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새 테크닉 못 익히면 잠을 자지 않았다”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입력2005-02-24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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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사람 하나 없는 호주 영화판에서 집념 하나로 영화를 만들어낸 사내. 동양의 서정이 담긴 애니메이션으로 서양인의 감성을 움직인 예술인. 2004년 한 해 동안 35개의 영화상을 휩쓸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재인(才人).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호주동포 박세종 감독은 앞만 보고 달리며 꿈을 이룬 ‘희망의 증거’다.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영화 ‘버스데이 보이’의 한 장면.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여기 이 말을 제대로 증명해보인 사람이 있다. 애니메이션 단편영화 ‘버스데이 보이’로 한국인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호주동포 박세종(38)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여기서 굳이 ‘미국 아카데미상’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영국 아카데미상’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 아카데미는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먼저 열린다. 2월12일 열린 영국아카데미상에도 박세종 감독의 ‘버스데이 보이’가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역시 한국인 최초다.

    11년 전 배낭여행 중 멜버른에서 만난 호주 여대생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다가 7년 전 결혼해 호주에 정착한 가난한 미술가 박세종. 그는 힘든 이민생활에도 결코 꿈을 잃지 않았다.

    동양의 서정이 담긴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아주 어려운 선택이었다. 편하게 살아갈 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는 고집스럽게 힘든 길을 선택했다. 애니메이션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의 작업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첩첩산중이었다. 그는 가난을 견뎌야 했고, 주변의 무관심을 극복해야 했다.



    9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6·25전쟁이라는 대서사와 동양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낸 ‘버스데이 보이’는 바로 그가 소망해온 꿈의 결정체다. 영화를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자연스레 믿게 된다.

    시드니의 잠 못 이루는 밤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박세종 감독이 소주로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2005년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작이 발표되던 1월26일 자정. 박세종 감독과 아내 르네 레고는 시드니 시내 피어몬트의 아파트에서 웹사이트에 오른 후보작들을 확인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환호와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호주 영화계의 친구들은 물론, 호주 및 미국 언론의 전화공세로 박 감독의 ‘시드니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덩달아 잠 못 이룬 사람이 있었다. 다름아닌 필자다.

    필자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주로 심야시간을 이용했다. 밤늦도록 이어지는 박 감독의 숱한 인터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충분한 시간을 빌려 그의 ‘꿈’을 꼼꼼하게 해석해보고 싶어서였다.

    인터뷰는 보통 밤 10시 이후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밤 10시까지 박 감독을 물고 늘어지는 호주 기자들을 “그만하라”고 내보낸 다음에야 인터뷰가 가능했다. 시드니엔 서울처럼 심야영업을 하는 곳이 없어 인터뷰는 매번 레스토랑에서 시작돼 박 감독의 집에서 끝이 나곤 했다.

    박세종 감독의 꿈을 해석하는 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의 저서 타이틀이지만, 필자에겐 한 남자의 무서운 집념, 혹은 불굴의 의지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맨땅에 헤딩하기’도 유분수지, 한국도 아닌 호주에서 무일푼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니….

    그는 이제 여러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는 유명 영화감독이다. 하긴 2004년 한 해 동안 35개의 각종 상을 챙겼으니 그리 이상할 건 없다.

    호주 TV들은 1월26일 하루 종일 미국 주재 특파원을 연결해 박세종 감독의 쾌거를 전하면서 박 감독의 인터뷰와 영화 ‘버스데이 보이’의 주요 장면을 내보냈다. 그는 하루 동안 호주 국영 ABC TV를 포함, 무려 6개 TV와 인터뷰했고 ‘시드니 모닝헤럴드’ 등의 신문사와 10여 차례의 인터뷰를 가졌다.

