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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현대사 홍수’에 허우적대는 한국 영화

향수, 패러디, 공포, 판타지에 가려진 역사적 진실

  • 김경욱 영화평론가 nirvana1895@hanafos.com

현대사 홍수’에 허우적대는 한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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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와 코미디, 유아성과 퇴행성, 도피주의와 판타지가 잡동사니와 뒤섞이면서 추억은 그 시대로부터 직면하고 싶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을 가려버린다. 광주의 피눈물로 시작해 거리의 투쟁을 거쳐 1987년 6월민주항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 기만적인 3당합당으로 끝장난 1980년대의 역사는 이 영화들의 어디에도 없다.

그 결과 2002년 한국 ‘향수영화’에 그려진 1980년대는 10대와 20대에게는 낯선 것들과 촌스러움으로 웃음을 안겨주고, 386세대에게는 순수의 시대를 뒤돌아보는 위안을 선사한다. 그리고 마지막 정지화면 속에 그 시간을 봉인해버린다.

웃음과 위안을 안겨주는 순수의 1980년대? 그러나 1980년대의 두려움이 모두 잊혀진 것은 아니다. 2003년 개봉한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그 1980년대를 연쇄살인마가 출몰하는 공포의 시간으로 뒤바꾼다.

코미디가 공포영화로

1980년대에 실제로 일어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공포 장르의 한 갈래인 난도질 영화(slasher movie)의 관습을 즐겨 사용한다. 거의 마지막까지 살인마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방식이나 에필로그 처리가 특히 그렇다. 현재의 시점으로 건너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형사 박두만은 우연히 사건현장에 다시 서게 된다.



시체가 놓여 있던 논도랑을 들여다보는 그에게 한 소녀가 말을 건다. 며칠 전 어떤 남자가 자기가 옛날에 했던 일이 생각나 그 논도랑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그냥 평범하게 생겼다고 소녀가 말할 때, 박두만은 고개를 돌려 관객을 응시한다. 얼굴을 보면 범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던 그는 스크린을 넘어 평범한 관객들에게서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단란한 가정을 꾸린 평범한 가장이 추수를 앞둔 가을 들판을 걸어가는 지극히 평화로운 이미지는 박두만이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자마자 바로 깨져버린다. 또한 그의 응시는 ‘살인의 추억’을 간직한 살인마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일으키며 관객을 허구에서 현실로 불러온다.

연쇄살인을 저지른 괴물이 세월을 건너뛰어 아직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암시는 분명 무시무시한 괴물이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난도질 영화를 닮았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1980년대로부터 실화를 끌어들이자 코미디가 공포영화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사례에서 보듯 현대사를 다루는 한국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즉 역사의 향수·추억을 다루는 영화와 역사의 기억을 다루는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죽거리 잔혹사’는 ‘해적’이나 ‘품행제로’와는 다른 방식으로 참혹했던 1970년대 말의 고교시절을 그린다.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한 채 그때를 살아간 인물들을 조명하지만, ‘친구’처럼 감독 자신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기에 그 시절을 추억하는 향수영화의 범주에 들어간다.

반면 4·19와 5·16, 10월유신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을 보여주는 ‘하류인생’과 ‘효자동 이발사’,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알 포인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역사의 기억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이 구분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남한 인구 4700만명 중 1250만명이 본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역사 속의 개인이 아니라 기억 속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영화는 동생의 플래시백(flashback·장면의 순간적인 전환을 반복하는 수법) 구조인데, 이상하게도 플래시백 속의 이야기는 형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기이하게도 기억의 상호 주관성이라는 플래시백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6·25전쟁을 기억하는 척하면서 형제애가 핵심인 멜로드라마의 틀 속에 6·25전쟁이라는 역사를 가둬버린다. 6·25전쟁은 스펙터클을 위한 장치의 기능을 가질 뿐이며, 영화의 관심은 오로지 극단적인, 그야말로 잔혹한 외부 환경 속에서 핏줄을 지키고 가문의 영광을 구현하려는 형제의 악전고투를 신파조로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살인의 추억’이 대중적으로, 그리고 비평적으로 성공한 다음 ‘실미도’가 도착했고, 한국 영화로선 꿈의 숫자이던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살인의 추억’과 ‘실미도’의 성공은 실재 사건을 소재로 한 실화영화 붐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바람의 파이터’는 성공했지만 ‘슈퍼스타 감사용’은 실패했으며, 지난해 하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간 ‘역도산’은 서울 관객 38만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왜 한쪽은 성공하고 다른 한쪽은 실패한 것일까. 역사와의 대면에서 대중이 쳐다보고 싶은 것과 마주하기 싫은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실미도’는 1971년 8월23일에 일어난 ‘실미도 사건’을 그렸으며, ‘역도산’은 1925년부터 1963년까지 살다 간 실존인물 김신락이 주인공이다. 제목 자체에서 실화영화임을 알리는 ‘실미도’와 ‘역도산’, 이 두 편은 각각 성공한 블록버스터와 실패한 블록버스터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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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영화평론가 nirvana1895@hanaf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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