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지난해 12월과 올 1월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와 도요타덴소배에서 중국의 왕시 5단, 창하오 9단을 차례로 물리치고 우승컵을 안았다. 두 대회의 우승상금과 부상을 합쳐 한 달 사이에 챙긴 상금만 5억원. 또 세계대회에 6번 도전해 5번이나 우승하는 놀라운 승률을 기록했다.
한국 바둑계는 행복하다. 이창호라는 특이한 천재가 10년 동안 세계를 호령했고, 뒤이어 이세돌이라는 자유분방한 천재가 또다시 세계무대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늘 최고를 원하던 아버지
이세돌을 말할 때 그의 아버지 이수오씨(1998년 작고)를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세돌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그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긴 사람이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광주교대를 졸업하고 10년 가량 교편을 잡다가 막내 세돌이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을 데리고 전남 신안 앞바다의 비금도로 이사했다. 아마 5단 실력인 이씨는 자녀 모두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도시보다 교육 환경이 열악한 섬에서 자녀들을 위한 이씨 나름의 교육 방편이었다. 이씨의 바둑 교육법은 독특했다. 그는 농사일을 나가며 자녀들에게 사활 문제를 내주고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풀게 했다.
이씨의 바둑 교육은 효과가 있었다. 장남 상훈(30·프로5단)도 프로기사가 됐고 둘째딸 세나(29)도 아마 6단으로 여성 입단대회의 문을 여러 차례 두드릴 정도의 강자가 됐다. 바둑의 길을 걷지 않은 차남 차돌(25)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재학중이고, 장녀 상희(31)는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올 만큼 수재로 자랐다. 원래 차돌도 기재(棋才)가 대단했으나 동생 세돌에게 따라잡히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3남2녀 중 막내인 세돌의 기재는 발군이었다. 바둑을 배운 지 2년 만에 아버지와 호선(互先, 맞바둑)으로 이기는 실력이 됐다. 이씨는 아들을 전국 규모의 어린이 대회에 출전시켰다. 세돌이 이붕배 등 굵직한 대회에서 우승하고 세계 어린이 바둑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자 1993년 세돌을 서울의 권갑룡 7단 도장으로 유학을 보냈다.
세나씨는 “아버지는 최고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늘 ‘최고가 아니면 꼴찌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우리 형제 중에 그 말을 가장 잘 받아들인 것은 세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1998년 지병이 악화되면서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 이세돌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주저없이 아버지를 꼽는다. 아버지는 어린 세돌의 정신적 지주였고 우상이었다. 이세돌은 세계대회 결승전 등 중요한 시합이 있으면 비금도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는다. 이번 삼성화재배를 앞두고도 다녀왔다. 최고를 원하던 아버지를 추모하며 승리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다.
2000년 32연승 대기록
이세돌은 1993년부터 권갑룡 도장에서 혹독한 바둑수업을 받는다. 당시 형 상훈씨가 입단해 권갑룡 도장에서 바둑사범을 하면서 돌봐줬지만, 막내 티가 가시지 않은 어린 그로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권갑룡 7단은 이세돌에 대해 “수를 너무 빨리 읽는 탓에 손이 쉽게 나가는 경솔함만 빼면 기재만큼은 최고였다.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수’를 자주 선보였다. 그 강렬함은 정말 놀라웠다”고 술회했다.
어린 시절의 프로기사들이 대개 그렇듯 이세돌의 승부욕은 누구 못지않게 강했다. 어이없이 지고 나면 도장(반포) 근처의 한강 고수부지에 나가 몇 시간씩 거닐다가 돌아오곤 했다.
1995년 입단대회. 이세돌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형 상훈씨가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더 이상 입단을 미룰 수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는 조한승(현 8단)과 함께 입단에 성공한다. 당시 그의 나이 12세. 조훈현(9세) 이창호(11세)에 이어 세 번째 최연소 기록이다.
그는 입단 직후부터 ‘리틀 조훈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기재를 보이며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바둑계의 기대만큼 특출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입단 첫해 그는 5승 5패의 성적을 거뒀다. 1996년엔 32승21패(60.4%), 1997년 55승21패(71.4%), 1998년 40승17패(70.2%), 1999년 47승20패(70.2%). 크게 나무랄 데 없는 성적이긴 했지만 당초 바둑계가 그에게 걸었던 기대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