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순교자’작가 김은국의 행적을 찾아서

매사추세츠 시골마을서 암 투병중… 그러나 불꽃처럼 타오르는 예술혼

  • 김욱동 서강대 교수·영어영문학, 문학비평가

    입력2005-02-23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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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교자’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재미작가 김은국. 1990년대 초반 이래 완전히 자취를 감춰 ‘문단의 수수께끼’가 된 그가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암 투병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병 때문에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고 은둔했던 것. 그의 행방을 수소문해온 서강대 김욱동 교수가 그간의 ‘추적기’와 노작가의 근황, 그의 ‘세계인적 문학관’과 드라마틱한 삶을 정리해 ‘신동아’에 보내왔다. [편집자]
    ‘순교자’작가 김은국의 행적을 찾아서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던 무렵의 김은국.

    어느 날갑자기, 그가 사라졌다. 1960년대 미국과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한국인 작가이던 그가, 199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공적인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더러 아예 자취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그와 접촉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비에 싸인, 미스터리에 가까운 ‘실종’이었다.

    재미작가 김은국(金恩國, 미국명 Richard E. Kim·73). 40대 이상의 세대로 책을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1964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그의 처녀작 ‘순교자(The Martyred)’는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작품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을 뿐 아니라 1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지구촌 곳곳에서 읽혔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무렵 최초의 소년가장이라고 할 이윤복의 수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함께 나란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서울에서는 같은 이름의 영화와 연극, 오페라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순교자’ 한 권으로 김은국은 1967년 한국 작가 혹은 한국계 미국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문인들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1970년대 중반 이후임을 감안하면 이 무렵 그가 얻은 문학적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처녀 장편 ‘순교자’처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어도 1968년에 출간된 두 번째 장편소설 ‘죄 없는 사람(The Innocent)’이나 1970년 출간된 논픽션 소설 ‘잃어버린 이름(Lost Names)’도 적잖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TV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방영된 커피 광고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 그 깊은 인생을 듣는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카피로 크게 유행한 이 광고에 김은국은 첫 광고모델로 출연해 문학 애호가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인간적인 이미지와 고향을 떠나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인간정신을 탐구하는 작가야말로 광고카피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모델이었다. 아련한 추억 속의 고향을 그리며 지나온 세월을 되새기고 ‘가슴 따뜻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미지였다.

    그 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학계와 문단을 통틀어 그의 이후 소식을 들었다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이러저러한 소문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작가와 비슷한 연배로 한때 그를 만난 적이 있는 김용권 서강대 명예교수는 필자에게 “어쩌면 그는 미국인 아내와 이혼한 뒤 한국에 돌아와 외부세계와 인연을 끊고 혼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귀띔해준 적이 있다. 그러나 확인된 소식은 아니었다.



    무수한 소문, 잘못 알려진 사실들

    몇 년 전부터 한국계 미국문학에 관심을 기울여온 필자는 그 일환으로 김은국에 관한 단행본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으로 미국 문단에 데뷔해 관심을 받은 첫 번째 작가는 김은국보다 한 세대 앞선 1930년대의 강용흘(姜鏞訖·1903∼72)이었다. 그는 ‘초당(The Grass Roof)’과 ‘동양사람 서양에 가다(East Goes West)’ 같은 장편소설로 미국 문단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신동아’ 2004년 12월호 624쪽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참조). ‘초당’의 경우 1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 계획도 있었다.

    김은국은 그 바통을 이어받은 한국계 미국 작가 제2세대라고 할 수 있을 터. 김은국에 이르러 싹튼 한국계 미국문학은 1980년대 이후 캐시 송(Cathy Song)이나 이창래(Chang-rae Lee), 돈 리(Don Lee) 같은 젊은 작가들에 의해 활짝 꽃을 피운다. 현재 미국문단에서 한국계 작가들의 활약은 가히 백화제방의 시대를 맞고 있다.

    학계의 다른 이들에게 김은국의 행방은 지적인 궁금증, 혹은 후일담에 불과했겠지만 한국계 미국문학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필자에게는 꼭 밝혀내야 할 과제에 가까웠다. 특히 필자가 준비하던 책이 작가론과 작품론을 겸하는 것이었기에 작가의 전기부분에서 본인으로부터 직접 확인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아직 생존하는 작가치고는 내용이 불확실하거나 틀린 곳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출생에 관한 부분만 해도 국내에서 출간된 백과사전에는 그가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렇게 표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사실과 다르다. 황해도 황주는 그의 부친이 태어난 곳이고, 그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김은국이 주로 황해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잘못 전해진 듯하다.

