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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의 酒黨千里 ③

퇴락해가는 ‘한국의 술’ 막걸리

미국 밀가루, 일본 누룩으로 빚는 국적불명 혼혈주

  • 허시명 여행작가, 전통술품평가 soolstory@empal.com

퇴락해가는 ‘한국의 술’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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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땅에서 자란 쌀과 누룩으로 빚은 전통 막걸리가 사라지고 있다.
  • 언제부턴가 양조장에선 미국 밀가루로 술밥을 만들고, 일본 누룩으로 막걸리를 빚고 있다.
  • 우리의 재래누룩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는데….
퇴락해가는 ‘한국의 술’ 막걸리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거동 소재 송학곡자 누룩방.

친구야! 나는 지금 술을 찾아 일본에 와 있다. 당연히 일본 술이지. 담배도 그 나라 공기와 함께 피워야 제 맛이라는데, 술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니. 그런 연유로 술 한잔 맛보자고 일본까지 왔다. 호사를 한다고 나무라겠지만, 어찌 단순히 술 한잔이겠는가. 술 속에 문화가 있고, 한 나라의 역사가 담겨 있거늘.

돌아보면 우리는 일본을 무시해왔다. 그들을 우리 뒷자리에 앉아 있는 ‘키 작은 족속’쯤으로 여겼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중국으로 향했다. 종종 귀찮게 구는 일본을 뒷발질하듯 무시하면서. 그것이 중화(中華)사상인 듯싶다. 중국에서 먼 나라일수록 더 막돼먹은 족속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뒤통수를 얻어맞아야 했다. 임진왜란과 한일강제합방, 두 번씩이나. 일본에 오니 그 생각부터 앞선다.

이제 일본을 똑바로 봐야겠다. 마음속으론 한없이 무시하고 지우고 싶지만, 그것만이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 아닐까 싶어서다.

내가 와 있는 곳은 히로시마에 있는 주류총합연구소다. 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일본의 국가기관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일본 양조장 사람들을 대상으로 2개월 코스의 청주(淸酒) 실무자 교육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 강의를 듣는 중이다. 일본 술을 만들려고? 글쎄,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부러운 것이 있다. 내 옆자리에는 서른두 살의 일본 청년이 양조기술을 배우고 있다. 아버지가 하는 양조장을 이어받을 친구인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비즈니스 전공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가 유학을 다녀오고 사장이 되는 것은 부럽지 않다. 양조장을 이어받겠다는 의욕이 부러운 거다. 우리 양조장은 어디 그런가. 양조장 주인은 자식에게 고시공부를 시키거나 의사가 되기를 바랄지언정 양조장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큰 주류회사는 술로 돈 벌어 좀더 ‘의젓한’ 사업에 진출할 궁리를 해대고.



일본 술 강의를 들으면서 깜짝 놀란 게 있다. 일본도 우리처럼 쌀술이 전통술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세계 명주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케’가 바로 쌀술이다. 사케는 ‘술 주(酒)’자를 일본말로 훈독(訓讀)한 거다. 쌀로 만든 일본 청주, 그 사케가 이제는 와인처럼 고유명사로 쓰인다.

사케를 만들 때 쓰는 재료가 일본 누룩인 코오지(麴)다. 이것도 ‘누룩 국(麴)’자를 일본말로 훈독한 것이다. 코오지는 우리 누룩과 달리, 찐 쌀알에다 오리제(Aspergillus oryzae)라는 황국균을 뿌려 배양한 균사체다. 일본은 담박한 맛을 찾아 쌀누룩으로 선택했고, 우리는 맛과 향이 풍부한 밀누룩을 취했다. 그런데 강의시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 ‘코오지균은 국균(國菌)’이라는 것이다. 균이 어디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있겠느냐만, 하여튼 제 나라 균이라고 강사는 역설하더라. 이 말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긴 한숨이 나오더라. 왜냐고? 우리 누룩의 처지가 생각나서 말이다.

3개밖에 안 남은 누룩곡자

내가 일본에 오기 전에 들른 곳이 있다. 우리의 누룩 제조장이다. 현재 우리나라 양조장에 전통 누룩을 공급하는 업체는 딱 3군데, 진주곡자, 상주곡자, 송학곡자다. 지역 이름을 땄으니 두 곳은 경상도에 있는 줄 알 테고, 송학곡자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리에 있다가 광산구 삼거동으로 이사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송정리 옛 송학곡자 터다. 지난해 여름에 한번 들렀다가 감동을 받아 다시 찾아간 것이다. 양조장은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으로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여자 후배가 술 빚는 동네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좋은 곳을 소개해달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양조장 주인 때문에 단념했다. 내가 이렇게 양조장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이 엄청 화를 낼 것이다. 방송국에서 찾아와 문을 열어 달래도 거절할 정도로 완고하거든.

그곳은 3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듯한 퇴락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찾았을 땐 쓸쓸하고 적막해서, 순식간에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금천양조장과 어깨를 맞대고 있던 예전 송학곡자 제조장의 풍경이 그렇다는 말이다. 송학곡자가 이사한 뒤로 그렇게 방치됐다.

그곳엔 누룩을 띄우던 누룩방이 20개가 넘는다. 누룩방 안에는 누룩을 얹던 시렁과 누룩을 디딜 때 잡던 끈이 낡을 대로 낡은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벽에는 누룩방을 데우기 위해 쌓아둔 연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음산하지만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 좋았다. 주인은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을 게다. 하지만 말로만 듣던 누룩방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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