아닌 특보라는 점에서도 한계가 있었고요. 결국 대선에서 패배하고 모든 게 끝난 후 ‘이건 내 길이 아닌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죠. 다시 판사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 변호사로 다시 시작했어요. 정치라는 게 사명의식이 없으면 참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죠.”

    -대선 때 이 후보를 따라다니면서 정치판에 이용당한다는 느낌은 없었나요.

    “사실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제가 보람을 못 느끼고 과감히 법조계로 돌아갔죠.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너무 노령화돼 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저를 영입했던 것은 젊은 사람들도 한나라당에 기대를 갖고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대선에서 졌으니 아무런 결과물도 없었던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바로 떠났죠.”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 진출 결심

    -반년 만에 당 여성운영위원으로 정치에 복귀한 이유는 뭔가요.

    “당에서 발표하기 전까지 저는 당 운영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전혀 몰랐고, 제가 원했던 일도 아니에요. 당에서 여성운영위원을 뽑을 때 대선 때 고생한 사람도 함께 후보로 올려놓고 투표를 했는데, 제가 가장 많은 득표를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전 상처도 깊고 해서 정치에 별로 뜻이 없었어요. 이름만 올려놓고 별로 활동을 안 했죠. 55명 중에 한 명이었기 때문에 대세의 흐름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공천심사위원회는 달랐죠.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했어요.”

    -그렇다면 다시 정치에 뛰어들 결심은 언제 한 것인가요.

    “탄핵 이후 나라가 두 동강으로 딱 잘라지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더군요. 정치가 통합과 화합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편가르기로 인한 극한대치가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더군요. 그 때 의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판사 시절의 생활과 정치인이 된 이후의 생활이 많이 다를 텐데요.

    “정치인이 된 후에는 아무래도 귀가시간이 늦고 남편과의 관계가 옛날 같은 법조인일 때와는 사뭇 달라졌죠. 옛날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기 때문에 너무 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전혀 모르는 분야니까 일일이 설명해야 하거든요. 그러다보니 남편과 대화가 줄어들었는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정치라는 걸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너무 바쁘고 힘들더라고요.”

    -지난 1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소속 의원으로서 한나라당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의원들 개개인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당의 역량으로 결집되고 표현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당내에 ‘우리는 안 된다’는 패배주의가 만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당의 역량으로 결집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시스템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겠죠. 어떻게 보면 당의 이익과 의원 개인의 이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당이 잘된다고 의원 개인이 잘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건 어떤 정당이나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게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이 당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그건 당 지도부가 당내 갈등을 조율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요.

    “당 지도부만 비판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책임이 당 지도부에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의원 개인의 의식도 변해야할 거라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해요. 개인적인 욕심을 다 버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비단 한나라당 의원뿐만 아니라 정치인 모두 말입니다.”

    나 의원은 국가보안법 일부 개정론자다. 폐지는 절대 반대다. 그녀 스스로도 ‘보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위 ‘수구꼴통 보수’는 아니다.

    “그동안 보수가 비판받았던 이유는 보수라고 주장하거나 대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나 타인 혹은 사회에 대해 무책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분명한 원칙 속에서 자신의 행동과 인권문제 등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인 거죠. 한나라당도 변해야 합니다. 인권문제에도 좀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해요.”

    나 의원은 지난 1년간 처음 경험한 일이 많다. 소속 상임위인 정무위에서 여당의 공정거래법 개정안 강행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때로는 ‘투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대여 협상가’가 되기도 했다. 연말에는 국보법 폐지를 막기 위해 법사위 회의실 점거농성에 참여했다. 그녀로서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변신인 셈이다.

    “정치인들의 농성에 대해 많이 비판하는데, 야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는 없어요. 여당이 ‘다수결의 논리’가 아니라 ‘다수당의 논리’로 가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기막힌 일도 많았어요. 여당의원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놓고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 한나라당이 좀 세게 반대해 달라’고 해요. 그러면서도 공식적으로 회의가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런 이야기는 일언반구 안 하죠.”

    -누군가 ‘앞과 뒤가 다른 게 정치다’라고 하더군요. 정치인으로서 1년 동안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국회는 남자가 아이 낳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국민이 국회의 파행을 비판하는데, 그 원인을 잘 살펴보면 국회만큼 법을 무시하는 곳이 없는 것 같아요. 작년에 상임위에서 법대로 좀 하자고 주장했더니 누군가 그러더군요, ‘국회를 법원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법과 원칙을 뛰어넘는 것이 정치라는 말을 하는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법과 원칙을 존중하면서 정치를 한다면 국민에게 좀 더 나아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정치권에 들어와서 보니 의원들 모두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일하고 또 한 가지씩 배울 점이 있더군요. 그것이 당의 역량으로, 정치 집단의 역량으로 모아졌으면 좋겠어요.”

    늘 좋은 엄마, 아내가 되고 싶어

    나 의원의 경험담을 듣고 있자니, 막 수습딱지를 뗀 정치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직 순수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정치에 아무런 사심이 없다. “정치는 나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사심이 들어가고 그래서 국민이 싫어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기회가 되면 계속하는 것이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오면 양보해야죠.”

    그녀는 아직 좋은 정치인보다는 ‘늘 좋은 엄마와 아내’가 되기를 희망한다. 정치는 그만뒀다가도 다시 재개할 수 있지만 가족은 한번 깨지면 원상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리라.

    나 의원은 딸 유나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가끔은 차라리 딸과 자신이 바뀌었으면 하고 기도한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다.

    “슬프고 힘들 때도 많았지만, 유나가 유치원에서 처음 발표회를 할 때 정말 눈물나도록 기뻤어요. 건강하고 밝게 커주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올해 정치인으로서 나 의원은 금융 분야에 집중할 생각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역시 국회 정무위원회 최대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공정거래법과 국내 자본의 역차별문제 등에 대해 꼼꼼히 챙길 작정이다. 필요하다면 법안도 만들고. 사심도 욕심도 없다는 그녀는 그렇게 ‘슈퍼우먼’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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