    잘못된 내용이 확인될수록 본인의 행방을 찾는 일은 작가론을 쓰는 학자로서 점점 피할 수 없는 숙제가 되어갔다. 그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디서부터 그의 흔적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순교자’작가 김은국의 행적을 찾아서

    처녀작 ‘순교자’가 베스트셀러가 된 직후인 1964년 찍은 김은국 부부의 사진.

    김은국의 행방을 찾아내기로 결심한 2004년 가을, 필자가 생각한 첫 번째 접근방법은 그의 부친을 경유하는 것이었다. 한 국내 연구자가 쓴 논문에 따르면 그의 부친 ‘김창도’는 일본 식민지시대 독립군으로 활동한 애국지사로 1994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인물이다. 당연히 그의 유족에 관한 기록도 관계기관에 남아 있을 터. 이를 통해 김은국 본인과 연결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고, 최소한 그의 친형제와 연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첫 시도는 어이없게 좌절됐다. 그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사실과 달랐던 것이다. 국가보훈처 자료를 살펴보면 애국지사 ‘김창도(金昌道)’는 평안남도 대동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홍범도 장군과 이청천 장군 휘하에서 활약했다. 김은국의 부친과는 고향부터 달랐다. 결정적으로 김창도 옹의 외아들인 김원진씨는 현재 충청북도 청주에서 식료품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은국과는 도무지 연결될 수 없는 고리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필자가 김은국의 소재와 근황을 찾기 위해 다음으로 접근한 경로는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미주한국문인협회’였다. 마침 2004년 겨울방학을 맞아 미국에 잠시 머무를 계획도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협회와 접촉했다. 1982년 9월 창립된 이 협회는 한국에서 문인으로 활약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든 단체로 박남수, 고원, 권태응, 송상옥, 마종기 등의 문인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작고했고 현재는 송상옥씨가 회장을 맡고 있으며, 230여명이 정식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이 협회의 연혁을 보면 김은국은 1984년에 협회가 주관한 제2차 범세계한국예술인대회에 참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때 함께 참석한 사람은 서정주, 김춘수, 전숙희, 이해랑, 김윤성씨 등 잘 알려진 문인들이었다. 1986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제3차 범세계한국예술인대회가 열렸는데 김은국은 이때도 송상옥, 김송희씨 등과 함께 참가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후 김은국은 미주한국문입협회와 이렇다 할 관계를 맺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과 시기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행방을 쫓을 만한 단서도 구할 수 없었다. 회원명단에는 올라 있지만 실제활동은 거의 하지 않아 다른 회원들과는 달리 주소나 전화번호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협회 사무실에 몇 차례나 문의해보았지만 매번 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장시간 통화도 어려울 만큼 쇠약

    한국과 미국의 두 가지 근거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필자는 결국 인터넷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의 소재를 찾아주는 유료 검색 웹사이트가 그것이었다. 화면을 열자 이름과 생년월일, 살고 있는 도시를 입력하도록 되어 있었다. 김은국의 미국명인 ‘Richard E. Kim’을 입력했더니 무려 100여명에 이르는 사람이 명단에 올라왔다. 아직 좌절할 때는 아니었다. 국내에 알려진 그의 생년월일이 맞다면, 그의 소재가 이 웹사이트에 올라 있다면 후보를 줄여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생년월일을 치자 이번에는 일곱 사람으로 줄어들었다. 명단을 꼼꼼히 살펴보니 주소가 같은 것으로 보아 그 몇 사람도 결국은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비용을 결제하고 확인한 이 ‘Richard E. Kim’의 거주지는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이었다.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허탈한 느낌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인터넷으로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을 그동안 그렇게 안달복달했다는 말인가.

    물론 ‘Kim’이라는 성이 한국계와 중국계에 상당히 흔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매사추세츠의 리처드 킴’이 김은국과 생년월일까지 같은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방법은 확인뿐. 주소와 함께 알아낸 전화번호를 돌렸다. 계속 울리는 신호. 그러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시간대를 달리해서 몇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한 번도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필자가 머물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와 매사추세츠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계속 연결을 시도하던 지난 1월25일 오후 2시 무렵, 드디어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혹시 김은국 선생님이 아니냐”고 묻자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마침내 찾았다는 기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가까스로 통화가 되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통화를 오래 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전화를 잘 받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문제의 시골마을은 매사추세츠의 주도(州都) 스프링필드에서 30여마일 떨어진 곳으로 매사추세츠대학이 위치한 앰허스트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1964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창작을 강의해 온 매사추세츠대 근교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온 셈이다. 물론 뉴욕주의 시러큐스대와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이고주립대, 그리고 풀브라이트 교환교수 자격으로 2년 남짓 한국에 머물던 때를 빼고 말이다.