    ‘시드니 모닝헤럴드’의 케이트 그라트 기자는 ‘생일을 맞은 소년(Birthday Boy)의 꿈 같은 선물’이라며 박 감독의 아카데미상 후보 선정 기사를 길게 썼다. 케이트 기자는 “열정이 넘치는 감독으로 소문난 한국계 박세종이 마침내 큰일을 해냈다”고 전했다. 박 감독은 그 인터뷰에서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라는 말을 남겼다.

    박 감독의 이메일 계정이 다운될 정도로 수많은 축하메일도 답지했다. 특히 호주 퀸즐랜드주 피터 비티 총리는 축하메일에 “2004년 브리스번 영화제의 폐막작품으로 ‘버스데이 보이’를 상영하도록 해준 박 감독에게 거듭 감사한다. 꼭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를 기원하다”고 썼다.

    1월26일은 마침 호주의 건국기념일이어서 박 감독의 경사는 더욱 빛났다. 그의 집 근처인 달링하버에선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필자가 박 감독을 축하하기 위해 맥주로 건배를 제의하자 그는 “맥주를 즐기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헤어지려는 순간, 박 감독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소주는 아주 잘 마십니다”라고 말했다.

    문득 그의 표정에서 고국에 대한 향수가 듬뿍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호주의 영화판에서 좋아하지도 않는 맥주를 마시면서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런 그가 “소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다음에는 소주를 마시면서 인터뷰를 하자”고 약속하고, 그가 건네주는 ‘버스데이 보이’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귀가했다. 자동차 백미러에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박세종 감독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유난히 적요한 시드니의 새벽을 등지고 있었다.

    “흑곰아, 앞산엔 눈 오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와 아들을 깨워 새벽 ‘비디오 극장’의 막을 올렸다. 아직 잠이 덜 깨 투덜거리던 아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TV 모니터 앞에 앉았다.

    ‘祝 生日’이라는 한자 타이틀이 화면에 떴고 이어 ‘Birthday Boy’라는 영문 타이틀이 페이드 아웃된 후에, 일등병 계급장이 달린 군용 방한모를 쓴 예닐곱 살짜리 한국 소년이 귀에 익은 듯한 노래를 부르면서 등장한다. 소년의 이름은 만욱이다.

    “흑곰아 흑곰아, 앞산엔 눈 오는데…”

    소년은 쇳덩어리 구조물 안에서 뭔가를 뽑아내고 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두 번째 시도에서 볼트를 뽑아낸 소년은 더없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는 조금 전에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면서 밖으로 나온다.

    그 순간, 소년이 놀고 있는 장소와 철구조물의 정체가 드러난다. 동네 근처에 위치한 사찰 지붕 위로 전투기가 추락해 거꾸로 처박힌 것. 소년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혼자 놀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어귀엔 철길이 있다. 볼트를 들고 철길로 달려간 소년은 철로 위에 볼트를 놓고는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차가 지나가고…. 그런데 기차 화물칸에는 커다란 탱크들이 실려 있다.

    탱크가 실린 기차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자석으로 변한 볼트를 주워들고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동네로 돌아간다. 그러나 판잣집과 파괴된 기와집들이 늘어선 동네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폐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전쟁놀이에서 소년은 혼자서 아군이 되고 적군도 될 수밖에 없다. 소년이 돌멩이 하나를 주워 수류탄을 투척하듯 던질 때 아버지의 존재가 드러난다. “아버지, 여긴 적군이 너무 많아…”로 이어지는 소년의 대사에서 그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나갔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얏” 소리가 난다. 자전거를 타고 오던 우편배달부가 “누가 돌멩이를 던졌냐”며 투덜거린다.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소년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후 소년의 전쟁놀이는 다시 이어진다.

    오늘은 소년의 생일이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마루에 놓인 소포꾸러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생일선물로 생각하며 좋아한다. 꾸러미 안에서 가족사진이 꽂힌 지갑이 나오고, 군표와 군번줄이 나온다. 군번줄을 목에 건 소년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다가, 그 다음에 나온 망가진 군화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소년은 그 소포의 의미를 모른다.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소년은 신이 나서 마당으로 내려가 “하나 둘 셋 넷”을 반복하며 군인놀이를 계속한다.

