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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 시인의 시드니 통신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새 테크닉 못 익히면 잠을 자지 않았다”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상 후보 박세종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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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의 표정에서 고국에 대한 향수가 듬뿍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호주의 영화판에서 좋아하지도 않는 맥주를 마시면서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런 그가 “소주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다음에는 소주를 마시면서 인터뷰를 하자”고 약속하고, 그가 건네주는 ‘버스데이 보이’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귀가했다. 자동차 백미러에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박세종 감독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유난히 적요한 시드니의 새벽을 등지고 있었다.

“흑곰아, 앞산엔 눈 오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와 아들을 깨워 새벽 ‘비디오 극장’의 막을 올렸다. 아직 잠이 덜 깨 투덜거리던 아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TV 모니터 앞에 앉았다.

‘祝 生日’이라는 한자 타이틀이 화면에 떴고 이어 ‘Birthday Boy’라는 영문 타이틀이 페이드 아웃된 후에, 일등병 계급장이 달린 군용 방한모를 쓴 예닐곱 살짜리 한국 소년이 귀에 익은 듯한 노래를 부르면서 등장한다. 소년의 이름은 만욱이다.



“흑곰아 흑곰아, 앞산엔 눈 오는데…”

소년은 쇳덩어리 구조물 안에서 뭔가를 뽑아내고 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두 번째 시도에서 볼트를 뽑아낸 소년은 더없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는 조금 전에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면서 밖으로 나온다.

그 순간, 소년이 놀고 있는 장소와 철구조물의 정체가 드러난다. 동네 근처에 위치한 사찰 지붕 위로 전투기가 추락해 거꾸로 처박힌 것. 소년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혼자 놀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어귀엔 철길이 있다. 볼트를 들고 철길로 달려간 소년은 철로 위에 볼트를 놓고는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차가 지나가고…. 그런데 기차 화물칸에는 커다란 탱크들이 실려 있다.

탱크가 실린 기차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자석으로 변한 볼트를 주워들고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동네로 돌아간다. 그러나 판잣집과 파괴된 기와집들이 늘어선 동네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폐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전쟁놀이에서 소년은 혼자서 아군이 되고 적군도 될 수밖에 없다. 소년이 돌멩이 하나를 주워 수류탄을 투척하듯 던질 때 아버지의 존재가 드러난다. “아버지, 여긴 적군이 너무 많아…”로 이어지는 소년의 대사에서 그의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나갔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얏” 소리가 난다. 자전거를 타고 오던 우편배달부가 “누가 돌멩이를 던졌냐”며 투덜거린다. 언덕 뒤로 몸을 숨긴 소년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후 소년의 전쟁놀이는 다시 이어진다.

오늘은 소년의 생일이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마루에 놓인 소포꾸러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생일선물로 생각하며 좋아한다. 꾸러미 안에서 가족사진이 꽂힌 지갑이 나오고, 군표와 군번줄이 나온다. 군번줄을 목에 건 소년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다가, 그 다음에 나온 망가진 군화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소년은 그 소포의 의미를 모른다.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소년은 신이 나서 마당으로 내려가 “하나 둘 셋 넷”을 반복하며 군인놀이를 계속한다.

그러나 혼자 노는 것처럼 심심한 게 또 있을까. 소년은 졸음에 겨운 듯 하품을 하다가 방 한가운데서 잠이 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아직 잠들어 있고, 어딘가를 다녀온 엄마의 다감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는 아직 소포가 온 사실을 모른다. “만욱아, 만욱아, 엄마가 왔단다.” 꿈결 속 엄마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크레디트 타이들이 올라간다.

감독 : 박세종프로듀서 : 앤드루 그레고리스크립트 : 박세종그래픽 : 박세종스토리보드 : 박세종레이아웃 : 박세종스케너리 : 박세종애니메이션 : 박세종카메라 : 박세종음악 : 제임스 리사운드 : 미간 웨지보이스 : 조슈아 안제작사 : 호주국립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학교(Australian Film, Television & Radio School)

상영시간 9분18초. 단순한 선율의 비감한 음악이 흐르면서 자막이 다 올라갔다. 자다가 깨 TV 앞에 앉았던 필자의 아들이 빠르게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더니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아내는 손등을 자꾸만 눈가로 가져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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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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