    김은국씨가 최근 들어 이렇게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것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지만 그는 수년 전부터 암과 투병중이다. 평소에도 사람 만나기를 꺼리던 그가 암과 싸우면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전화로 그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거나 직접 만나서 인터뷰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능한 것은 이메일 교환 정도라는 승낙이 떨어졌다. 전화를 끊자마자 필자는 곧바로 그동안 궁금했던 몇 가지 사항을 적어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이날 밤 8시 무렵 답장이 도착했다.

    답장을 받고 나자 한편으로는 무척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적잖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고맙게 느낀 것은 필자가 문의한 사항에 꼬박꼬박 성의껏 답해주었기 때문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은 편지 끝부분에 적힌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이다.

    답장은 왔지만…

    “나는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문제와 정보를 낯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제공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내가 모르는 사람과 나의 사생활을 이것저것 밝히고 의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나는 전화로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나는 아주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사람이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나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었으면 합니다.”

    필자는 김은국씨에게 몇 년 전부터 그에 관한 단행본 저서를 집필중이며 작가의 삶과 관련한 부정확하거나 의심스러운 사항을 묻고 싶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도 그는 사생활과 프라이버시를 소중하게 여긴다면서 앞으로 그런 문제로 연락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자신의 전기나 연구서를 집필하는 학자에게 협조적인 것이 보통이다.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잡으려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실제 이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경우도 많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후세에 좀더 정확하게 혹은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령 헤밍웨이는 자신의 전기와 연구서를 집필하던 칼로스 베이커 교수에게 직간접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윌리엄 포크너의 전기를 집필한 조지프 블로트너 교수도 작가로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필자는 김은국씨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의 행방을 찾으면 물어보리라 다짐했던 질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건강상태는 어떠한지, 소장하고 있는 책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무엇보다도 그의 문학관과 세계관은 어떤 것인지…. 가능하면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 찍은 사진을 비롯해 귀중한 자료도 얻고 싶었다.

    이렇듯 장밋빛 기대에 부풀어 있던 필자에게 그의 답신은 무척 큰 실망이었다. 심지어 필자는 그가 단순히 묻는 말에 대답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정보를 말해 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은국은 달랐다. 그는 만남을 원치 않았다. 필자의 생각이 어떠하든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편지를 받자마자 필자는 곧바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먼저 답신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그의 부탁대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다만 반드시 확인해야 할 일이 생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이메일을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식민지, 해방, 전쟁

    이제부터 밝히는 내용은 필자가 그 동안 연구한 것에 김은국 본인이 이메일을 통해 들려준 내용을 덧붙여 정리한 그의 삶의 궤적이다. 식민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랐다가 지금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타향의 시골마을에서 투병중인 한 사내의 인생과 문학을 담은 글이다. 불분명한 부분에 대해 본인의 확인을 거쳤기에 그간의 다른 설명에 비해 한결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김은국의 문학세계와 세계관이 보다 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다면 충분히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우선 그의 부친에 관련된 내용부터 바로잡기로 하자. 김은국의 부친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름은 ‘김창도’가 아니라 ‘김찬도(金燦道)’다. 만주에서 활동한 김창도 옹과는 달리 주로 국내에서 활약한 김찬도 옹은 수원고등농림학교에 다니던 1926년 여름에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항일 비밀결사인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한다. 이 일로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8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30년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광복 후 항일운동의 공로로 1980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순교자’작가 김은국의 행적을 찾아서

    1980년대 초반 교환교수로 서울대에서 강의하는 모습.

    김은국은 193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이던 기독교 집안이었다. 테너로 이름을 날리고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성악가 이인범(李仁範)씨와는 고종사촌간이다. 이인범씨가 평안북도 용천 출신인 점을 고려하면 김은국의 집안은 주로 북한지방을 기반으로 생활해왔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에서 자란 김은국은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 식민지시대에 대해 적잖이 울분을 느꼈던 것 같다. “남의 나라 식민지에 살면서 공부는 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며 공부를 게을리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의 할머니는 나이 어린 손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은국이, 이 할미 얘기 좀 들어보라우. 일본놈들이 아무리 흉악해도 말이야, 우리한테서 못 뺏어가는 거이 있어. 그거이 바로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이야. 지식은 아무도 못 뺏어가. 기리니끼니 고저 열심히 공부하라우.”