    그러나 혼자 노는 것처럼 심심한 게 또 있을까. 소년은 졸음에 겨운 듯 하품을 하다가 방 한가운데서 잠이 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아직 잠들어 있고, 어딘가를 다녀온 엄마의 다감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는 아직 소포가 온 사실을 모른다. “만욱아, 만욱아, 엄마가 왔단다.” 꿈결 속 엄마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크레디트 타이들이 올라간다.

    감독 : 박세종프로듀서 : 앤드루 그레고리스크립트 : 박세종그래픽 : 박세종스토리보드 : 박세종레이아웃 : 박세종스케너리 : 박세종애니메이션 : 박세종카메라 : 박세종음악 : 제임스 리사운드 : 미간 웨지보이스 : 조슈아 안제작사 : 호주국립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학교(Australian Film, Television & Radio School)

    상영시간 9분18초. 단순한 선율의 비감한 음악이 흐르면서 자막이 다 올라갔다. 자다가 깨 TV 앞에 앉았던 필자의 아들이 빠르게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더니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아내는 손등을 자꾸만 눈가로 가져가고.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박세종 감독이 그린 호주 유수의 시사주간지 ‘불리튼’의 표지 일러스트.

    그렇게 하기를 다섯 번. 한 시간 가까이 흐른 다음, 필자의 세 식구는 아주 진지하게 ‘버스데이 보이’ 품평회를 시작했다.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나 평범한 내용인데, 너무나 특별한 영화다. 소년의 순진무구한 표정과 황량하기 그지없는 동네풍경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막막한 슬픔덩이가 가슴에 저며왔다.”

    다음은 늘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아들 차례다.

    “그동안 본 애니메이션 중 최고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느낌을 가질 여유조차 없다. 카메라의 앵글을 앞과 옆, 위쪽으로 교차시키면서 완벽에 가까운 생동감을 연출했다. 천재가 만든 작품이다.”

    열변을 토하며 흥분하는 아들에게 화답하기 위해 필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박 감독이 시를 쓰거나 시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적 이미지의 연속이다. 특히 소설에서 주로 사용하는 복선처리를 통해서 이야기의 폭을 단편이 아닌 장편으로 확대시켰다.”

    필자는 박 감독과 인터뷰하며 전해들은 얘기도 덧붙였다.

    “소년이 철구조물 밖으로 나올 때 배경으로 세팅된 장면이 이 영화의 주제를 강하게 암시한다. 추락한 전투기가 사찰 지붕 위로 거꾸로 꽂혀 있는 장면은, 사찰로 상징처리 된 동양문화가 서양의 상징물인 전투기에 의해서 파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 감독은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버스데이 보이’를 제작하는 과정에 영화의 바탕에 흐르는 정서를 보편화하려고 애썼다. 수시로 프로듀서와 동료영화인들에게 해당 장면을 보여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를 물어보았다.

    영국계 호주 여성인 박 감독의 부인 르네 레고도 영화의 정서를 조율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은퇴한 목사인 박 감독의 장인은 우스개를 곁들인 소감을 들려주며 영화를 꼼꼼하게 모니터 해줬다.

    그 과정에 박 감독이 내린 결론은 동양과 서양의 밑바닥 정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차를 이용해 자석을 만드는 것도 잡동사니 쇠붙이와 동전이라는 소재만 다를 뿐이라는 것. 서양 어린이들도 똑같은 놀이를 하면서 자라난다고 했다.