    할머니의 말을 명심한 그가 그 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수십 년이 흐른 뒤 김은국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3세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광복을 맞기 한 해 전 김은국은 한강 이북에서 최고 명문으로 평가받던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조광인쇄사 사장을 지낸 정광헌씨와는 입학동기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조류학자 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의 1년 후배이고, 강인덕 전 통일원 장관과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의 1년 선배다. 김은국은 37회 졸업생에 해당하지만 이 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다. 38선 북쪽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1947년,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집안 전체가 남한으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이후 가족은 남쪽 멀리 목포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그는 목포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흥미롭게도 ‘광장’의 작가 최인훈과 김은국은 이 학교 동기동창생으로 제5회 졸업생이다. 최인훈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김은국 집안과 마찬가지로 광복 후 월남해 목포에 생활터전을 잡았다. 문학과 예술의 도시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목포 시민들은 이 도시가 낳은 인재를 언급할 때 두 사람을 빼놓지 않지만, 엄밀히 말하면 최인훈과 김은국은 목포의 적자(嫡子)라기보다는 서자(庶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5·16이 바꾼 삶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은국은 1950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해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인천으로 도피해 숨어 있다가 유엔군이 상륙하자 군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한국군 해병대에서, 나중에는 육군에서 통역장교로 5년 가까이 근무했다. 1954년 육군 보병 중위로 제대한 그는 이듬해 2월 아서 트르더 장군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버몬트주에 있는 사립명문 미들베리대에 입학해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학사학위는 받지 못했다. 이 또한 김은국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다. 국내 문헌뿐 아니라 외국 자료에도 그가 미들베리대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비록 문학사 학위는 받지 못했지만 그는 미국 명문대학의 대학원과정에 쉽게 입학할 수 있었다. 1960년에는 존 홉킨스대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고 1962년에는 아이오와대 ‘작가 워크숍’에서 창작석사학위(MFA)를 받았다. 또한 1963년에는 하버드대 극동언어 및 문학과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니까 학사학위 없이 석사학위를 무려 세 개나 받은 셈이다.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처녀작 ‘순교자’는 바로 아이오와대 창작 프로그램 석사학위 청구작품으로 제출한 것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이 작품 덕분에 그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두 번째로 1966년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으로부터 창작기금을 받았다. 이 권위 있는 기금을 처음 받은 한국인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작가 강용흘이다. 1934년 ‘초당’을 출간한 강용흘이 아시아인 최초로 이 기금을 받았을 때 큰 화제가 됐다.

    김은국이 이렇듯 명문대를 옮겨다니며 잇따라 석사학위를 받은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처음 미국에 올 때만 해도 그는 한국에 다시 돌아가 살 계획이었다. 귀국한 뒤에는 직업군인으로 일할 생각도 없지 않았다. 젊은 나이를 군대에서 보낸 그는 앞으로 한국의 정치나 경제에서 군이 맡아야 할 역할이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1961년의 5·16군사정변과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그의 인생계획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1964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에서 앞으로 군이 행사하게 될 권력을 감지했으며, 그래서 (미국에) 남아 있고 싶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적지 않은 작가가 그러하듯이 김은국이 작가가 된 것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가까웠다. 미국에 건너갈 무렵만 해도 작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993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작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역사학도가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과거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 모두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지요. 나는 그것들을 기억해내고, 그것들을 기록하며,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습니다.”

    김은국은 1960년 2월 덴마크계 미국인 여성 페닐로프 앤 그롤과 결혼했다. 1960년대 중엽 풀브라이트 재단 업무차 매사추세츠대를 방문한 김용권 교수는 이 대학 영문학과장의 주선으로 김은국 부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다. 김 교수는 페닐로프가 뛰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고 회고한다. 1960년에는 아들 데이비드가, 1962년에는 딸 멜리사가 태어났다. 미국에서 발행한 ‘죄 없는 사람’ 초판의 재킷 뒷날개에는 김은국씨가 행복한 표정으로 데이비드, 멜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데뷔작에 쏟아진 찬사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김은국은 소설을 집필하며 대학 강단에 섰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롱비치주립대 영문학과에서 강사로 일했다. 1964년부터는 매사추세츠대에서 조교수로 창작강의를 맡았다. 이밖에도 뉴욕주의 시러큐스대와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이에고주립대 등에서 강의했다. 1981년 여름부터 1983년까지 2년간은 풀브라이트 교환교수 자격으로 서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순교자’는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외국 태생의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상업적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비평가들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소설 한 권으로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이 미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가운데 비평가들은 이 작품의 문학적 성과와 가치에 관심을 쏟았다. 김은국을 도스토예프스키, 조지프 콘래드, 솔 벨로, 미겔 데 우나무노, 알베르 카뮈와 견주는 비평가도 적지 않았다.