    ‘원맨 밴드’의 외로운 작업

    영화 크레디트 타이틀에서 보았듯 ‘버스데이 보이’는 박세종 감독 혼자서 만든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다. 호주국립영화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은 박 감독이 유일하다. 게다가 무명인 박 감독과 함께 일하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첨단기술과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버스데이 보이’의 제작과정은 외롭고 힘겨운 일들의 연속이었으리라. 박 감독은 ‘원맨 밴드’가 되다시피 했다. 박 감독이 ‘버스데이 보이’ 제작을 시작했을 때, 영화의 스폰서인 호주국립영화학교에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작업이 중반부에 이르자 ‘작품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학교가 전면지원에 나섰다. 그 후의 작업은 대체로 순탄했다. 일반 프로덕션에서 제작했다면 30만 호주달러(약 2억4000만원)가 소요됐을 터. 그러나 국립영화학교의 인력과 장비를 무료로 사용해 지출 비용이 거의 없었다.

    모든 제작비를 국립영화학교에서 부담했기 때문에, 영화의 지적소유권은 박세종 감독에게 있어도 영화 자체의 소유권은 국립영화학교가 갖고 있다. 그런 연유로 ‘버스데이 보이’는 한국 국적의 호주 영주권자가 만들었음에도 호주 영화로 각종 영화제에 출품된다.

    영화학교는 제작비만 댄 것이 아니다. 박 감독이 2년 남짓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그의 생계비까지 지원했다. 물론 이는 박 감독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한 학과에 네 명 정도로 소수정예만 선발하는 영화학교는 모든 학생이 경제적 부담 없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소정의 생계비를 지원한다.

    그러다 보니 대학원 2년 과정의 학생 한 명을 졸업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 비용보다 더 든다고 한다. 지원금액이 많아 국가예산을 얻기 위한 학교 당국의 노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액 국비로 운영되는 영화학교는 전세계적으로도 몇 개 되지 않는다. 사립학교로 운영되는 미국의 경우 학비부담이 엄청나 졸업 후 웬만큼 성공하지 않으면 평생을 빚에 쪼들려 살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박 감독의 끈기와 성실성은 호주 영화계에 정평이 나 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애니메이션 제작 테크닉을 꼼꼼하게 챙겨서 자신의 영화제작에 활용한다. 신인감독답게 신기술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박 감독의 실험정신도 큰 밑천이다.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시드니 모닝헤럴드’에 실린 박세종 감독의 아카데미상 후보 선정 기사.

    그는 인터뷰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면 잠을 자지 않았다. 사실 테크닉을 배우고 익히면서 영화작업에 활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라며 작업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시간과 인력이 많이 필요한 2D방식 대신, 적은 인원이 작업할 수 있고 성취도가 높은 3D방식을 택했다. 첨단기술을 적극 활용해 자신이 처한 불리한 여건을 극복한 것. 그의 얘기를 잠깐 들어보자.

    “3D는 모델링 하고 캐릭터를 설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그것만 끝내고 나면 동화(動畵)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작업 후에 클린업을 하느라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도 있다.”

    뉴사우스웨일스(NSW)주 정부 소속 국립영화학교는 주 정부당국의 적극적인 영화산업 지원정책 덕분에 예산확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한동안 이어진 호주 영화산업의 부진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

    그 위기를 단 ‘한 방’에 종식시킨 이가 박세종 감독이다. ‘버스데이 보이’가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자, 보브 카 NSW주 총리가 영화학교를 직접 방문해 박세종 감독을 격려하면서 900만 호주달러를 학교에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이런 작품만 만들면 얼마든지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박 감독은 “내가 학교에 기여한 공로보다는 학교로부터 받은 혜택이 훨씬 더 많다”면서 “특히 각종 영화제에 영화를 배급하는 부서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를 인터뷰한 다음날 아침, 영화학교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영화배급 매니저 루스 샌더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한국과 호주의 큰 영광이다. 박세종 감독의 모국인 한국에 축하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박 감독은 학교와 배급부서에 공을 돌리지만, 사실은 그의 작품을 출품해달라는 이메일 때문에 내 컴퓨터가 몸살을 앓고 있다. 그는 이미 애니메이션계의 세계적 스타”라고 말했다.

    박세종 감독의 수상경력을 보면 그가 이미 스타 반열에 올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2004년 8월, ‘애니메이션의 칸 영화제’라고 불리는 프랑스 안시(Annecy)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시그라프(SIGGRAPH)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 2005년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작에 오르게 됐다.

    더욱이 홈그라운드라 할 제51회 시드니 필름 페스티벌에서 대상(요람 그로스 어워드)을 거머쥠으로써 국내외 애니메이션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이 상은 2004년 미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아담 엘리어트의 작품 ‘하비 크럼펫’과 당시 인기절정을 달리던 ‘풋 노트’를 제쳤다는 점에서 박 감독의 명성을 한껏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는 새해 들어서도 영화제 참석과 심사위원직 수행, 영화상 수상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월12일엔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참가했고, 3월에 열리는 시드니영화제에선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그러나 2월24일 열리는 일본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미국 아카데미상 일정과 겹쳐서 참가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박 감독이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함께 공동 수상자로 결정된 상태지만 그 사실로 만족해야 할 처지라는 것.

    아내 르네와의 운명적 만남

    정신없이 바빠진 남편에 대해 박 감독의 부인 르네 레고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행여 불만은 없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불만이라니요. 내가 애니메이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더구나 좋아하는 해외여행을 실컷 할 수 있어서 행복할 따름이에요”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11년 전, 멜버른의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던 르네는 한국에서 온 한 대학생 배낭여행족과 한 집에 세 들어 살다가 친구가 됐다. 그 대학생이 바로 박세종 감독이다. 그들은 4개월 남짓한 교제를 끝으로 헤어졌다. 박 감독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편지와 전화로 교제를 이어갔다. 박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매일 아침 전화를 걸었다. 시차 때문에 꼭두새벽에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당시의 전화요금 청구서를 갖고 있다. 매일 전화 거는 것말고도 매주 두 통의 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 것들이 사랑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다 르네가 한국에 와서 1년을 머물렀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결국 7년 전, 박 감독이 호주로 건너와 르네와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만 두 살짜리 아들 가람이 있다.

    하지만 박 감독은 호주에서 생활인이 될 준비가 부족했다. 그는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직장을 찾았고, 급한 마음에 예약도 하지 않고 회사에 쳐들어가 취직을 부탁하는 용감함을 발휘했다.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최첨단 3D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 ‘버스데이 보이’의 장면들.

    결국 그는 호주 유수의 시사주간지 ‘불리튼’의 일러스트 작가가 되어 호주에 연착륙했다. 존 하워드 호주 연방총리를 비롯한 수많은 표지 삽화를 그렸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시드니 모닝헤럴드’와 호주 유일의 전국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의 삽화를 그렸다.

    그렇게 5년 동안 일러스트를 그리던 그는 어릴 적부터 꿈꾸어온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과감히 일을 그만두고 호주국립영화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몇 편의 습작품을 만든 후 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요량으로 ‘버스데이 보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첫 타석에 홈런을 날린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한국 국적의 영주권자로 활동할 생각이다. 아들에게 아빠의 고국과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싶기 때문이다. 박 감독의 이런 정신은 작품세계와도 연결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는 말처럼, 동양의 정서가 듬뿍 담긴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동서양을 모두 감동시키는 작가가 되겠다는 것. 그는 이미 ‘버스데이 보이’를 통해 소망의 대부분을 이룬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다르다.

    “여기까지 온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하겠다. 갈수록 애니메이션에 코미디나 동적인 요소가 많이 첨가되는데, 나는 관객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휴먼드라마를 만들고 싶다.”

    “‘버스데이 보이’는 한국 영화”

    2월5일 오후, 박세종 감독은 부인 르네, 아들 가람, 프로듀서 앤드루 그레고리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일행은 일단 미국으로 건너갔다. 2월12일 런던에서 열리는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참석한 후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필자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소주 두 병을 거뜬히 비우면서, 그는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속내를 다 털어놓았다. 다음은 인터뷰의 요약이다.