    마침내 ‘순교자’는 ‘내셔널 북 어워드’의 최종심사에 올랐고, 스웨덴 한림원은 이 작품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려놓았다. 이 무렵 미국 언론에 실린 몇몇 서평만 보아도 이 작품이 얼마나 큰 관심을 받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령 ‘뉴욕타임스’는 “‘순교자’는 놀라운 성취로서…구약성서 ‘욥기’, 도스토예프스키, 알베르 카뮈의 위대한 도덕적·심리적 전통에 서 있다”고 평가했다. ‘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는 “‘순교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으로 절규할 때와 같은 절망에 처해 있을 때 기독교인의 신앙과 고뇌를 다룬 작품이다. 치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듯한 기법으로 쓴 김은국의 이 소설은 인간의 정신적인 시련 과정을 잘 포착했다”고 평가했다.

    일찍이 강용흘의 소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펄 벅은 이 소설에 대해서도 역시 “훌륭한 작품이다. 하나의 사건을 소재로 신에 대한 인간다운 믿음의 보편성을 표현하고 신을 믿으려고 갈망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의혹과 고뇌를 다룬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김은국은 이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고 격찬했다.

    성공한 소설이 흔히 그러하듯 ‘순교자’도 구체성과 보편성, 특수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언뜻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순수한 허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경험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김은국은 이 작품의 스토리를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에서 빌려왔다. 주인공 신 목사의 모델이 된 사람은 바로 작가의 고모부이자 이인범씨의 부친인 이학봉 목사다.

    ‘순교자 송정근(宋貞根) 목사전’(1976)에 따르면 북한의 몇몇 원로목사는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북한정권이 1947년 6월에 창당 발기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해 당수인 김화식 목사를 비롯해 김진수, 송정근, 이피득, 이학봉 목사 등을 반동이라는 명분으로 체포했다.

    이 가운데 송정근 목사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연행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학봉 목사를 비롯한 몇몇은 가까스로 풀려났다. 그러므로 개신교 목사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죄와 벌, 그리고 양심과 고뇌라는 ‘순교자’의 인간드라마는 6·25전쟁을 전후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작가가 재구성한 것이다.

    ‘순교자’작가 김은국의 행적을 찾아서

    아들 데이비드와 딸 엘리사와의 행복한 한때. 1964년 찍은 것이다.

    한 작가의 처녀작이 대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축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주이기도 하다. 처녀작의 성공이 때론 작가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문학사를 들여다보면 데뷔작품이 곧 그 작가의 최대 걸작이 되고 만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로 일약 세계적 관심을 받은 미국의 여성 소설가 하퍼 리만 해도 처녀작을 출간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두 번째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다. 친척인 리처드 윌리엄스가 “왜 두 번째 작품을 쓰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렇게 한번 히트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처녀작이 크게 성공한 작가가 실패가 두려워 감히 붓을 들지 못하는 경우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 D. 샐린저나 ‘보이지 않는 인간’을 쓴 랠프 엘리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작가란 작품의 양이나 작품 수준의 평균치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훌륭한 작품으로만 평가받는다. 오직 한 편의 작품만으로 문학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작가도 얼마든지 있다.

    김은국의 경우 후기로 올수록 작품의 수준이 떨어진다. ‘순교자’가 나온 지 4년 뒤에 출간된 ‘죄 없는 사람’은 외국 독자는 물론 국내 독자로부터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특히 이 작품이 5·16군사정변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생각한 국내 독자들은 작가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 일쑤였다. 지나치게 우파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작가가 아무리 이 작품이 5·16을 다룬 소설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문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주장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0년에 나온 세 번째 작품 ‘잃어버린 이름’에서 김은국은 일제강점기, 특히 1932년부터 해방을 맞이한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 소년이 겪은 일련의 사건을 다룬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앞의 두 작품과 비교해볼 때 장르가 분명치 않다.