    -미국 주재 호주 특파원에 의하면 ‘버스데이 보이’의 아카데미상 수상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인은 어떻게 예상하는가.

    “물론 나도 상을 받고 싶다. 그러나 상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상을 받는다고 해서 ‘버스데이 보이’가 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수상을 바라는 진짜 이유는 다음 작품을 욕심껏 만들 수 있는 여건의 토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기술적인 측면에서 힘들었다는 얘기만 했다. 학교나 동료들과 갈등은 없었나.

    “거의 없었다. 다만 제작 초기에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 고통스러웠다. 그때는 언어문제도 극복되지 않아서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버스데이 보이’가 성공한 후 박 감독에 대한 호주국립영화학교의 대접이 달라졌는가.

    “호주국립영화학교가 국립이라지만 학교의 명예와 예산확보를 위해서 영화제 수상자를 선의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이해한다. 그러나 요즘은 좀 지나친 것 같아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박 감독이 영주권을 고집해서 한국인 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소개되지만, 결국은 호주 영화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영화의 배경과 내용을 보라. 누가 ‘버스데이 보이’를 보고 호주 영화라고 하겠는가. 다만 호주의 시스템과 예산, 장비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소유권 측면에서 족보가 호주 영화인 건 맞다. 그렇기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 예산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호주시민권을 취득하지 않고 한국 국적의 영주권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이유에서인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작품의 정체성도 고려했다. 호주시민권자가 되면, 내가 만든 작품은 ‘호주 사람이 만든 호주 영화’가 된다. 아쉬운 대로 ‘한국 사람이 만든 호주영화’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그것도 모든 인류가 공감하는 보편성이 담보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예술인으로서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인 발상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내가 만드는 작품은 작가의 출신배경을 알아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작품세계는 동양 문화가 바탕에 깔린 한국인의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한국을 사랑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를 사랑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만 두 살이 된 아들 가람이와 피크닉을 즐기는 박세종 감독

    -한국 공관이나 한인 동포사회의 지원은 없었나.

    “시드니총영사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총영사관 직원들과는 영화시사회를 갖기도 했다. 특히 김창수 총영사가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해줬다. 또한 한인동포 사업가인 코오스트 인터내셔널(Ko Aust International) 김흥기 사장과 뉴 칼리지학원 이영수 원장이 경제적으로 후원해줬다. 세 분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영화의 정체성 얘기가 나왔으니 묻겠다. 대사를 한국말로 처리했는데 국제시장에서 문제가 없나?

    “영어자막으로 처리했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 만욱이가 영어로 노래하고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아마 영화의 한국적 정서를 절반 이상 잃었을 것이다.”

    -호주에서 이민자로 정착하면서, ‘불리튼’지의 일러스트 표지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성공사례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다 버리고 애니메이션 쪽으로 갈 수 있었나.

    “사실 큰 결단이었다. 그러나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하긴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아들이 나중에 ‘아빠는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평생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그 결정에 부인의 반대는 없었나.

    “심각하게 상의했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은데, 그러면 당신이 큰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며칠씩 집에 못 들어오는 일도 생길 것이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평생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조건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했다. 아주 흔쾌히 동의해준 아내가 고마웠다.”

    -‘버스데이 보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사찰에 전투기의 잔해가 꽂혀 있는 장면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전쟁으로 파괴해버린 아픈 역사를 고발하고 싶었다. 그건 과거사인 동시에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꿈꾸는 것을 중단하지 마세요(Don’t stop dreaming!). 애니메이션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열정으로 목숨을 걸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박 감독과 헤어져 귀가하는 길목에 시드니의 신새벽이 열렸다. 시드니 하버의 확 트인 전망 속으로 흰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올랐다. 박세종 감독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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