    이 점과 관련하여 작가는 “나는 이 책을 허구적 소설로 썼는데 독자나 비평가들은 하나같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으로 읽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다. 허구와 사실, 창작과 역사의 경계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순수한’ 논픽션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없는 것처럼 ‘순수한’ 허구적 소설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작품에서 “모든 소설가의 꿈, 즉 허구적 작품을 가능하면 ‘사실’처럼 만들려는 그 꿈을 실현시켰다”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식민주의의 경험을 다룬 이 책은 외국 독자들에게는 ‘죄 없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작가는 민족을 뛰어넘는다”

    독자들의 반응에 실망한 때문인지 김은국은 1980년대 이후에는 픽션보다는 오히려 번역과 논픽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그는 무려 여섯 권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책 가운데는 최근에 다시 개정판이 발간된 인류학자 제이콥 브로노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비롯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에덴동산’, 솔 벨로의 ‘죽음보다 더한 불행’ 등이 있다.

    한편 그는 1981년부터 1989년까지 KBS의 TV방송용 다큐멘터리 원고를 집필하며 리포터와 내레이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국의 기독교, 6·25전쟁, 일본, 중국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 만주, 시베리아 대륙철도 등 그 내용도 무척 다양하다. 1989년에 나온 ‘중국과 소련의 잃어버린 한인’은 중국과 구소련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애환을 다룬 포토 에세이집이다.

    김은국은 한 세대 전의 강용흘과 마찬가지로 예술지상주의에 가까운 문학관을 견지했다. 이 두 사람에게 문학은 정치나 윤리, 도덕이나 철학에 ‘양도할 수 없는’ 나름의 가치와 존재이유를 지닌다. 바꾸어 말해 자기목적성을 지니는 문학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뿐 다른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은국은 “문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참여”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러한 문학관은 조국을 등지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작품 활동을 해야 하는 이른바 ‘이산(離散)’ 작가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타자(他者)’로서 주변인의 삶을 영위하는 소수민족 작가들은 흔히 예술 그 자체보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1970년 6월18일부터 7월4일까지 제37차 국제펜클럽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동서 문학의 해학’을 주제로 열린 이 대회에 강용흘은 귀빈자격으로, 김은국은 한국측 대표로 참석했다. 이때 한 계간지가 마련한 좌담회에서 강용흘은 “나는 한국문화나 한국적인 것을 지리적으로 소개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다만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 사람이니까 자연히 그렇게 된 거지요. 어떤 선전을 위해서 작품을 쓴 것은 아닙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김은국 또한 이 말에 동감을 표하며 “당시에 동기 같은 것을 생각하며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국적 소재가 작품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것이지 특별한 동기는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적’ ‘비한국적’이라는 문제보다는 작품의 예술성에 평가기준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꺼지지 않는 불꽃

    뛰어난 작가라면 굳이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김은국의 생각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기자와 가진 한 인터뷰에서 “‘뉴욕타임스’의 서평이 ‘한국 작가 리처드 김’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 미국 작가라고 생각했어요. 영어로 쓴 소설 ‘순교자’로 미국에서 작가가 되었고, 계속 그곳에서 활동했으니까요”라고 말한다. ‘한국 작가 리처드 김’이라는 표현이 마치 쇠망치처럼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는 것이다.

    그는 작품을 쓴 언어나 출간된 나라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태생에 따라 분류하려는 이 무렵 미국언론의 관행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 작가’보다는 오히려 ‘미국 작가’, 그보다는 ‘세계 작가’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이러한 그가 자신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한국 작가 리처드 김’이라는 꼬리표에 실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그의 태도는 앞서 언급한 좌담회에서 좀더 뚜렷이 드러난다. 사회자가 펜클럽대회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처음에 참 어색했어요. 저는 공식적으로는 한국 대표단인데 미국 대표단이 ‘당신은 왜 거기 있느냐’고 묻지 않겠어요? 저는 작가대회에는 생전 처음 나와 봤어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작가나 예술가는 기성상태에 대해 언제든지 도전하고 현상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국경을 초월한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그랬다. 김은국은 그의 말대로 ‘기성상태에 대해 도전하는’ 작가요 ‘국경을 초월하는’ 작가였다. 지금은 미국 북부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그의 작가정신은 ‘순교자’를 집필할 때처럼 아직도 꿋꿋하다. 전화를 통해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가 보내온 편지를 읽으며 필자는 그의 속에 자리하고 있는 예술혼의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잿더미에서 다시 살아나는 전설 속의 불사조처럼 그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올라 작품활동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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